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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경제성장][분배][저성장]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by 노지재배 2017.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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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일본에서 활동한 미국인 정치학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지은이는 경제성장이나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정치적인 개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지난 100년간 극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에도 불구하고 빈곤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2.8%로 잠정 집계됐다. 2015년 성장률과 동일한 것으로 2년째 2%대 성장률에 머문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저성장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오랜 기간 이어지고 있고 성장의 정체가 곧 경제의 위기, 삶의 위기라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 제일주의에 대해 이 저자는 단호하게 외친다. 경제성장과 이에 따른 공정한 분배, 빈부 격차의 해소는 허구에 가깝다는 사실을 말이다.

특히, 저자는 이러한 경제성장과 발전 중시의 이데올로기가 빈부의 격차를 더욱 격화시키고 노동자를 "착취하기 쉬운 형태로 전환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저자는 이 책을 일독해야 할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나는 이 책을 읽어줄 독자로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상상한다.


- 과로에 지쳐 있는, 또는 노동현장의 부자유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샐러리맨이나 사무직 여성을 포함하여) 노동자. 

- 자신의 밭이 공장화 되는 것에 혐오감을 갖고 있는 농민. 

- ‘경제’(구체적으로, 앞으로의 취직)라는 요소가 자신의 교육의 자유에 장애물이 되어있다고 느끼는 학생. 

- 광고산업이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느끼고 있는 소비자(특히 주부). 

- 전쟁체험을 기억하고, 지금의 일본 정부가 재군비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데 대해 충격을 받고 있는 노인.

- 전쟁을 체험한 바는 없지만, 앞으로도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젊은이. 

- 남북문제는 ‘남(南)’의 문제라기보다 어느 쪽인가 하면, ‘북(北)’의 문제라고 느끼고 있는 사람. 

- 세계의 자연계가 사멸을 계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에 염려하고 슬퍼하고 있는 사람. 

- 왠지 모르게 위기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막연하고, 분명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쉬운 언어로 풀어나가면서도 저자는 경제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허구, 세계화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착취, 국가 권력의 폭력성, 미국의 패권주의 등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분쇄하고 있다. 

 

좋은 글귀가 많아 일일이 옮기자니 길어졌지만, 여기에 일부 중요한 글귀를 옮겨 본다.



선진공업국 정치가들은 만병통치약으로서 자유화를 권장하고 있지만, 그 자유화가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예를 들면,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로 미국의 값싼 옥수수가 멕시코로 들어가, 멕시코 옥수수 산업이 파괴된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입니다. 그러한 예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무역의 자유화가 아니라, 투자의 자유화에 의해서 세계에서 가장 값싼 임금을 찾는 대기업 사이의 경쟁이 결과적으로 선진공업국의 실질임금도 내려가게 합니다. 즉, 투자의 자유화는 '착취의 자유화'로 불러도 좋은 것입니다. 이것도 모두 신문을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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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대학의 럼멜이라는 학자가 쓴 《정부에 의한 죽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얼마만큼의 인간이 국가에 의해서 살해되었는가, 라는 통계를 수집해온 전문가입니다. 국가에 의해 살해된 인간의 수는 이 100년 동안 203,319,000, 즉 2억명에 달합니다. 이것은 그의 결론입니다. 물론 이 숫자는 과장된 것인지 모릅니다. 과장된 것이라 해서 절반으로 줄여보아도, 결론은 변함없습니다. (...)

또 하나 경악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  살해된 것은 외국인보다도 자국민 쪽이 압도적으로 다수입니다. 럼멜에 의하면 국가에 의해서 살해된 약 2억명 가운데 129,547,000, 약 1억3천만명이 자국민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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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부터 '세계화'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만, 세계화란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사실은 식민주의나 제국주의도 세계화였습니다. 다만,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의 시대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보다 조금 정직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이것은 착취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나라를 착취하여 부자가 된다고 하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혹은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고 해도 착취당하는 쪽은 알고 있었습니다. 착취를 당하는 게 결과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의 이익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속임수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만, 식민지주의나 제국주의 시대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계몽'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다지 설득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

'발전'이라고 하면 그것은 흡사 각 문화나 문명, 사회 속에 숨겨져 있는 가능성이 해방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꽃이 피는 듯한, 아이가 성장하는 듯한,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는 듯한 어투입니다. '착취'라는 말과 상당히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즉 세계의 모든 문화 속에는 산업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산업국이 될 수 있는 내재적인 가능성이 있다는, 그런 말투입니다. 

그것에 많은 사람들이 설득을 당했습니다. 바깥에서 자본이 들어와 자연을 파괴하고 전통적인 문화를 바꾸고 착취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발전'이라 부르면 그것은 그 사회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마땅히 그래야 할 과정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내정간섭이 아니라 발전, 착취가 아니라 발전, 폭력적인 변호가 아니라 발전. 어떤 문화, 어떤 사람들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능력을 해방하는 것과 같은 뜻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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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풀이해서 말하면, 경제발전은 빈부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빈곤을 이익이 나는 형태로 고쳐 만드는, '빈곤의 합리화'입니다. 예를 들면, 앞에서 로스앤젤레스의 예를 들었습니다만, 로스앤젤레스는 아마도 세계에서도 가장 에너지 소비율이 높은 도시일 것입니다. 한 가족에 자동차 석대인 경우도 그다지 드물지 않고, 차고에 자동차가 석대는 들어가는 집도 많습니다. 로스앤젤레스의 부르주아 중에는 집에 수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드물지 않고, 일년 내내 에어컨이 움직이고 있는 집도 많습니다. 에너지 소비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거기다 할리우드가 있기 때문에 그런 로스앤젤레스의 '풍요로운' 생활은 아마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동경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을 테지요. 하지만 실제의 로스앤젤레스에는 빈부의 차이가 대단히 큽니다. 에너지 소비라는 면에서 보면, 경제발전이 훨씬 앞서 진행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빈부의 차이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극심한 빈부의 차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



경제발전에 따라 빈부의 차이가 없어진다고 하는 환상은 로스앤젤레스를 보면 잘못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빈부의 차이란 경제발전에 따라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는 정의(正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빈부의 차이가 나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경제학의 용어가 아닙니다. 경제학 공부에서는 정의라는 말을 배우지 않습니다. 빈부의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커녕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정의'란 정치용어입니다. 빈부의 차이는 경제활동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를 고치려고 한다면 정치활동, 즉 의논하고 정책을 결정하여,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사회나 경제구조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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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빈부의 차이가 사회에 나타나면 그 해결을 정당한 분배에서 찾지 않고 경제성장에서 찾았습니다.

풍부한 파이를 재분배하려고 하지 않고, 파이 그 자체를 크게 만들면 작은 조각도 나름대로 커질 테니 모두 만족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게 지금까지 미국 정부가 진부하게 들릴 만큼 반복하여 이야기해 온 내용입니다. 파이란 물론 파이 모양의 그래프에서 나온 비유입니다. 하지만 우연히 그것은 미국 사람들이 즐겨먹는 식품이기도 합니다. (...) 파이 조각의 크기를 고르게 하는 게 아니라 파이 전체를 크게 만든다. 그렇게 하면 모두 자기 몫의 비율은 낮아질지 몰라도 조각 자체는 커진다. 이렇게 재분배의 정의 대신에 경제성장을 모색해 왔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파이는 커질지 모르지만, 지구 곧 자연환경은 커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 큰 파이를 목적으로 경제성장을 계속해서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리고, 세계경제 시스템 그 자체의 구조에서 생각하면, 파이의 큰 부분은 어째서 크냐 하면 물론 작은 쪽의 것을 가로채고 있기 때문에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성장에 따라 작은 파이 조각도 커진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실제로도 지구에는 '마이너스 성장' 국가도 있습니다.

현재 세계 인구의 20%가 세계 자원의 80%를 소비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통계입니다. 물론 자원의 80%가 그 20%의 사람들이 생활하는 나라 안에 있지 않습니다. 풍요로운 나라의 풍요로움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면 이른바 가난한 나라로부터 수입되고 있습니다. 잘 사는 나라는 가난한 나라의 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풍요로운 것입니다. 풍부한 파이 재료는 본래 가난한 나라의 것이므로, 그들의 파이 조각이 커질 까닭이 없습니다. 그것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그렇고, 또 한 국가의 국내 경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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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임금노동은 모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하는 노동이란 심히 모욕적인 것이라는 가치관이 형성되어 왔습니다. '임금 노예'라는 말은 20세기 전반까지 남아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임금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말은 잘 사용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임금을 벌기 위해서만 하는 노동이라는 것은 노예제와 별 다를 게 없다는 가치관이 유럽에는 확실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럽에서는 노동자가 기꺼이 자발적으로 고용제를 선택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면, 유럽 이외의 곳은 어떠한가. 유럽이 식민지를 만드는 최초의 단계에서 거이 반드시 강제노동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제3장에서 말했기 때문에 되풀이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

인류 역사를 넓게 생각해보면, 관리된 10시간 또는 12시간을 매일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해서 일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극히 부자연스러운, 무리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생활방식입니다. 공장에서도, 사무실에서도,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위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일합니다. 재미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회사가 결정한 것이니까 하는 일입니다. 가끔 흥미로운 게 있어서 그것이 즐겁거나 재미있다고 생각되면 극히 행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연일 뿐이며, 기본적으로는 돈이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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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측면은 어떠한 제도 속에서도 잠재적인 힘은 인민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객관적인 사실로서, 정치권력, 경제권력을 포함한 모든 권력은 어디로부터 나오느냐 하면, 보통사람들로부터 나옵니다.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통찰이었다고 생각됩니다만, 모든 경제적인 힘, 즉 부는 노동자가 만드는 것입니다. 노동자는 노동에 의해 자본가의 힘, 자본가의 자본 그것을 생산합니다. 노동자가 노동함으로써 자본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노동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함으로써 자신을 관리하고, 자신을 착취하고, 자신을 억압하는 힘을 스스로 만들어낸다고 하는 심히 역설적인 상황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그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소외된 노동'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이해된다면, 그리하여 총파업이 일어난다면, 즉 노동자가 노동을 중지한다면, 모든 힘은 노동자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하였습니다. 마르크스의 혁명에 대한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총파업입니다.

정치권력도 같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신민이 없으면 국왕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나는 국왕이다"라고 말하더라도, 모두가 등을 돌려 어디론가 가버리면 그러한 말은 오직 바보가 내지르는 절규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민이라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국왕의 권력은 없습니다. "나는 명령한다"라고 하더라도 그 명령에 따를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국왕제가 아니지만, 정부의 관료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이 없으면 관료의 힘도 없어지고, 정치가의 힘은 표를 얻지 못하면 성립하지 못합니다. 정부 자체, 그것이 바로 정부라고 믿는 사람이 많지 않으면 정부의 권력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권력이 전부 기본적으로 보통사람들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은 이념이 아니고, 희망도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힘의 역학으로부터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거입니다. 가치관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저자 소개


C. 더글러스 러미스 (Douglas Lummis)


193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생하여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를 졸업, 정치사상을 전공했다. 1960년에 미 해병대에 입대하여 오키나와에서 근무하였고 1961년에 재대 후, 버클리로 되돌아가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다시 70년대 초 일본으로 와서 활동을 시작했다. 


1980년에 도쿄에 있는 쓰다 대학 교수가 되어 2000년 3월 정년 퇴임했다. 이후 오키나와에 거주하면서 집필과 강연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래디칼 데모크라시>, <래디칼한 일본국 헌법>, <헌법과 전쟁>, <이데올로기로서의 영어회화> 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


1. 타이타닉 현실주의


2. '비상식적'인 헌법


3. 자연이 남아있다면 더 발전할 수 있는가 


4. 제로성장을 환영한다.


5.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는 아니다


6. 현실이 바뀐다


후기


부록 


아메리카의 '자유'와 확장주의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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