20년 넘도록 문장을 다듬어온 전문 교정자인 저자가, 동사를 제대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책이 마땅치 않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저술한 책이다.
한국어는 주어나 목적어를 생략하고 동사만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만큼 동사 중심의 언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그럼에도 그동안 한국어 관련 책에서 동사가 외면받아왔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사전 순서대로 헷갈리는 동사들을 모아 비교하고 대조하는 방식의 짤막한 이야기 형식을 띠고 서술됐다. 특히나 책의 서술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해당 동사들을 언급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인 셈이다. 사전식의 동사 모음을 따라가며 이들 남녀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다.
저자가 동사를 대하는 자세를 잘 보여주는 책의 설명을 보자.
“우리말에서 형용사와 함께 이른바 용언에 해당하는 동사는 음식으로 치면 육수나 양념에 해당한다. 제 몸을 풀어헤쳐 문장에 스며들어서 글맛을 내기 때문이다. 육수나 양념과 마찬가지로 잘 쓰면 감칠맛까지 낼 수 있지만 잘못 쓰면 맛은커녕 허기를 채우기도 어려워진다. 육수에 견준 김에 한 발 더 나아가자면, 다양한 육수와 양념이 화학조미료에 밀려나듯이 한자어에 ‘-하다’나 ‘-되다’를 붙여 쓰거나 대표되는 동사 하나로 한통쳐 쓰면서 멀쩡한 우리말 동사들이 때 이르게 죽은말 취급을 받고 있다.”
저자 김정선은 20년 넘게 단행본 교정 교열 일을 했으며, 2000년부터는 외주 교정자로 문학과지성사, 생각의나무, 한겨레출판, 현암사, 시사IN북 등의 출판사에서 교정 교열 일을 했다. <동사의 맛> 이후에 낸 책으로는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유유출판사>가 있다.
목차
1부 가려 쓰면 글맛 나는 동사
2부 톺아보면 감칠맛 나는 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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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을 맛깔스럽게 다룬 부분과 남자의 슬픔에 공감이 가는 부분을 인용한다.
감치다
깁다
바늘과 실이 있다. 실을 바늘귀에 꿰고 옷감을 꿰맨다. 굵고 큰 바늘에 굵은 실을 꿰고 두꺼운 헝겊을 맞댄 뒤 이불 홑청을 호듯 듬성듬성 꿰매기도 하고, 가늘고 작은 바늘에 가는 실을 꿰고 바짓단을 접은 뒤 바늘땀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꿰매기도 한다. 옷감을 이어 붙인 뒤 바지 안쪽에 세로로 난 바늘땀처럼 안쪽에서 마치 용수철을 꿰듯 감아 꿰매기도 하고, 해진 자리에 다른 옷감을 대고 꿰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천 사이에 솜을 넣고 죽죽 줄이 가게 박음질하듯 꿰맬 때도 있다. 순서대로 쓰면 시치고, 공그르고, 감치고, 깁고, 누빈 것이다. 시치는 일은 시침질, 공그르는 일은 공그르기, 감치는 일은 감침질, 깁는 일은 기움질, 누비는 일은 누비질이라고 한다.
바늘과 실이 지난 자리엔 바늘땀과 함께 이렇듯 낱말도 남는다. 하물며 사람이 지나간 자리야. 시친 듯 지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친 듯 지난 사람도 있고, 공그른 듯 지나는가 하면 기운 듯 지나기도 하며, 때로는 온통 누비고 다니는 사람도 있으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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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끊다
애끓다
‘애끊다’는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라는 뜻이고, ‘애끓다’는 ‘몹시 답답하거나 안타까워 속이 끓는 듯하다’라는 뜻이다.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라는 뜻풀이가 가능한 이유는 ‘애’가 ‘근심에 싸요 초조한 마음’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옛말로는 ‘창자’를 뜻하기도 하고 명태 같은 생선의 간을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끊다’와 ‘애끓다’는 창자가 끊어지거나 끓는 것이다. 상상하기 어렵다. 지나치게 극단적이기도 하고. 이럴 땐 그냥 ‘초조한 마음’ 정도로 푸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래야 ‘애먹다, 애쓰다, 애타다’ 같은 표현도 쓰기 쉬울 테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가 내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버지 얘기를 들려주었다. 한국 전쟁이 터져 온 가족이 피란길에 올랐다가 구사일생으로 집에 돌아온 날, 남자의 할머니는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 밥을 안치고 텃밭에 일구어 두었던 열무를 뽑으려다가 그만 불발탄이 터져 폭사했단다. 남자의 할아버지가 얼른 할머니에게 달려가 보니 배가 터져 창자가 쏟아져 나왔는데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고. 남자의 할아버지는 부랴부랴 할머니를 안고 냇가로 뛰면서 남자의 아버지에게 쏟아진 창자를 들고 따라오라고 외쳤단다. 남자의 아버지는 제 어미가 쏟아 놓은 창자를 손에 들고 아버지를 따라 냇가로 뛰어가서는 흙이 잔뜩 묻은 창자를 씻어 다시 어미의 배 속에 넣으려 했지만 그땐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고.
“그때 아버지 나이가 열다섯이었어요. 어미의 창자를 손에 그러담고 냇가로 뛸 때 창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을 겁니다. 애끊는 심정이나 애끓는 마음이라는 말, 전혀 과장된 게 아닌 셈이죠. 아버진 돌아가실 때까지 열무는 전혀 입에 대지 않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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