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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힘이 정의다][독서][세계관]"법령과 황금률은 노예와 바보에게 차꼬를 채우느라 만든 것이다."

by 노지재배 2017.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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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령과 황금률은 노예와 바보에게 차꼬를 채우느라 만든 것이다."


그야말로 신성모독의 책이다. 종교, 도덕, 법, 정의... 이 책이 집어던지고 침을 뱉는 기존의 관념들의 일부다. 기존 잣대들을 차례로 허물어뜨린 자리에 이 책이 새롭게 들이대는 신념은 오직 하나 "힘이 정의다"로 요약된다. 그런 만큼 이 책의 저자는 실명조차 알 수 없는 가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더구나 기존의 관념 체계를 깡그리 무시하는 이 책의 내용은 단순히 힘에 대한 정의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힘이 정의"라는 사고를 밀고 나간 이 책의 곳곳은 인종에 대한 편견, 남성과 여성에 대한 편견 등으로 얼룩져 읽는 내내 독자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이번 서평에 인용한 글들에는 인종에 대한 편견과 성관념에 대한 무지막지한 편견은 배제했다. 그만큼 불편한 내용이 많은 책이다.


다만, 그동안 정의와 평등, 종교 등의 관념이나 기존 체계들이 어떻게 불공평한 세상을 지탱해 왔고 오히려 이러한 불공평한 세상을 감추거나 합리화해 왔는지 지적하고 까발리는 저자의 글은 중간중간 아주 통쾌하거나 높이 사 줄만 한 부분도 존재한다. 사고의 체계를 넓히고, 기존 선입관을 깨는 데, 그리고 신성시되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아무런 제약도 없는 마음으로 새롭게 세상을 보는 방법을 알려주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장정일은 추천사에서 "120여 년 전에 나왔던 괴문서(怪文書)를 2015년에 해독(解讀, 解毒)하기의 괴로움은, 강력한 사회진화론의 자장 아래 작성된 이 책이 오늘의 세계와 너무나 잘 부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장정일의 말처럼 이 책이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새로운 안목으로서, 독자의 눈을 넓혀 줄 수 있는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저자 소개


래그나 레드비어드


오늘날까지도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익명의 저자이다. 역동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래그나 레드비어드라는 이름은, 스스로가 오딘 신의 후손이라 칭하며 프랑스와 영국을 공포에 몰아넣은 전설의 바이킹 영웅 라그나르 로드브로크(Ragnar Lodbrok)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글자 그대로 ‘붉은 수염(red beard)’을 자랑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성서를 포함한 각종 문헌을 자유자재로 인용할 만큼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때로는 포효하듯 때로는 냉소하듯 온갖 독설과 주장을 쏟아내며 강자의 철학을 역설하고 있다.




-역자


성귀수


시인이자 번역가이다. 연세대학교 불어불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정신의 무거운 실험과 무한히 가벼운 실험정신》과 ‘내면일기’ 《숭고한 노이로제》가 있다. 





-목차


옮긴이 해설

제1장 서문 

제2장 우상파괴 

제3장 거미줄의 정체 

제4장 인간은 육식동물이다!

제5장 인간의 최종 목표

제6장 섹스와 여자와 전쟁

이 시대의 논리

서평 : 1890년에 나왔던 괴문서(怪文書)를 2015년에 해독(解讀, 解毒)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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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법칙은 쿠란, 성서, 십계명, 율법서를 들춰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퇴행과 죽음의 법칙이면 몰라도, 법에서도 으뜸인 법(法)은 히브리 자음들이나 청동과 돌의 서판(書板)이 아닌,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자기 내면의 결정을 따르기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세상의 기준에 연연하는 자는 연자 맷돌에 옭아매려고 호시탐탐 그를 노리는 적들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적은 이웃 가운데 있는 법이다.

  노련한 자들은 신령한 벼락을 경멸의 비웃음으로 대하고, 인간의 법이 내린 판결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그런 모든 것을 그들은 훌쩍 뛰어넘어 존재한다. 법과 규칙은 지배를 받는 아랫것들에게나 어울리는 법. 자유인은 그런 것 필요 없다. 종속된 자들을 옭아매 부리기 위해 십계명을 제작하고 계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자기 손으로 꾸며낸 그것 앞에서, 속임수를 쓸 요량이 아닌 한,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지는 않는다.

  법령과 황금률은 노예와 바보에게 차꼬를 채우느라 만든 것이다. 물론 매우 유용한 도구들이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족속을 다스려 공장과 들판에서 중노동 하게 만드는 데 제격이지 않은가. 따라서 모든 도덕 원칙은 강자의 주인이 아닌 머슴이다. 권력이 도덕률을 만들고, 권력이 그것을 파기한다.

  인간은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복종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 오로지 하인만이 복종한다. 겁쟁이로 태어나 자라고, 먹고살기 때문이다. 도덕은 부도덕한 집단, 이를테면 통제가 요구되는 집단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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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는 추종자들에게 차라리 이렇게 말을 했어야 정직하고 옳았을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끊어지지 않는 끈으로 단단히 묶어, 나귀처럼 양쪽으로 두 개의 짐을 지게 해주겠노라."

  '가난하고 무지한' 자들, 천한 계층의 무능력한 자들, 부랑자들이 그런 그의 첫 번째 추종자들이었다. 아울러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남녀를 불문한 더 가난하고 더 무지한 사람일수록 그리스도의 종교적 이상을 열심히 따르고, 그의 망상이 빚어낸 정치적 천년왕국설에 맹목적으로 집착한다.

  생각 없는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같은 삶을 살았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졌을까?" 우리가 정녕 그리스도 같은 삶을 살았다면, 우리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식을 낳지 않았다. 그는 빵을 벌기 위한 노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집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말만 했다. 요컨대 그는 자선에 기대 연명하거나 빵을 훔쳐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만약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같은 삶을 살았다면" 누가 남아서 노동을 했을 것이며, 그리스도는 누구에게 빵을 구걸해 연명하고, 누구의 빵을 훔칠 수 있었겠는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같은 삶을 살았다면"이란 말은, 따라서 명백한 헛소리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 가운데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으며, 세상의 천대받은 것을 선택하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장 26~29절) 그렇지 않은 것이 그와 관계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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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라고 엄숙하게 선언하는 것은 모든 개와 소, 원숭이, 나무는 동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선언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비과학적이다."

  세상에는 사람, 행성, 미생물, 별, 태양이 다양하게 존재하듯이 개, 소, 원송이, 나무도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참나무와 까치밥나무가 본질적으로 어떻게 동등한가? 혈기왕성한 울프하운드와 깨갱거리는 길거리 똥개가 어떻게 동등한가? 수컷 버펄로와 사육된 식용 거세 소가 어떻게 동등한가? 숲 속의 야생 고릴라와 거리악사가 데리고 다니는 원숭이가 어떻게 동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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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 있는 자는 아무리 금욕적인 금지 조항이 있어도, 도덕주의를 그럴듯하게 흉내 내도, 자존심 구기는 법치주의와 온갖 제도적 규정이 앞을 가로막아도, 결국에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기 마련이다. 평등이라는 형식도 내용도 지상에 존재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단지 추상적 개념, 하나의 꿈일 뿐이다. 평등! 평등! 2천여 년에 걸쳐 축적된 치매 증상이 그 단어 하나로 요약된다! 그것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열등한 뇌의 산물이다. 열등한 유기체의 뇌는 아직도 그것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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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이나 법, 교리(敎理)는 어떤 의미에서든 근본 원칙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 나름 쓸모는 있다. 마치 사형집행인에게 단두대가, 정원사에게 제초기가 쓸모 있듯이 말이다. 그것들은 유치한 수준의 지능을 가진 개체를 세상에서 일소하고, 열등한 유기체를 박멸하는 데 편리한 장치가 될 수 있다. 아마도 모든 미신의 숨은 목적은 옳고 그름의 거짓 기준을 논리를 초월하여 승인하는 데 있으리라. 

  신화를 근거로 거짓을 꾸며내는 것이 현실을 토대로 거짓을 지어내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화를 줄자로 재가며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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