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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세대][세대 게임] 『세대 게임-세대 프레임을 넘어서』

by 노지재배 2020.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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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하는 책은 『세대 게임-세대 프레임을 넘어서』이다. 

책은 세대론이나 세대 전쟁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세대론이나 세재 전쟁, 세대 게임이 이뤄지고 논의되는 본질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세대' 운운의 책들과는 다르다. 이 점에서 『88만 원 세대』나 『90년생이 온다』 등의 책들과는 궤를 달리한다고 하겠다. 앞의 책 중 하나에서 주장하듯이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기 전에 세대 게임의 본질을 한번 살펴보자는 저자의 책도 읽어 보자. 

『세대 게임-세대 프레임을 넘어서』



'세대'라는 말이 유행을 타고 있다. 아니, '핫'한 아이콘이 된 지 오래다. X세대부터, 밀레니얼 세대, 88만 원 세대, 오륙도, 삼포 세대, N포 세대, 베이비부머  세대... 끝이 없는 세대가 생산되고 있다. 

그런데 『세대 게임-세대 프레임을 넘어서』의 전상진 저자는 세대 게임을 곧 '프레임'으로 해석한다. 곧, 세대 게임이라는 판 뒤에서 웃고 있는, 게임 판을 짠 음흉한 존재들이 있다는 말이다. 

"쿠이 보노(cui bono)?"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누가 이득을 보는가?"라는 뜻의 이 쿠이 보노 관점은 범죄의 동기와 관련된 오래되고 농익은 법언(法諺)이기도 하다. 기원전 80년 로마의 배심법정, 키케로는 존속살해 혐의로 기소된 로스키우스 2세를 변론한다. 키케로의 전략은 이득과 관련된 범죄의 동기 여부다. 이에 키케로는 지혜로운 법관으로 크게 명성을 떨친 루키우스 카시우스의 철칙, "쿠이 보노"를 꺼내어 들고 목청껏 외친다. "과연 누가 이득을 보는가?" 그는 다양한 이유를 들어 로스키우스 2세는 존속살해 행위로 이득을 보는 점이 없으므로 범죄의 동기가 없다는 점을 주장한다. 로스키우스의 죽음은 로스키우스의 재산을 가로채려던 권력자들의 음모라는 것이다. 키케로는 배심원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세대 게임-세대 프레임을 넘어서』의 저자는 지금 우리가 열을 올리며 참가하고 있는 이 '세대 게임'은 사실 "게임의 판을 짠 집단들이 어떤 이익을 취하기 위해 세대를 활용하여 사람들의 경쟁이나 싸움을 부추기는 움직임"이라고 지적한다. 

세대 게임
국내도서
저자 : 전상진
출판 : 문학과지성사 201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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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세대 게임은 두 가지 층위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가령 2층 건물의 게임장이 있다고 치자. 1층에서는 각종 게임 판이 벌어지고, 2층에는 게임 참가자들이 지불하는 수수료로 수익을 거두는 운영자가 있다. 나는 1층보다는 2층에 관심이 있으며, 특히 운영자의 수익 중에서 정치적 이익에 주목할 것이다"라고.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가 또는 요즘 한국에서도 불거지고 있듯이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가 싸움을 벌이는 것은, 결국 이러한 프레임을 짜고 싸움을 부추기는 사람들의 정치적인, 또는 경제적인 이익을 확대해 줄 뿐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이러한 조작된 프레임의 세대 게임의 목적은 결국 지지자의 환심을 사는 것, 어떤 세대를 비난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하는 것의 두 가지뿐이라고 지적한다. 

90년생과 어떻게 일할 것인가,90년생이 온다 세트
국내도서
저자 : 임홍택,최경춘
출판 : 위즈덤하우스 2018.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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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이 보노. 결국 이득을 보는 이가 없다면 세대 게임은 자연스레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게임의 판을 짜는 플레이어의 관심이 게임에 참여하는 세대 당사자들의 그것과 언제나 같지는 않다. 세대 당사자들은 게임의 승패에, 그 게임을 관장하는 플레이어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관심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의심하고 주저하기"를 강조한다. 저자는 세대 전쟁에서 우리가 세 가지 역할을 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 (소수에게 해당하지만) 싸움을 지휘하는 사령관(플레이어)의 역할. 둘째, (다수에게 허락된) 사령관이 짜 놓은 세대들의 전쟁터에서 '활약'하는 대체 가능한 병졸. 셋째, "의심하고 주저"하는 역할이다. 

의심하고 주저하기는 명령에 따르기를 주저하고, 이것이 혹시 무의미한 싸움이 아닌지 의심하는 역할이다. 저자는 "병졸에 비해 의심하고 주저하는 역할은 피곤하다. 의심하는 탓에 불안하고, 주저하는 덕에 남보다 늦어진다. 그러나 섣부른 참전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예로 저자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 나오는 칸토레크를 든다. 교사 칸토레크는 전쟁의 참상이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도 학생들의 자원 입대를 강력히 종용했다. 칸토레크와 같은 교사들과 아버지들의 선동에 이끌려 많은 청년들은 무의미한 전쟁 속에 파멸을 맞는다. 

소설 속의 화자는 수많은 칸토레크들이 청년들을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끌어주기는커녕 "자신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우리가 사는 세상을 파멸에 이르게 했다고 담담하게 보고한다. 

저자는 이처럼 "대체 가능한 병졸로 무의미한 전쟁에 참가하기 전에, 참전을 종용하고 설득하는 자들이 혹시 칸토레크가 아닌지 정당하게 의심하고, 칸토레크들의 명령에 따를 것인지 현명하게 주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정하지 않다
국내도서
저자 : 박원익,조윤호
출판 : 지와인 201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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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세대 게임의 틀을 짠 이들에게 휘말려 문제의 본질을 잊어버리는 사례로 저자가 제시한 우화를 소개한다. 


"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파울 바츨라비가 남긴 우화가 있다. 한 경관이 밤에 순찰하다가 가로등 아래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을 보았다. 경관은 그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술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열쇠 찾는 중입니다. 도와주세요." 경관은 취객과 함께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을 살폈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경관이 물었다. "여기서 열쇠를 잃어버린 게 분명해요?" 취객이 답했다. "아니요.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서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저기는 가로등이 없어서 너무 어두워요. 안 보이면 못 찾잖아요."

"

저자는 "현재 유행하는 세대 프레임, 그러니까 '사회 현안을 세대의 문제로 해석하는 프레임'이 바로 이 가로등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취객은 열쇠가 가로등이 비추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빛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어차피 찾지 못할 테니까. '선의'를 가지고 도우려는 경관은 그러한 취객의 지휘 아래 헛된 일만 한다. 

저자는 의심한다. "혹시 우리도 세대 프레임의 강렬한 불빛에 현혹되어 엉뚱한 곳만 주시하는 것이 아닐까."

세대론, 세대 전쟁, 세대 게임. 오늘도 수많은 세대가 탄생하고 많은 매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세대 간의 갈등과 오해를 다룬다. 이러한 세대의 홍수 속에 길을 잃지 않으려면 저자의 조언처럼 항상 "의심하고 주저"해야 한다. 

"누가 이 세대 게임의 뒤에서 이득을 보는가?"

 

누가 이 가로등 뒤에서 이득을 보는가?



■저자

전상진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및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 시대의 다양한 현상들을 사회학이라는 ‘도구’로 해석하고 진단하는 일을 하고 있다. 특히 세대 문제, 음모론, 자기 계발 붐 등에 관심이 많다. 현재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음모론의 시대]가 있다.



■목차


들어가며 

1장 의심하고 주저하기

2장 나이와 경험―세대를 정의하는 두 가지 기준

3장 청년은 비참하고 노년은 화려하다―청년과 노년의 이미지 변화
1. 청년은 우리의 미래다?
2. 노인, 새로운 주체
3. 청년, 몰락한 주체

4장 세대 전쟁―청년 대 기성세대의 대결
1. 세대 전쟁론의 네 가지 요소
2. 세대 전쟁의 레토릭
3. 한국으로 수입된 세대 전쟁론

5장 시간의 고향―세대 정체성의 중요한 닻
1. 세대 정체성의 경쟁자들
2. 세대 모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3. 경험의 차별성
4. 시간 고향

6장 세대 투쟁―시간의 실향민이라는 정치 세대의 등장
1. 인지부조화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2. 1970년대라는 시간 고향과 신성한 삼위일체
3. 시간의 실향민과 지지자 세대 게임

7장 세대 프레임을 넘어서
1. 두 세대 게임의 차이
2. 세대 프레임 들여다보기
3. 개혁의 역설과 미래의 세대 갈등

미주



■책 속으로


"

1장 의심하고 주저하기

'세대 게임'은 그에 참가한 사람들이 세대를 이뤄 서로 경쟁하고 다투는 활동과, 게임의 판을 짠 집단들이 어떤 이익을 취하기 위해 세대를 활용하여 사람들의 경쟁이나 싸움을 부추기는 움직임을 말한다. 그러니까 세대 게임은 두 가지 층위에서 이뤄진다. 가령 2층 건물의 게임장이 있다고 치자. 1층에서는 각종 게임 판이 벌어지고, 2층에는 게임 참가자들이 지불하는 수수료로 수익을 거두는 운영자가 있다. 나는 1층보다는 2층에 관심이 있으며, 특히 운영자의 수익 중에서 정치적 이익에 주목할 것이다.
세대 게임이란 용어는 세 가지 요소들의 조립품이다. 나는 세대 게임이라는 용어를 영국 정부의 국무조정실 전략 보고서 「세대 게임에서 승리하기」에서 빌렸다.
보고서의 목적은 다른 세대와의 경쟁에서 점차 뒤처지는 장년층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여기서 나는 세대 게임의 첫 번째 요소로서 특정 세대를 자신의 지지층으로 만들려는 전략을 추출했다. 두 번째 요소는 비난 게임blame game이다. 비난 게임은 문제 해결에 힘쓰기보다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하기 위해 남을 비난하는 세태를 지칭한다. 나는 '세대'가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 용어를 수용했다. 마지막 요소는 제로섬 게임이다. 제로섬 게임은 한쪽의 이익이 다른 쪽의 손해가 되는 상황을 말한다. 정치권력이나 정부 재원을 두고 경쟁하는 세대들을 승자와 패자 세대로 가르는 통념에 비추어, 나는 제로섬 게임이 세대 게임의 작동 원리라고 판단한다.
위의 정의를 염두에 두고, 나는 세대 게임을 그 목적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눴다. 하나는 지지자의 환심을 사는 것, 다른 하나는 어떤 세대를 비난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하는 것이다. 세대 게임은 자연스레 일어나지 않는다.
세대 게임을 "성실●1"하게 고안하고 설계하여, 참여를 독려하는 플레이어의 공이 크다. 게임의 판을 짜는 플레이어의 관심이 게임에 참여하는 세대 당사자들의 그것과 언제나 같지는 않다. 세대 당사자들은 게임의 승패에, 그 게임을 관장하는 플레이어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관심이 있다. 
광장의 소란이 커지면서, 정치와 연결된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풍성해졌다. 그러한 갑작스러운 관심이 반갑지만 우려스럽다. 반가운 이유는 그동안 홀대받던 중요한 연구 영역과 도구가 적절하게 대접받을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들의 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을 포착하는 데 세대만큼 유용한 도구가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세 대가 관심을 받을 때 내 연구도 주목받으리란 음험한 기대도 있다. 우려스러운 까닭은 세대처럼 효과적인 동원과 조작과 선동의 무기가 드물기 때문이다.
세대는 다채로운 매력을 뽐낸다. 나중에 자세히 살피기에 추려 말하면, 세대는 간편함과 가소성●2이 그 큰 매력이지만, 무엇보다 정체성과 관련해서 탁월한 매력을 뽐낸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 '우리 세대'의 일원임을 밝혀주고 그러한 우리를 역사의 흐름 속에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른 세대는 우리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 속에 서식하며, 그들의 시간의 서식처는 '너무 이르거나 늦어서' 역사의 흐름을 방해한다. 말하자면, 세대는 차이를 만들거나 유사성을 찾는 데 유용한 정체성의 근거이자 도구다. 그 덕에 세대는 일상에 깊이 뿌리박은 최적의 정치 언어 그리고 정치적 게임의 도구가 된다. 쉽고 빠르게 우리 편과 상대편을 갈라내어, 지지자를 만들거나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내세울 수 있다.
세대에 대한 최근의 관심에서는 진중한 고찰은 뒷전이고 그것의 정치적 활용만이 돋보인다.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파울 바츨라비가 남긴 우화가 있다. 한 경관이 밤에 순찰하다가 가로등 아래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을 보았다. 경관은 그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술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열쇠 찾는 중입니다. 도와주세요." 경관은 취객과 함께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을 살폈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경관이 물었다. "여기서 열쇠를 잃어버린 게 분명해요?" 취객이 답했다. "아니요.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서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저기는 가로등이 없어서 너무 어두워요. 안 보이면 못 찾잖아요." 
현재 유행하는 세대 프레임, 그러니까 '사회 현안을 세대의 문제로 해석하는 프레임'이 바로 이 가로등 역할을 한다. 취객은 열쇠가 가로등이 비추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빛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어차피 찾지 못할 테니까. '선의'를 가지고 도우려는 경관은 그러한 취객의 지휘 아래 헛된 일만 한다. 혹시 우리도 세대 프레임의 강렬한 불빛에 현혹되어 엉뚱한 곳만 주시하는 것이 아닐까.
세대 프레임의 가로등 불빛이 훤한 곳은 우선 광장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언저리에 광장의 소란은 대단했다. 서로 으르렁대는 촛불과 맞불●3로 가득한 광장을 보면서 사람들은 말했다. 촛불은 젊고 맞불은 노숙하다. 고로 촛불과 맞불의 대결은 세대들의 싸움이다. 현장에서 직접 보았던, 또는 화면에 비쳤던 광장은 그러한 평가를 확증하는 듯했다. 특히 맞불 집회가 그랬다. 노인들은 정말 사회 전체와 상대했다. 그러한 정치적인 세대 대립을 나는 '세대 투쟁' 또는 '정치적 세대 투쟁'이라 부를 것이다. 
세대에 대한 관심은 정치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나 사회정책(이하 '정책')의 측면에서도 세대는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특히 청년들이 민감하다. 온갖 경쟁들, 그러니까 학업, 취업, 짝짓기 경쟁들이 과거보다 더 가혹해졌지만, 경쟁에서 승리한들 그 승리의 유효 기간은 더 짧아졌다. 지금도 충분히 힘든데 앞으로는 더 힘들어진단다. 한국이 다른 국가들보다 더 빠르게 늙어가기 때문이다. 노인을 포함한 기성세대가 정치적 다수가 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기대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이 미래를 생각할 리 없다. 곧 다가올 미래의 재앙을 무시하고 현재의 이익을 지키려는 기성세대와, 변화와 혁신을 요구하는 미래 세대 간의 정책 대결이 불가피하다. 경제적·정책적인 사안을 두고 청년과 기성세대가 대립하는 구도는 서구에서 '세대 전쟁'이라 불린다. 선례를 따라 나는 경제적·정책적인 세대 대립을 '세대 전쟁'이라 부를 것이다.
세대들의 정치적이며 정책적인 전선戰線이 선명하게 그어졌다. 광장에서 확인되는 맞불 어르신 대 젊은 촛불의 정치 투쟁과 기성세대 대 미래 세대의 정책 전쟁, 전선이 뚜렷할수록 사안들의 차이는 흐릿해진다. 세대가 지닌 다채로운 매력들 덕이다. '정치적 세대 투쟁'과 '정책적 세대 전쟁'이 덧놓이면서 싸움의 상이한 주체들도 합쳐진다. 맞불 어르신과 기성세대가 겹치고 젊은 촛불과 미래 세대는 포개어진다. 그렇게 전선이 겹치고 단단해질수록 상황은 더 심각해 보인다. 정말 세대들의 싸움이 시작된 것인가. 
세대들의 싸움판에서 우리는 세 가지 역할을 취할 수 있다. 첫째, 싸움을 지휘하는 사령관(플레이어)의 역할이다.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역할은 극히 소수에게만 허용된다. 둘째, 다수에게 허락된 역할은 사령관이 짜놓은 세대들의 전쟁터에서 '활약'하는 대체 가능한 병졸이다. 전쟁이 불가피하고 옳다고 믿으면서 그들의 진격 명령을 따른다. 셋째, 의심하고 주저하는 역할이다. 명령에 따르기를 주저하고, 이것이 혹시 무의미한 싸움이 아닌지 의심한다. 병졸에 비해 의심하고 주저하는 역할은 피곤하다. 의심하는 탓에 불안하고, 주저하는 덕에 남보다 늦어진다. 그러나 섣부른 참전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해가 될 수 있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무의미한 전쟁에 내몰려 파멸한 청년 세대에 대한 보고서다. 18세 소년들은 교사들과 아버지들의 선동에 이끌리고 떠밀려 학도지원병으로 참전한다. 특히 교사 칸토레크는 전쟁의 참상이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도 학생들의 자원 입대를 강력히 종용했던 인물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도 지원병들은 향토방위병으로 차출된 칸토레크와 조우하게 된다. 그의 선동으로 참전하여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제자들에게 칸토레크는 비굴한 모습을 보인다. 소설의 화자 파울 보이머는 그를 경멸하면서도, 그에게 모든 불행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칸토레크들이 청년들을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끌어주기는커녕 "자신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우리가 사는 세상을 파멸에 이르게 했다고 담담하게 보고한다. 파울 보이머처럼 대체 가능한 병졸로 무의미한 전쟁에 참가하기 전에, 참전을 종용하고 설득하는 자들이 혹시 칸토레크가 아닌지 정당하게 의심하고, 칸토레크들의 명령에 따를 것인지 현명하게 주저해야 한다. 주저하고 의심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안 목이 필요하다.
첫째, '정치적 세대 투쟁'과 '정책적 세대 전쟁'이 서로 다른 세대 용어를 쓴다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전자는 '정체성'과 관련한, 후자는 '나이'와 연관된 세대 용어를 활용한다. 정치적 세대 투쟁에서 세대는 자기의식(세대 정체성)을 가진 주체의 성격이 강하고, 정책적 세대 전쟁에서 세대는 특별한 자기의식 없이 나이를 축으로 분류된 것이기에 주체의 성격이 약하거나 없다. 정치적 세대 투쟁과 정책적 세대 전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세대 아닌가'라는 식으로 차이를 애써 무시함으로써 주장의 파급력을 높이려 애쓴다.
둘째, 칸토레크들의 의도와 활동을 간파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현재의 칸토레크, 그러니까 세대 게임을 고안하고 설계하며 세대 당사자의 참여를 독려하는 플레이어는 '정치적 기업가 political entrepreneur'와 '스핀닥터spin doctor'로 나뉜다. 정치적 기업가는 정치를 통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뜻을 두기보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정치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며, 스핀닥터는 정치적 기업가를 위해 여론을 창출하고 조작하는 전문가다. 그러한 세대 게임의 플레이어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해의 대립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대중들을 현혹하여 지지자를 획득하거나, 비난할 대상을 내세워 책임을 전가·회피하려 노력한다.
책이 주목하는 또 다른 사안은 '정치적 세대'다. 나는 광장에서의 대립을 세대 투쟁으로 보는 데 반대한다. 맞불 집회는 어떤 정치 세대, 그러니까 '세대 의식을 가지고 정치적 요구를 하는 세대'가 주도한 것이 맞지만, 촛불 집회는 어떤 특정 세대가 주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광장의 대립은 세대 갈등이 아니다. 그렇다고 정치 세대가 맞불 집회를 주도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내가 '시간의 실향민'이라고 이름 붙인 맞불 집회의 정치 세대는 매우 흥미로운 사례다. 세대에 대한 일상적이며 학술적인 통념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기존 질서에 항의하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도모하는 청년이 통상적인 정치 세대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런데 맞불 집회를 주도한 시간의 실향민은 어르신이다. 정치 세대의 자격 요건에 연령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닐 터인데, 많은―나를 포함한―관찰자들이 그들을 하나의 '떳떳한' 정치 세대로 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인지부조화가 작용한 결과다(후에 상술). 시간의 실향민인 어르신들이 광장에서 보여준 편집병적 현실 부정, 시대착오적 사고, 억지스러운 행동과 요구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함께할 수 없는 별종'으로 배제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 하나의 정치 세대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시간의 실향민 역시 인지부조화에 시달린다. 국정 농단의 압도적인 증거들이 그들의 신념과 과거의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우렁차게 보여주지만, 새로운 증거를 받아들여 신념과 선택을 바꾸기보다 기존의 행동과 태도를 유지하는 게 더 편하다. 우리가 지지했던 그 사람이 그랬을 리 없어. 그 사람은 완전히 '엮인' 거라고. 그러한 인지부조화는 엄청나 정치적 에너지를 뿜어낸다. 그것을 착취하기 위해 세대 게임의 플레이어들이 몰려든다. 요컨대 시간의 실향민이라는 독특한 정치 세대는 두 가지 종류의 인지부조화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들이 뿜어내는 정치적 감정(분노와 배신)과 에너지를 착취하려는 세대 게임의 플레이어들이 꼬이게 되었다. 시간의 실향민이라는 정치 세대가 진화해온 과정과 플레이어의 역할을 꼭 살펴야 한다.

(...)

세대를 적절하게 관찰할 수 없도록 만드는 대표적인 걸림돌은 아마도 '세대'와 '청년'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타성일 것이다. 청년은 마땅히 세대를 이룰 것이고, 그 세대가 사회를 진보시킬 것이다. 그러한 관성적 사고로는 시간의 실향민인 어르신 세대의 정치적 등장을 적절히 평가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20세기 말부터 서구에서 크게 유행했으며, 21세기에 한국으로 수입된 '세대 전쟁론'에 알맞은 대응을 어렵게 만든다. 
이제 세대는 청년의 독점물이 아니다. 청년은 좌절했고, 노인을 포함한 기성세대는 탐욕스럽다. 좌절한 청년은 세대로 성장할 수 없거나 포기했고, 기성세대는 중·장·노년을 그냥 하나로 묶은 "감자 한 자루"와도 같던 처지에서 벗어나 탐욕과 이기심으로 뭉친 하나의 세대로 변신했다. 이처럼 청년과 기성세대를 보는 사회적 관점이 변화한 이유를 살펴야 한다(3장), 세대 전쟁론은 청년과 기성세대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운다 (4장), '헬조선'이나 '노오력주의'와도 같은 표현들은 청년들이 좌절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을 담고 있다. 그 사정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원인, 책임, 해결책이 달라진다. 세대 전쟁론은 이기적인 기성세대가 청년의 현재를 '착취'하고 미래를 '탕진' 한다고 고발한다.
느껴지시는가? 세대 전쟁론은 은연중에 기존의 세대 의미를 새롭게 혁신했다. 청년 세대는 나약하고 비참하고, 기성세대는 청년을 착취하고 사회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었다. 세대의 의미가 바뀐 데에는 세대 게임 플레이어들의 성실한 기여가 크게 한몫했다. 그들은 불공정한 처사를 일삼는 기성세대를 벌해야 한다는 공 적인 분노를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노력한다. 그들에 따르면 세대 전쟁과 세대 투쟁은 선과 악의 싸움이다. 착한 패자 세대 대 사악한 승자 세대.
나는 그런 간편한 선악의 이분법에 두 가지 이유로 반대한다. 첫째, 그러한 이분법은 자신의 이익이나 확신에 따라 무의미한 전쟁과 투쟁을 독려하려는 칸토레크들의 감언이설이기 때문이다. 둘째, 칸토레크들이 설파하는 세대 전쟁과 세대 투쟁은 '세대'라는 동일한 개념을 쓰지만, 그 내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2장), 갈등은 모든 사회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이거다. 여러 사회 갈등들이 중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자체로 무의미한 세대 갈등들을 하나로 겹쳐 보이게 만들면, 우리는 싸우지 않아도 되는 일로 격하게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의심하고 주저하는 역할이 중요한 까닭이 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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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실'하다는 표현은 두 곳에서 차용했다. 하나는 "박근혜 후보가 지난 대선에서 51.6퍼센트의 득표율로 당선된 데는 국정원과 군의 '성실한' 공무원들의 개인적 여론 조작 활동"이 역할을 했다는 천정환의 언급(권보드래·김성환·김원·천정환·황병주, 『1970 박정희 모더니즘 - 유신에서 선데이서울까지』, 천년의 상상, 2015. p. 105), 다른 하나는 SBS 드라마 「귓속말」(박경수 작가, 이명우 연출)이다. 드라마에서 법무법인 태백의 대표 최일환(김갑수 분)은 이렇게 말한다. "악은 성실하다."

●2 가소성plasticity은 속성이 유지되면서도 모양이 잘 변하는 것을 뜻한다.

  
●3 탄핵을 반대하는 세력은 스스로를 "태극기"라 부르지만, 나는 그들을 두 가지 이유로 '맞불'이라 부를 것이다. 첫째, 한 국가의 상징을 특정 세력의 이름으로 쓰는 것이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의 행동이 촛불에 맞대응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19대 대선 후보였던 홍준표는 2017년 4월 서울역 광장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극기 부대보다 촛불 좌파 부대가 먼저 시작하는 바람에 우리가 진 것이다. 촛불에 맞대응하는 운동의 이름으로 맞불보다 적합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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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청년은 비참하고 노년은 화려하다

1.청년은 우리의 미래다?

미래는 한때 청년 세대의 것이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청년이 이룰지어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은 희망찬 미래를 만들 주체는커녕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그들을 "억압받는 소수자"라 불렀고, 한국의 집권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그들을 "정치적 소수자"로 대우했다. 노년 세대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 궤적을 그렸다. 동정과 연민의 대상에서 자기 이익과 의견을 위해 투쟁하는 전사로 거듭났다. 위의 경제지는 노인들이 "청년을 억누른다"고 고발했고, 한국의 노인은 맞불 집회에서 기세와 완력을 과시하며 거친 투사의 면모를 널리 알렸다. 청년은 빛나는 주체에서 가련한 대상으로 몰렸다. 노인은 부양할 대상에서 탐욕스러운 전사로 변신했다. 불과 10~20년 사이에 청년과 노인의 위상이 변했다. 그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대략 반세기 전에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청년이 미래를 선도하는 사회를 전망했다. 기성세대가 청년에게 배워야만 하는 상황이 이제 곧 도래할 것이다. 증거는 당시 미국의 경험이었다. 미국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세대별로 상이한 적응력을 보였다.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하여 이주해온 기성세대(이주 1세대)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미국에서 성장한 자녀(1.5 내지 2세대)들은 부모보다 신세계에 더 빨리 적응했다. 이런 사실에 착안하여 미드는 과거의 경험에 집착하는 기성세대보다 그로부터 자유로운 청년이 더 빠른 적응력을 보이는, 따라서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신세계에 적합한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할 때가 올 것이라 전망하였다. 살아 본 적 없는 미래의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시간 속의 이주민migration in time"이다. 이제 청년이 스승이다.
스승이 된 청년은 그러나 곧바로 퇴직을 준비해야만 했다. 퇴직 사유도 얄궂다. 청년을 위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미래를 맡길 수 없다! 1972년 유네스코 총회는 「세계유산협약」을 결의했다. 인류 전체의 것이라 할 수 있는 문화 유산과 자연 유산을 지키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협약 4조의 내용이다. "각 협약 가입국은 〔...〕 자국 내에 위치한 문화 및 자연 유산을 식별하고 이를 보호·보존·활용하고 자라나는 세대에 전승시키는 것이 자국에 과하여진 최우선의 의무라는 것을 인식한다." 현재를 사는 우리 기성세대가 미래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길지 정할 테니, 너희들은 이를 따르도록 하여라. 협약에는 지속 가능성의 이념, 즉 미래의 세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안을 고민하는 이념이 스며 있다.
과거를 살아온 세대, 곧 기성세대가 현재의 결정인 협약을 통해서 미래의 방향을 결정한다. 과거에서 풀려났던 미래는 현재, 곧 미래의 과거에 다시금 묶였다. 그렇게 미래를 과거에 묶는 '지속 가능성'이라는 독특한 형식의 미래 관리는 비단 세계유산이나 생태 문제에만 적용되지 않았다. 1980년대부터 지속 가능성 개념은 다양한 모습으로 세대 관계에 침투했다. 학술적 근거로 포장된 대중적이며 정책적 담론인 '세대 전쟁론'이 그 결과다.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가 국가 재원이나 일자리와 같은 사회적 자원을 놓고 다툰다. 노인은 더 이상 이타적이며 수동적이고 겸양하지 않는다. 이기적이며 능동적으로 탐욕을 부린다. 청년 역시 변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비참한 청년이 세계의 비참을 치유할 수 없다. 그들의 미래는 기성세대에게 달려 있다. 미래 세대를 염려하는 기성세대가 노년 세대와 전쟁을 시작했다. 미드의 예측은 틀렸다. 청년은 이제 스승이 아니다. 문제 해결의 주체였던 청년은 문제로 전락했다.
나라마다 그리고 시기별로 청년에 대한 사회적 평가, 줄여서 청년상像은 부침을 겪는다. 우리의 경우만 보더라도 1900~1920년대 청년은 "계몽의 압력과 식민지 사회가 강제한 문화적 압박 아래" 그 위상이 문명과 근대와 독립의 주체 등으로 "과잉 상승"했지만,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심각하게 박탈된 자의 형상으로 등장"했다. 짧은 기간에 "청년이 문제 해결의 주체에서 문제 그 자체로, 사회를 이끌어갈 존재에서 사회가 해결할 고민거리로 전락"한 것이다.
그 이후로도 청년상은 한국 사회 나름의 발전 궤적을 따라 부침을 겪었다. 그런데 세계화의 폭이 넓어지고 밀도가 짙어진 20세기 말부터 청년상은 다른 지역과 동시화synchronizing되었다. 청년이나 청년 세대에게 부여된 명칭이 전 세계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 말부터 유행하는 청년 세대 명칭은 거의 예외 없이 수동적이며 부정적이다. 청년은 부모에게 의존하는 기생충, 경제적 어려움에 신음하는 가련한 존재, 불안정하게 살아가는 고통받는 존재일 뿐이다. 그에 반해 노인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반대 궤적을 그렸다. 부양의 대상, 쇠락의 이미지, 수동적 존재라는 예전의 평가는 사라졌다. 유행하는 명칭으로 보자면, 청년은 비참하고 노인은 화려 하다. 다시 묻겠다. 대체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2. 노인, 새로운 주체

소비사회의 명령과 안티에이징 운동

'젊음'이 사회적으로 선망하는 가치가 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내가 대학을 다녔던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젊은 남자에게 '노숙함'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맨 처음 산 옷도 그래서 양복이었다. 어려 보이면 사회적으로 대접받지 못했기 때문에 노숙해 보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는 영 딴판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젊은 친구들도 더 어려 보이려 노력한다. 변화의 이유를 찾기 쉽지 않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쿠이 보노cui bono' 원칙이다. 그것으로 이익을 보는 자들을 찾으라. 
강력한 용의자는 기업이다. 젊음에 대한 집착과 회춘의 갈망, 요즘 흔히 쓰는 말로 안티에이징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각광받는 산업이다. 한 추정에 따르면 안티에이징의 세계 시장은 2735억 달러(2013년), 한국 시장은 110조 원(2011년) 규모다. 안티에이징 산업은 "항노화 기전을 보이는 식품, 화장품, 의료기기 및 약품"과 같은 제품과 "노화 예방 및 관리와 관련된 영양, 피트니스, 스파 및 헬스 서비스"를 망라한다. 안티에이징 산업의 목표이자 명령은 무연령성agelessness, 곧 신체와 생활양식의 회춘이다.
안티에이징 산업은 지금껏 수동적 소비자에 불과했던 노인들, 더 정확히 말해 노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장년층 이상인 사람들을 적극적 소비자로 탈바꿈시키려 노력한다. 이는 소비주의 또는 소비자 사회라는 전체 트렌드에도 부합한다. 소비는 이제 정체성의 기반을 제공한다. 소비는 생활양식의 선택이며, 그 선택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남에게 표현하고 스스로 납득한다. 늙어간 다는 것은 소비자의 선택과 비필연적인contingent 정체성의 문제가 된다. 말하자면 노화는 자연의 불가역적인 과정이 아니라 소비를 통해 그에 대항해야 하는 숙제가 되었다.
소비자 사회에서 노인이 된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라기보다 주체적 능력이 없는 것이다. 당연히 주체 능력은 소비 능력으로 측정된다. 그것이 없는 당신은 '인간쓰레기'다. 쓰레기가 되지 않으려면 연령에 상관없이 소비해야 한다. 노화를 예방하는 영양식을 먹어야 하고, 신체적인 건강(피트니스)을 유지해야 하고, 젊은 감각의 아이템을 착용해야 하고, 시술을 통해 얼굴 주름을 펴야 한다. 개인에게 강요되는 그러한 명령은 기업과 산업의 시각에서 다음과 같은 지시로 번역된다. '지속적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새로운 소비자를 찾아라.'
저출산·고령화는 소비자 지형도를 근본부터 변화시켰다. 수동적 소비자인 노인이 너무 많아졌으므로 이들을 적극적 소비자로 바꾸지 못하면 체제 유지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안티에이징 산업은 소비에 적극적이지 않은 노인들을 온전한 소비자로 만들기 위한 기획이다. 그러나 이미지 변화가 노인에게 강요된 것만은 아니다. 당사자 스스로 그러한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끈 측면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로버트 H. 빈스톡과 동료들은 그러한 변화를 '안티에이징 운동'이라 부른다. 안티에이지 운동은 네 가지 요소들이 결합한 결과다. 첫째, 상업적이고 의료적인 "안티에이징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산업의 요구, 둘째 관련 전문가, 특히 의료 전문가와 노년학자gerontologist의 연구와 노력, 셋째 인구 고령화에 따른 비관적인 경제 전망, 넷째 당사자들의 요구와 노력, 노인의 이미지 변화는 그와 같은 네 가지 요소들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결과다.
빈스톡과 동료들이 지적한 관련 전문가들의 활약을 잠시 살피자. 인구 고령화가 본격적으로 부각된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 노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지식-권력)이 학술적이며 정책적으로 서서히 안착되었다. 발달심리학자와 노년심리학자들이 근본을 다진 이래, 여러 노년학자들이 완성한 이른바 "성공적인 노화" 개념은 획기적인 것이다. 이 용어는 존 로와 로버트 칸의 『성공적인 노화』에서 유래한다. 1987년에 발표한 논문을 발전시킨 이 책은 '성공적 노화'에 실패하면 고독하고 버려지고 수동적이고 불행하며 병에 걸려 쇠약한 노인이 된다고 경고한다. 성공한 노화는 노인을 사교적이고 능동적이고 행복하며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는 성공한 노화에 상응하는 용어와 그에 근거한 정책적 어젠다가 유행했다. 이른바 "능동적 노화"와 "생산적 노화"다. 노인들에게 능동성과 생산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냥 늙어가지 말고 능동적으로, 생산적으로 늙어라.


새로운 노화 패러다임의 등장 

성공적·능동적·생산적이라는 아름다운 관형어로 수식된 용어의 발전에는, 그러나 학술·화폐·사회정책의 이윤을 향한 야멸찬 관심이 동력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 "제약회사와 노년심리학의 〔위험한〕 애정 관계"가 지목되기도 한다. 제약회사는 이윤을 위해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구매하고, 심리학자들은 학술적 명성(과 돈·권력)을 얻기 위해 제약회사의 지원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줄리아 로저노바는 능동적·생산적 노화의 패러다임이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당사자들의 요구 때문이다. 많아진 노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거슬린다. 비록 현실이 여전하더라도 생각이나마 긍정적으로 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둘째, 사회 정책을 축소하려는 목적에 부합한다. 노인들을 젊은이들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시민, 더 정확히 말해서 "능동적이며 스마트한 소비자이자 임금노동과 자원봉사와 같은 생산적 활동의 참여자로서 경제적 역할"을 수행하는 시민으로 간주하면, 그들에게 지출되던 사회복지비용을 줄일 수 있겠다.
성공적·능동적·생산적 노화와 같은 새로운 노화 패러다임은 학술적 용어, 정책적 목표, 경제적 이윤 추구, 사회운동으로서 다양한 행위자들의 요구가 상호 작용하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새로운 노화 패러다임의 다양한 면모는 상이한, 때에 따라서는 상충하는 요구에 답할 수 있는 융통성과 활력으로 나타난다. 경제적 이윤과 학술적 명성과 정책의 정당성과 당사자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잘 부합한다. 사회의 책임보다 개인의 책임을 최우선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 패러다임과 새로운 노화 용어는 궁합이 잘 맞는다. 각자(개인적으로) 스스로(능동적으로) 잘(성공적이며 생산적으로) 자신의 삶(노 화)을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
새로운 노화 패러다임의 기발함은 두 가지다. 첫째, 문제의 당사자에게서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에 비용이 덜 든다. 패러다임은 이렇게 말한다. 늙은이들이 많아져서 사회가 활력을 잃어간다.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남들의 도움을 바라지 말고 당신들 스스로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성공적으로 늙어가라. 문제 해결의 열쇠는 당사자인 늙어가는 인간에게 있으니, 그들에게 분발하라고 다독이고, 고함치면 사태 종결이다. 둘째, 만인에게 이익이 된다. 세대 전쟁을 오래 비판해온 앨런 워커의 말이다. "그 전략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만인에게 이익이라는 데 있다. 나름의 잠재력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하기에 늙어가는 개인인 모든 연령대의 시민들에게 이익이다. 전체 사회에도 이익이다. 인간 자본으로부터 최상의 것을 꺼낼 수 있고, 〔노인들이 부담이 아니라 생산적이 되어서〕 세대 갈등을 회피할 수 있으며, 더 공정하고 더 포용적인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
아름답다. 하지만 사회학적 시선으로 보면 그것의 아름다움은 현실의 빛을 쪼이는 순간 산산이 부서진다. 독일의 사회학자 슈테판 레세니히는 무엇보다 그 패러다임이 노인층을 "부적절하게 동일시"한다고 지적한다. 노인은 사회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건강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들이 모두 "'고도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으며, 단지 발견되고 활성화되기를 기다릴 뿐"이라는 기대는 부 적절하다. 또한 "'잘 늙어가는 것'의 유일한 규범"을 강요한다. 그 규범을 충족하지 못하는 노인은 배제되어 쓰레기 취급받기 십상이다.
안티에이징 운동과 성공적·능동적·생산적 노화는 분명, 적어도 서구에서는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지만, 심각한 위험이기도 하다. 한국은 어떨까. "수명 연장과 노인 인구 증가의 세계적 추세 속에서 한국에도 서구의 성공적 노화 모델이 소개되었으며, 매스컴을 통해 건강하고 활기찬 노인의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정책적으로는 노인 집단의 노동력을 개발하여 자립적인 사회 구성원화하는 것이 중요한 어젠다가 되고 있다." 한국에서 성공적 노화 모델은 매스컴을 통해 소개·유포되었고, 또한 정책적 차원에서 중요한 어젠다가 되었다. 그것을 노인 스스로 원했다기보다 곧 다가올 생산력 고갈에 대비해야 하는 정책적 필요성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 봐야 안다. "현재 사회적 생산성에 대한 정책 방향, 마케팅 의제, 안티에이징 담론을 통해, 신체 기능이나 활동 등을 강조하는 성공적 노화의 담론은 노년에 대한 사회적 평가로서 강력한 문화 규범으로 발전하고 있다. 성공적 노화 모델이라고 하는 특정 노인의 상태를 표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에 미달되는 노인들은 주변화되고 이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오히려 강화된다."
OECD 국가 가운데 최고의 노인 빈곤율 및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에서 현실에 반하는 화려한 노년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는 까닭이 밝혀졌다. 현실이 아니라 그렇기를 바라는 당사자와 대중매체와 정책 당국 및 전문가의 염원이 투영된, 이상적이며 강제된 "표준"일 뿐이다. 그러한 표준은 세대 전쟁론에서 귀하고 중한 역할을 수행한다. 싸움의 상대를 정해주기 때문이다. 안타깝게 도 서구의 공격 대상인 노년 세대를 한국에 그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다. 그들의 사정이 너무 처참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한국의 세대 전쟁론자들은 기성세대를 그 자리에 세운다(후에 상술). 젊은이들을 착취하여 화려한 삶을 즐기는 기성세대가 공격 대상이다. 그렇게 전쟁의 상대가 정해졌다. 그러면 '우리 편'인 젊은이의 사정은 어떤가.



3. 청년, 몰락한 주체

비참한 청년

한국 청년의 비참한 사정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헬조선, 노오력주의, 수저 계급론, 그리고 N포세대라는 말은 청년의 비참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지옥이 되어버린 한국, 노력을 하더라도 상황이 나아질 리 없다는 노오력주의, 물려받는 바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수저 계급론, 취업·연애·결혼·출산은 물론이고 친구 관계와 희망마저 포기한 N포세대 등은 청년이 실감하는 현실이다. 전병유와 신진욱이 한국 불평등 연구의 최신 성과를 엮어낸 한 연구서는 그래서 청년 세대가 "구조적으로 하위 계층"이 되어간다고 밝힌다. 구조적인 하위 계층은 "탈산업화, 일자리 없는 성장, 구조 조정 등으로 노동 시장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는 주변화된 계층이다. 청년 세대가 소득, 자산, 주거 인간관계, 자존감과 같은 여러 측면의 불평등과 박탈을 동시적이고 응축된 형태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가난'은 총체적이다." 미래에 대한 전망과 희망마저 상실했기 때문이다.
총체적 가난에 시달리는 청년은 사회적 기대에서도 상실을 경험한다. 사회는 이제 청년에 대한 기대를 거두었다. 그들은 미래를 개척하고 선도할 수 없다.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청년에게 사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노인을 포함한 기성세대가 제격이다. 오랫동안 젊은이의 독점물이라고 여겨졌던 특성, 예를 들어 유연성, 즉흥성, 풍부한 표현 능력 등은 노년 세대에까지 확산·분산되었다. 그 결과 "연령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행동 스타일의 차이가 사라졌다." 과거에는 대중문화, 스포츠, 건강을 다른 세대가 손댈 수 없는 청년의 몫으로 인정했지만, 이제 연장자 세대들이 그것을 탐한다. 물론 청년의 전유물로 생각되던 것들이 상품이 되어 그들을 유혹하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문화 상품, 스포츠 상품, 건강 상품은 연령에 상관없는 필수(적 상)품이 되었다. 꽃중년(매력적인 중년), 아재파탈(치명적 매력을 지닌 아저씨), NoMU족(no more uncle, 더 이상 아저씨가 아닌 아저씨), 액티브 시니어(젊은이의 라이프스타일을 추종하는 노인들)라는 신조어는 나이가 들거나 늙었지만 적극적인 상품 소비를 통해서 매력을 유지하라는 자본주의의 명령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고령자조차 청년적인 활력을 유지하고 자기실현을 위해 고심해야 한다. 최근 노인들의 육체 상태가 과거에 비해서 현격하게 개선되었으며, 자신들이 선배 세대와 비교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젊다고 인식한다는 점도 그에 한몫한다. 페테르 외베리와 라르스 토른스탐이 밝힌 바처럼, 연령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청년성과 피트니스의 이상"을 갈구하고 좇게 되었다.
연령 규범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사회적 상태를 나이에 따라 각을 잡고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연령 규범, 통상적인 용어로 나이에 어울리는 말과 태도와 행동을 뜻하는 나잇값은 청년성과 피트니스의 이상 앞에서 무력해졌다. 그리고 변화를 기피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경직된 사람은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청년의 용모와 건강은 물론이고 그들 삶의 방식과 태도다. 청년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새로운 것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며, 새로운 출발을 지속적으로 도모한다. 만약 유연하고 기동적인mobile 청년의 이미지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적합하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그것을 취해야 한다. 말하자면 청년의 이상은 나이에 상관없이 만인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다. 이렇게 '생물학(연령)적 청년'과 '이상으로서의 청년'이 서로 분리된다.
이상으로서의 청년은 현실의 살아 숨 쉬는 청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만 하는 속성의 집합이다. 그러한 속성을 '청년성'이라 부르자. 청년성은 청년에 대한 나름의 합의가 통용되는 권역과 시간에 따라 변한다. 예컨대 부모의 봉양과 전통이 중요한 곳에서는 세대 계승에 초점을 맞춘 청년의 역할을 중시하지만, 혁신과 변화가 중시되는 때에는 세대 단절, 그러니까 이전 세대와의 차별화가 중요하다. 산발적 예외를 제외하면, 근대 이후 세상은 세대 단절을 숭상한다. 이 때문에 청년성의 핵심은 과거와 절연하는 혁신을 통해 새로운 미래, 더 나은 미래를 만들 것이라는 기대에 있다. 그러한 기대가 모라토리엄을 허락했다.


모라토리엄, 성마른 자본, 청년의 가치 하락

두 당사자가 특정한 행위, 예컨대 '지불 행위를 유예하는 약속'을 의미하는 모라토리엄은 근대적 청년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 근대 청년은 특히 교육과 관련된 모라토리엄, 줄여서 교육 모라토리엄에 빚진 바가 크다. 의무 교육을 받는 사람은 사회로부터 일정한 의무, 예를 들어 영리 활동, 정치 참여, 국방과 같은 시민의 의무를 면제받는 대신, 사회 성원으로서의 온전한 역할을 위해 필요한 지식과 품성과 체력(지덕체)을 습득해야 한다. 사회가 청년에게 책임을 유예하여 미래를 준비할 자유와 권리를 줌으로써 청년은 내일을 준비하고 열 수 있는 주체가 되었다.
교육 모라토리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청년(아동·청소년 포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진다. 모라토리엄을 성인이 되기 위한 준비로 보는 이른바 "이행 관점"은, 청년 자체의 고유한 의미를 강조하는 소위 "청년문화 관점"과 대립한다. 이행 관점에서 모라토리엄은 청년의 목표를 명확히 설정한다. 청년은 부모나 교사나 교사와 같은 성인에게서 미래의 온전한 성인으로 사는 데 필요한 능력을 전수받아야 한다.
이에 반해 청년문화 관점은 유예기를 청년이 자율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으로 간주한다. 성인은 더 이상 청년의 전범典範이 아니며, 청년의 정체성 형성과 사회적 가치의 획득은 삶을 실험하고 목표를 모색하는 데서 얻어지는 부산물이다. 두 관점 모두 새롭고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하지만, 전자는 그것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성인의 지도를, 후자는 현재의 희생을 거부하고 청년 본인의 자율성을 필수 요소로 삼는다.
후기 근대에 이른 오늘날, 두 관점의 대립은 무색해졌다. 양자 모두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먼저 각 관점의 설득력이 약해졌다. 이행 관점은 '성인'을 모라토리엄의 목표이자 청년의 미래로 삼는다. 불안정해진 고용 관계나 사회 전반적으로 불확실성이 증가한 오늘날, 그러한 목표와 미래는 어불성설이다. 청년문화 관점 역시 마찬가지다. 성인이 제시한 목표를 거부하고 현재에 충실하려 노력하지만, 불안정성의 확대와 불확실성의 심화는 목표와 미래는 물론이고 현재와 자율성마저 파괴한다.
위기는 그에 그치지 않는다, 모라토리업 자체를 파괴한다. 모라토리엄의 핵심은 의무의 유예다. 유예의 이유를 이행 관점은 '준비'에, 청년문화 관점은 '실험'에 둔다. 성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위해서, 또는 나름의 삶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 사회적 의무를 유예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조급함은 유예를 인정치 않는다. 무엇보다 오늘날 자본은 성마르다. "장기적인 경영 실적보다 단기적인 성과"를 원하는 "성마른 자본impatient capital"은 "더 빨리 〔더〕 많은 수익"을 원한다. 그렇기에 "미국 연기금의 평균 주식 보유 기간은 1965년 46개월에서 2000년 3.8개월로 크게 줄었다." 더 빨리 더 많은 수익을 채근하는 조급한 자본은 기업 조직의 체질도 변화시켰다. 의사 결정이 더디고 경직된 기업은 자본의 조급함을 감당할 수 없다. 유연하고 역동적이며 빠른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1960년대 미국 자동차산업의 경우, 경영진의 의사 결정이 자동차 판매 현장에까지 전달되는 데 평균 다섯 달이 걸렸지만, 요즘은 2주 정도로 줄었다.
조급함은 학교로도 침공했다. 과거에는 기업이 교육기관이 생산한 노동력 상품에 토 달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대학에 설치된 기업의 주문형 학과, 예를 들어 삼성 반도도체 학과가 증명하듯이, 기업은 자신들이 원하는 상품을 학교에 매우 구체적으로 주문하고 학교는 그에 부응하여 맞춤형 인재를 생산한다. 조급해진 학교는 학생에게 더 이상 준비와 실험과 미래의 모색 따위를 허락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그에 상응하여 미래를 설계하는 방식도 바꿨다. 1970년대와 2000년대 청년의 직업 설계를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젊은이들의 조급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30년 전의 젊은이들은 장기적인 전략에 기초한 반면, 요즘 젊은이들은 당장의 전망을 중시했다. 
성마른 자본과 기업과 학교와 청년은 제각기, 그러나 함께 사회와 청년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20세기 청년이 모라토리엄으로써 보호받아야 하는 발전 모형일 수 있었던 까닭은, 상징적으로 청년이 미래를 담당할 것이라는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의는 깨졌고 모라토리엄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성마른 자본과 기업은 노동 현장에 투여할 수 있는 즉시 전력戰力을 원한다. 학교에 맞춤형 인재를 주문하고, 그마저도 성에 안 차면 경력직을 채용한다. 국내에 없다면 외국에서 수입하면 된다. 로타어 뵈니슈는 이렇게 말한다. 
청년들의 대규모적인 자격과 노동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 현재의 노동 사회에서 청년은 더 이상 진보와 갱신의 상징적 표현이 되지 못하며, 경제적이며 기술적인 사회의 자체 동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청년의 가치가 하락"했다. 그렇게 '청년=미래'의 등식도 해체되었다.
물론 청년이 언제나 미래와 동일하게 취급받지는 않았다. 근대가 열리면서 새롭게 등장한 청년은 사회의 집합적인 희망과 우려를 동시에 받았다. 한편에서 청년은 에너지와 삶의 기쁨, 자연스러움, 새로운 출발, 혁신, 희망을 표현한다. 한국을 포함한 서구 사회에서 나타나는 젊음에 대한 숭배cult는 그러한 집합적 소망의 표현이다. 다른 한편 청년은 우려의 대상이었다. 성인들은 젊은이들이 사회의 기본 가치를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다고 두려워하고 염려한다. 혹시 그들이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들을 거부하지 않을까. 공동의 삶을 해치는 일탈, 범죄, 방종, 나태에 빠지지 않을까. 결국 근대 사회는 청년을 양가적으로ambivalent 평가한다.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할 주체이자, 사회 전체를 나락으로 빠뜨릴 수 있는 위험 요인으로. 그 결과가 서로 대립하는 청년상이다.
청년에 대한 대립된 평가는 사회적·역사적 진공 상태에서 비롯하지 않았다. 독일의 청년 용어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오늘날 '청년Jugendliche'은 계급이나 젠더 차이에 상관없이 쓰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18세기 말부터 사용되던, 귀엽고 사랑스러운 함의가 담긴 "젊은 녀석들Jinglinge"은 "기독교를 믿는 시민계급의 젊은 남성들, 특히 김나지움 남학생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젊은이들Jugendliche"이라는 호칭이 추가되었다. 이 용어는 애초 노동계급의 남성 청년들을 위한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법률적, 특히 형법의 의미에서 "잠재적 범죄자인 타락한" 자를 지칭할 때 많이 쓰였다. 말하자면 계급 차이에 따라 청년은 미래의 희망과 우려로 구별되었다. 미래의 희망은 시민계급의 청년이, 노동계급의 청년은 미래에 대한 우려를 담당하였다.
한국의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 20세기 들어 근대로 진입하고 나라의 주권을 상실하는 과정에서 청년은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의 상징으로 정착해갔다." 구체적으로는 "문명의 유도자이며 사회를 혁신"하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물론, 그러한 청년은 현실이라기보다 이상이었고, 극소수의 엘리트 청년(유학생 및 학생)만을 겨냥한 것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도 희망의 예봉은 비록 모양이 달라졌지만, 그 날카로움을 적어도 1920년대 중반까지는 유지하였다. 그리나 1930년대 이후부터 청년은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 "청년이 문제 해결의 주체에서 문제 그 자체로, 사회를 이끌어갈 존재에서 사회가 해결할 고민거리고 전락"하면서 "'지도자, 명의名醫'"의 지도와 치료가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특히 1930년대 중반부터 "사적인 문제에 몰두"하는 지극히 "속류화"된 신세가 되었다. "속류화된 청년이란 자신의 문화와 가치를 실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관, 특히 국가권력이 제시하는 가치관에 매몰되는 존재였다."
해방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청년은 희망과 골칫거리, 주체와 객체의 배역을 번갈아 맡아왔다. 또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은 계급의 문제다. 중간계급의 자녀들은 주로 희망의 관점에서 관찰되지만, 하층계급 자녀들은 문제의 원인으로 관심을 받거나 애초부터 관심에서 제외된다. 정수남 등이 지적한 바처럼, 한국의 그 흔한 청춘론들. 곤한 하층 청년을 "'청춘' 밖의 청춘"으로 배제하고 격리한다. 
사회의 문제가 되어버린 청년은 능동성의 유무로 갈린다. '수동적 문제'와 '능동적 문제' 청년이 그것이다. 문제 청년은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상관없이 모두 사회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같지만, 위험에 내던져진 청년과 사회를 위협하는 청년에게 같은 정도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당연히 능동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후자가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위험에 내던져진 청년, 곧 수동적 문제 청년은 배려의 대상이다. 배려는 그들을 문제로 만들어낸 사회 요인들을 겨냥한다. 그와 달리 위협하는 청년, 즉 능동적 문제 청년은 사회적으로 배제하고 격리해야만 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자신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통제하기 어렵고' '이질적이고' '해로운' 따라서 가까이할 수 없는 〔......〕 그들을 구제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병든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쓰레기가 된 사람까지 구할 만큼 사회의 여력도 없거니와 소용도 없다. 둘째, 경제적으로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사회에 물질적·인적 쓰레기가 넘친다. 마치 물질적 쓰레기의 재활용 여부가 비용에 달린 것처럼, 인간쓰레기도 마찬가지다. 재활용하기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인간쓰레기는 "버려져도 무방하"다. 따라서 관심은 수동적 문제 청년에게 집중된다.
수동적 문제 청년은 특히 세대 전쟁론자들에게 함의가 크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순진무구한 청년들이 탐욕스러운 노인들의 이기심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현실 인식을 통해, 자신들의 (신자유주의적) 혁명을 합리화하고 정당성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당하는 청년의 순진무구함은, 고통을 주는 노인의 더러운 탐욕을 부각하는 중요한 장치다. 청년의 고통과 노인의 혜택이 클수록, 청년의 수동적 순진무구함과 노인의 능동적 탐욕이 대조될수록 세대 전쟁론의 주장, 곧 청년을 위해 노인들의 특권과 그것의 버팀목인 제도와 규제와 기득권을 파괴하고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는다.
청춘을 빼앗긴 청년 청년성은 청년의 전유물이 아니다. 청년이 청년성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청년성이 청년을 소외시킬 수도 있다. 이기훈에 따르면, 식민지 조선의 1920년대 "문화운동론자들"은 연령과 상관없는 청년의 특성에 주목했다. "1920년대 초반, 급격히 확산된 청년회"의 "임원들은 대체로 지역사회에 영향"〔을 행사했던〕 지주가이거나 지식인들이었다." 그래서 "청년 아닌 청년이" 청년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청년과 노년의 구분은 '연령'이 아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진보 세력을 대표하는 자가 청년이요, 〔정적이고 수동적인〕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자는 노년"이다. 그래서 나이와 상관없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람들이 청년회의 임원이 될 수 있었다. 요컨대 "문제는 '청년이란 누구인가'가 아니라 '청년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집약됐다." 
청년성과 청년의 탈골은 오늘날에도 재현, 아니 더 강화되었다. 청년성은 잃었는데 연령은 청년인 사람이나 청년보다 더 청년다운 중년·노년이 그 예다. 나이에 상관없이 청년다워야 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오늘날 우리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구나'라는 "무용성의 유령"이다. 쓸모가 없다는 판결은 모든 사회적 관계, 예를 들어 친구 및 연인 관계, 심지어 가족에서 퇴출될 빌미가 될 수 있다. 리처드 세넷에 따르면, 새로운 자본주의의 이상적인 노동자는 "기존의 현실을 포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경험을 쌓고 그것을 "통해 배우고 익힌 것이 아니라 새로운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관건이다. 기술의 짧아진 유효 기간을 생각하면 실감이 난다. 지속적으로 학습하지 않으면 업계의 수준을 따라갈 수 없다. 경험이 많을수록 오히려 그 가치가 떨어진다.
예전의 경험이 새로운 것에 대한 빠른 적응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 익숙한 것, 경험을 통한 학습은 쓸모가 적다. 기왕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관건이다. '청년성'이 바로 그러한 자질과 능력이다.
당연하게도 모든 청년이 청년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것이 없는 자들은 도태·배제·격리되어 마땅하다. 다만 그러한 청년다움에는 앞서 말한 두 가지 대립적인 속성, 즉 문제와 희망의 속성이 도사리고 있다. 문제적 요소는 버리고 희망의 요인은 키워야 한다. 해리 블래터러를 따라 청년다움의 두 요소를 "사춘기adolescence"와 "청년성 youthfulness"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춘기는 무책임함, 반항심, 비합리성, 예측 불가능성, 이기적 특성과 같은, 일반적으로 "사춘기적 특성"이라 불리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인 데 반해, 청년성은 "기백과 열정, 유연성과 기동성, 위험을 감수하고 임기응변적이며 실험적인 성향, 창의성과 변화에 대한 갈망, 상황적 삶과 현재 지향성, 최첨단의 노하우, 유행에 민감함, 그리고 아름다움"과 같은 바람직한 것이다. 청년성을 상실한 청년은 '사춘기적 청년'일 뿐이다. 청년다움의 희망적 요소를 지니지 못한 자들은 문젯거리일 뿐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청년다운 사람은 "변화에 개방적이지만 책임감이 있고, 현재를 중히 여기지만 안정된 미래를 위한 투자에도 게으르지 않고, 성숙하지만 안주 settled하지 않으며, 즉흥적이되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아는, 말하자면 성인답지만 정착settling down을 회피하는 존재다." 수동적 문제 청년들은 곧 청년답지 못한 청년, 곧 사춘기 청년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이에서 자유로워진 청년성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앞에서 살핀 바처럼 청년성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상품이기도 하거니와, 식민지 조선의 문화운동론자들이 강조한 것처럼 청년다운 태도를 취하고 청년스러운 활동을 수행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래서 블래터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 시장과 상품 시장은 청년성을 그것의 생물학적이며 나이와 연관된 경계로부터 '해방' 시켰다." 자신의 노동력을 노동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 또는 기업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쓸 만한 인력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자신의 구태의연함을 감추고 생기발랄함을 과시해야 한다. 젊은이의 경우, 자신의 청년다움을 뽐내되 사춘기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성숙함도 가미해야 한다. 노화와 싸우는 안티에이징 상품이나 아름다운 외관을 겨냥하는 라이프스타일 상품은 모두 실제 젊은이들의 삶에서 청년다움을 분리해내, 만인이 소비하고 향유할 수 있도록 변화시킨 것이다. 상품의 소비는 청년 같은 육체를 유지하거나 이미 늙었더라도 다시금 재활시키는 미학적 약속이다. 요컨대 청년성은 만인이 취할 수 있는 상품이자 취해야만 하는 윤리적 가치다.
청년성이 만인이 탐하는 상품이자 좇아야만 하는 가치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곧 청년성이 더 이상 청년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젊은이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청년은 청춘을 빼앗기고 노인은 청춘을 강요받는다. 사춘기 청년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그것은 그러한 사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바처럼 사춘기 청년들이 세상에 가득하다. 서구의 사정도 만만치 않겠지만 우리 네 사정도 심각하다. 낮은 출산율, 높은 주거비용, 고용 불안의 측면에서 다른 OECD 회원국을 압도한다. 낮은 출산율은 부모 되기를 방해하고, 높은 주거비용은 독립생활을 어렵게 하며, 고용 불안은 안정적 직장을 취득하기 힘들게 만든다. 이는 곧 한국의 청년들이 다른 회원국의 동료들보다 청년다운 청년이 되거나 청년다운 성인으로 성장할 기 회가 극히 적다는 것을 말한다. 한국의 청년들은 사춘기 청년으로 지체되면서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사춘기 청년은 세대 전쟁의 훌륭한 명분이다. 물론 명분일 뿐이다. 세대 전쟁의 해결책은 승자가 편취한 패자의 몫을 승자로부터 박탈하기 위해 그들 특권의 근간인 제도와 규제와 기득권을 창조적으로 파괴하자는 것이지만, 그러한 개혁이 실제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지에 대해서는 매우 의심스럽다. 앞으로 살피겠지만, 기성세대나 노년 세대를 겨냥하는 세대 전쟁론적인 개혁의 예리한 창은 문제의 구조적 원인, 예컨대 자본, 기업, 그에 기생하는 정치권력과 같은 원인들을 겨누지 않는다. 그런 탓에 세대 전쟁론이 내세우는 청년에 대한 배려는 말잔치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청년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 그에 근거한 차별을 지칭하는 용어로 '연령주의' 또는 '노인 차별주의'가 있지만, 이는 주로 노인을 조준하기에 청년에 대한 차별을 명확히 지칭하는 용어가 필요하다.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에서 리카르도 마체오는 "소아 혐오paedophobia"라는 표현을 쓴다. 소아 혐오, 풀어 말해서 젊은이에 대한 공포는 그들을 혐오하거나 두려워한다는 뜻이라기보다, 개인의 생존도 버거운 마당에 그들을 사회가 배려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곳에서 바우만은 젊은이에 대한 공포를 "젊은이들을 또 다른 사회적 부담으로 여기는 시각"이라 풀어낸다. 이미 버거운 삶을 짓누르는 불필요한 부담이나 책임을 경계하고 회피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청년 차별주의다. 바우만 이 보기에 "'청년 문제'의 쟁점은" 청년을 소비자로만 대할 뿐, 그와 관련한 "다른 문제들은 한쪽으로 밀려나거나 정치·사회·문화적 의제에서 몽땅 증발"된다는 것이다. 모라토리엄의 위축이나 파괴가 그 예가 될 것이다.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청년 차별주의는 청년의 성장을 지켜볼 수 없고, 미래의 이익보다 현재적 이윤이 더 중요한 성마른 시대가 만들어낸 결과다. 미래와 희망이 청년에게서 해방되고, 더불어 청년성이 청년에게서 탈골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청년에게 내재된 희망과 문제의 대립이 해소된다. 청년은 희망으로부터 소외되고 문제적 존재로만 남게 된다. 청년성을 상품으로 소비하고 라이프스타일로 장착한 어른들이 청년의 과업을 더 잘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와 상품으로써 청년성은 숭배되지만, 실제 청년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커지는 형편이다. 성마른 세상에서 청년은 가난하고 연약하고 의존적이며, 게다가 과거의 공적도 없으니 도움받을 자격도 없는 부담일 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야기로 마무리하자. "젊은이들을 또 다른 사회적 부담으로 여기는 시각이 퍼지면서 이들은 더 이상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담론에 포함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이제 이들은 처분 가능한disposable 〔.......〕 인구의 일부로 간주된다. 즉시 전력감도 아니고 미래도 열 수 없는, 단지 사회적 부담에 불과한 청년은 처분 가능한, 곧 한 번 쓰고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일 뿐이다. 소모품일 뿐인 청년을 위해 나선 자들이 있다. 바로 세대 전쟁론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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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세대 전쟁

청년 대 기성세대의 대결

'세대 전쟁'은 국가가 제공하는 재원이나 사회적 기회(예컨대 일자리)를 둘러싼 세대들의 다툼, '세대 전쟁론'은 그러한 세대 전쟁에 대한 주장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세대 전쟁론은 두 차원으로 구분된다. 내용과 수사rhetoric다. 세대 전쟁론에 대한 학술적이며 대중적인 텍스트의 출현 시기를 1980년대 중반으로 볼 수 있는데, 그 내용과 수사는 현재까지도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반영할 뿐 골격과 전개의 양상이 큰 변형 없이 되풀이된다. 미국이나 중부 유럽의 얘기가 한국의 얘기로 번안되고, 예전의 주장이 오늘의 주장으로 반복된다.
세대 전쟁론을 구성하는 내용적 요소들은 크게 네 가지다. 인구학에서 추출한 저출산·고령화, 정치학에서 차출한 노인의 지배, 경제학에서 비롯한 세대 회계와 형평성이다. 마지막 요소가 복지국가 세대다. 세대 전쟁을 수행하는 주역인 복지국가 세대는 일차적으로 세대들의 자기주장보다 분류에 의해 생겨난다. 앞선 표현으로 말하면, 경험이나 정체성에 근거하기보다 나이에 따라 구획된 연령 세대다.
세대 전쟁론의 흥미로운 지점은 그것의 레토릭이다. 세대 전쟁론의 인기 비결이 내용보다 레토릭에 있기 때문이다. 주장을 주목받게 만들고 그것의 설득력을 높이며 믿을 만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전달 방법인 수사학도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불문하고 큰 변화 없이 일관된 모습을 유지한다.

(...)


2. 세대 전쟁의 레토릭

(...) 

말하자면 세대 전쟁론은 대중매체의 논리에 따라 세대 관계의 복잡성과 다차원성을 무시하고 세대의 추상성과 가소성을 극대화하여, 젊은이와 늙은이 또는 청년 세대와 기성세대의 대립을 선과 악의 싸움으로 극화한다.
세대 전쟁론자들의 우군과 적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자신들이 대변하는 '착한' 약자이자 아웃사이더이자 피해자인 미래 세대, 그리고 강자이자 기득권자이자 가해자인 '악한' 과거 세대다. 선과 악의 구도 설정은 사안을 논박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도덕적으로 명확하기 때문이다. 누가 사악한 부모와 더불어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학대하겠는가. 오만한 강자를 편들어 초췌한 약자를 핍박하겠는가. 물론 현실은 도덕과 전혀 상관없이 돌아가지만 적어도 담론 투쟁, 그러니까 공적인 말싸움에서 도덕성은 최고의 전략이자 무기다. 도덕적으로 명백한 전쟁의 와중에 눈을 다른 곳에 돌리기는 쉽지 않다. 세대 전쟁론자들은 중요한 사회문제가 세대 대립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가능한 원인에 주목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마치 마술사가 미스디렉션misdirection, 그러니까 관중의 이목을 엄한 데 쏠리도록 하여 자신의 트릭을 눈치채지 못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세대가 가진 매력을 활용하여 꾸며진 세대 전쟁론의 도덕적 명확성은 아주 훌륭한 "대량 주의분산 무기mass distraction weapon"다.


3. 한국으로 수입된 세대 전쟁론

서구의 세대 전쟁론이 말하는 노인의 세대 착취를 한국에서도 주장할 수 있을까. 이 땅의 세대 전쟁론자들은 그러한 전범을 따르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못 한다. 노인의 처지가 처참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최악의 노인 빈곤 국가로 65세 이상 노인의 빈곤율이 49.6퍼센트에 달한다. 압도적인 1위다. 2위는 35.5퍼센트, 3위 31.2퍼센트, 그리고 OECD 평균은 12.6퍼센트 정도다. 노인 두 명 중에 한 명이 빈곤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아이들의 밥그릇을 훔쳤다는 비난을 퍼부을 수 없다. 그렇다고 피해자인 젊은 세대는 있는데 가해자 세대 자리를 비워놓을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찾아낸 대체물이 기성세대다.
한국의 세대 전쟁론자들이 서구의 선배들과 달리 노인을 원흉으로 몰아세우지 않은 이유는 단지 한국 노인의 참상 때문만은 아니다. 그 외에 한국의 사회보장 시스템이 서구에 비해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도 있겠고, 또 설득력은 없지만 '한국 특유의' 경로사상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서구에서는 노년 세대를 가로등 불빛 한복판에 세운다. 예컨대 독일의 젊은 정치인들은 표독스레 말했다.
2003년 독일 기민당의 청년 조직 의장은 초고령 노인들의 고관절 수술비용을 의료보험이 지원해선 안 된다고 말했고("지팡이로 충분하다"), 2005년 독일 자민당의 연방의원은 젊은이들의 밥상에 자꾸 숟갈을 들이밀지 말라고 윽박질렀으며("늙은이들아, 이제 수저를 놓으라"), 전 연방대통령 로만 헤어초크Roman Herzog는 2008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연금 생활자의 민주주의Rentnerdemokratie●1의 징후가 보인다는 점이다. 노인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모든 정당들이 그들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노인들이 청년들을 약탈하는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왜 한국에서는 노인이 아니라 기성세대일까

독일의 당찬 세대 전쟁론자들에 비해 한국의 동료들은 훨씬 점잖거나 겁이 많다. 그들은 노인의 심기를 거스르는 정치의 금기를 범하지 않고자 애쓴다. 한국에서 노인을 건드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다른 국가보다 더 위험하다. 한국 노인들은 서구의 다른 국가와 달리 확연한 조직표의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구 세대 전쟁론의 표준화된 복지국가 세대의 전선, 곧 부양 세대(부양을 기대하는 고령층) 대 양육·생산 세대의 전선 설정이 불가능하다. 적으로서, 비난의 대상으로서, 책임을 전가할 승자 세대의 대체물이 필요하다. 이에 한국의 세대 전쟁론자들은 영리하게 기성세대를 전면에 내세운다. 현재 사회를 이끌어가는 '나이 든 세대'를 통칭하는 기성세대라는 용어는 도덕화와 추상성과 가소성에서 '갑'이다. 문제가 많은 현재 사회를 주도하니 공격받아 마땅하다. 나이가 든 세대를 통칭하니 필요에 따라 대상을( 중·장. 노년 세대) 고를 수 있다. 노인을 공격할 수 없어서 만든 궁여지책이 결과적으로 최선책이 되었다.
이제 기성세대의 활약상을 보자. 박종훈은 기성세대를 "세대 전쟁의 주범들"로 묘사한다. 그들은 주로 네 가지 영역에서 활약한다. 첫째, 부동산 가격이다. 한국, 특히 수도권의 주거난은 심각하다. 청년 세대의 고통이 유달리 심각하다.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언제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기성세대의 입장만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둘째, 고령자를 우대하는 복지 정책이다. "막강한 인구 수로 인해 기성세대의 정치적 힘이 커짐에 따라 노인복지는 점점 더 강화되는 반면, 정작 우리 미래를 위해 가장 필요한 미래 세대에 대한 복지 투자는 계속 외면당하면서 그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셋째, 조세 체계의 세대 차별도 심각하다. 간접세의 비중이 높고, 자산에 대한 과세 방식이 보유한 자산에 대한 세금보다 "거래세"(취득세나 양도세)를 중심으로 하기에 자산이 많은 기성세대보다 자산이 없는 "청년에게 큰 부담"이 된다.
넷째, 일자리다. "일자리를 놓고 젊은 세대와 은퇴 세대가 서로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경쟁의 승자는 당연히 기성세대다. 일자리는 그들의 "전리품"이다. 다시 말하지만, 서구의 세대 전쟁론에서 승자 세대는 노인층인 데 반해 한국의 세대 전쟁론에서 승자는 기성세대가 된다.
기성세대가 일상적으로 쓰이는 용어인 탓에 그것은 맥락에 따라 달리 불린다. 부모 세대, 베이비붐 세대, 기득권 세대, 또는 4050, 5060, 6070세대가 그 활용 예다. 이는 기성세대가 세대 개념의 가소성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대 용어의 탁월한 가소성은 그래서 사회과학자들에게는 큰 골칫거리다. 거의 모든 것을 지칭하지만,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속성 때문에 기성세대는 일반 대중과 정치인과 대중매체에 인기가 높다. 예컨대 기성세대의 중요한 입후보자라 할 수 있는 4050세대는 전체 인구(5171만 2,221명)의 약 33퍼센트, 5060세대는 약 27퍼센트, 6070세대는 약 20퍼센트다. 압도적인 규모다. 그러한 규모 때문에 대충 말해도 누군가는 해당되리라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기성세대가 아무런 자책 없이 기성세대를 비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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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의 세대 게임, 세대 전쟁론

2015년 드디어 한국에 세대 전쟁론이 정책 담론으로 수입되었다. 정점은 8월 6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다.●2 "공공·노동·교육·금융의 4대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 "생산가능 인구 감소"라는 큰 틀 속에서 "성장 잠재력"이 급격히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방만한 공공 부문과 경직된 노동 시장, 비효율적인 교육 시스템과 금융 보신주의"가 문제다. 대국민담화는 노동 개혁에 가장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단어 수로 보면 다른 세 가지 개혁에 대한 논의를 합친 것과 비슷하다. 노동 개혁의 열쇳말은 일자리 부족이다. 그 때문에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기피"하는 청년들이 다수 양산되었다. 노동 개혁을 통해 "청년들의 절망"(입직 실패)과 "비정규직 근로자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 
개혁의 대상은 두 가지다. 첫째, 불합리한 고임금이다. 2016년부터 정년 연장이 시행되면서 "향후 5년 동안 기업들은 115조 원의 인건비를 추가로 부담할 것으로 예상"되고, "이렇게 인건비가 늘어나면 기업들이 청년 채용을 늘리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둘째, 불공정하고 경직된 고용과 임금 관행이다. "예전처럼 일단 좋은 일자리에 취업하면 일을 잘하든 못하든 고용이 보장되고, 근속 연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으로 올라가는 시스템으로는 기업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없다.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은 "임금 체계"와 "노동 유연성의 개선"이다. "이렇게 임금 체계가 바뀌고 노동 유연성이 개선되면, 기업들은 그만큼 정규직 채용에 앞장서주셔서 고용과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딸과 아들을 위해서" 그리고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기득권을 지닌 사람들이 "고통 분담"을 해야 한다. "기성세대가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기득권을 조금씩 양보해야 합니다. 〔......〕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도로 대기업과 고임금·정규직들이 조금씩 양보와 타협의 정신을 발휘해줄 것을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대국민담화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해의 대립을 '창조'하는 혐의가 짙다. 무엇보다 현안의 원인을 매우 독특하게 해석한다. 청년의 절망과 고통의 원인을 '고임금·정규직 기성세대'의 "기득권"에서 찾는다. 중요하므로 반복한다. 대국민담화는 "청년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대기업과 고임금 정규직들"의 고통 분담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대기업의 위치가 묘하다. 담화에서 대기업은 기득권자가 아니다. 오히려 다른 기득권자들에게 고통을 받는 위치에 더 가깝다. 대기업은 정규직 노동자인 기득권자들의 높은 인건비를 부담하는 애처로운 처지에 놓임으로써,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는 책임에서 해방된다. 결국 청년들의 고통과 절망의 책임은 애오라지 정규직 노동자인 기성세대의 몫이다! '갑의 횡포'는 물론이고 감면된 법인세의 혜택을 누리는 대기업도, 온갖 불법과 편법을 통해 치부한 재벌도, 무능하고 타락한 정부와 관료와 국회의원도, 이들 모두가 하나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정경유착도 책임이 없다. 이게 다 정규직 노동자인 기성세대 때문이다!
정치 세력에 의한 세대 전쟁론의 정책적 담론은 대국민담화 이전인 2015년 봄에 시작되었다. 국민연금의 기금 고갈을 논하면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자칭 '연금 전문가'인 문형표는 기존의 국민연금 체계가 "세대 간 도적질"이라고 발언했다. "연금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형님들이 독점하고 있는 일자리, 조금만 나눠주십시오." 우익 청년 단체인 '대한민국청년대학생연합'이 같은 해 4월 20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외친 구호다. 그 단체의 대표는 "정규직 노조가 중요한 개혁마다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기업의 투자 의지가 꺾이고 기득권층은 좋은 일자리를 독점하고 있다"며 "눈물만 삼키는 취업 준비생의 현실을 한 번만 돌아봐달라"고 호소했다.
마치 '조율'된 듯한 행동을 보이는 대통령과 장관과 청년 단체는 모두 '기성세대'와 '젊은이'의 대립 구도를 그린다. 고품질의 일자리를 독점한 이기적인 기성세대(의 노동조합)와 그 때문에 입직도 못 하는 젊은이라는 대립구도! 그러한 정치적 대립 프레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자유한국당의 대선 후보 시절 홍준표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사명을 이렇게 표명했다. "대한민국을 위태롭게 만드는 두 세력은 강성 귀족 노조와 전교조다. 〔......〕 청년 일자리를 없애는 강성 노조, 사회 좌편향을 이끄는 전교조를 반드시 응징하겠다. 이것이 홍준표가 집권하면 추진할 국가 대개혁의 핵심이다."
크리스토프 부터베게는 세대 전쟁이 불평등 문제를 희석하기 위한 "사회정책적 데마고기●3"라고 말한다. "사회국가의 축소를 도모하는 세력이 '세대 형평성'을 통해 자신들의 정책적 주도권을 정당화한다. 세대 형평성 논의의 정치적 효과는 비단 사회국가의 축소만이 아니라, 불평등한 권력, 재산, 지배 관계 대신에 세대를 사회갈등의 원인으로 상정함으로써 기존의 불평등한 구조를 '은폐'하는 것"이다. 청년 단체와 장관과 대통령(2015년)의 발언은 전형적인 데마고기다. 이하늬는 이렇게 분석한다. "임금 피크제로 이득을 보는 건 누구일까? 장년층 고용과 청년층 채용이 상관관계에 있다는 가설은 입증된 바 없고, 300인 이상 대기업은 좋든 싫든 정년을 연장해야 한다. 청년층이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장년층이 대체하기 어렵기 때문에 청년 고용도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을 정리하면 세대 간 일자리 전쟁 프레임으로 혜택을 보는 것은 대기업이라는 결론이다."
사회문제의 책임을 자본가나 권력자와 같은 전통적인 기득권자에게 묻지 않고, 고임금을 받는 정규직 기성세대라는 '새로운' 기득권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최저임금 규정이나 기업의 초과이익을 공유하고 단체행동권을 보장하는 등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의미했던 노동 개혁을, 박근혜 정부는 "저성과자의 일반해고 가능성과 취업 규칙 변 경 요건 완화 등 쉬운 해고와 고용 불안을 가중시키는 노동 시장의 재편, 노동관계법의 개편으로 바꾸어, "안 그래도 힘겨운 청년 세대가 직면한 문제의 근원이 마치 기성세대에게 있다는 뉘앙스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개혁, 혁명, 정의, 불평등과 같은 개념들은 진보 세력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용어들을 기업이나 보수 세력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프랑크 눌마이어의 말에 따라 이를 "개념의 점거Begriffe-Besetzen"라 할 수 있다. 독일의 경우 1970년대 보수진영이 개념을 점거했다. 한 예가 바로 세대 형평성과 정의다. 그로써 계급이나 계층 또는 이데올로기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용어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투쟁 구호로 사용하였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 개혁 담론 역시 그러한 용례를 충실히 따랐다.
세대 전쟁론을 확산하기 위한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장관과 청년 단체의 노력, 즉 결코 세대로 설명할 수 없는 불평등을 세대의 문제로 수사적으로 혁신하려는 노력을 나는 '비난의 세대 게임'이라 정의한다. 비난의 세대 게임은 비난의 대상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회피하는 것이다. 고도로 복잡한 현대 사회가 가져온 여러 변화 중 하나는 어떤 정책이나 거대 위험 기술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부작용의 책임을 따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책임의 소재지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C.W. 밀스와 울리히 벡은 이를 "조직화된 무책임성"이라 불렀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나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태 또는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를 보라.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지만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오로지 책임을 회피하고 남에게 전가하여 비난할 뿐이다. 이런 현상을 영어로는 '비난 게임blame game'이라 한다. '책임 공방'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신조어는 '어떤 실패 상황이나 부적절한 결과에 대해, 높은 위치에 있지만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서로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 용어는 문제 해결에 힘쓰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남을 비난하는 세태를 비판하고자 고안되었다. 신조어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세계 도처에서 책임 공방이 빈번해지고 치열해졌음을 뜻한다. 책임 공방이 치열해지는 만큼,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하는 전략들이 개발되고 활용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 그래서 크리스토퍼 후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책임 회피의 이념은 정치와 관료 조직의 정언명령”이 되었다. 책임 회피에 미숙하면 지지자를 잃고 정치적·행정적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책임 회피야말로 지지와 정당성의 근간이랄 수 있다.
박근혜 정부 개혁 드라이브의 두 가지 중추인 일자리와 연금과 관련한 정책 담론은 전형적 비난의 세대 게임이다. 정부의 연금·노동 개혁은 첫 번째로 "야권 지지층이 상대적으로 많은 기성세대(40~50대)를 고립시키며 청년 세대 표를 상당 부분 끌어올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법하다." 두 번째로 책임을 회피하고 비난할 대상을 얻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대기업의 오묘한 위치 설정을 상기하자. 이는 새로운 세대를 희생양 삼아 비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불어 지배 관계를 불투명하게 만들고, 불평등한 기득권의 구조를 은폐하는 효과도 노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입직의 어려움과 비정규직 문제가 대기업이나 세계화를 주도하는 세력의 정책이나 운영 방침이 아니라 기성세대의 기득권, 이를테면 고임금을 받으면서 경직된 고용 관행의 혜택을 누리는 기껏해야 노동자일 뿐인 기성세대의 기득권에서 비롯한다. 요컨대 비난의 세대 게임은 ①정적opponent을 지지하는 세대를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만들려는 정당한 정쟁에 더해 ②사회문제의 해결에는 관심이 없으며 오로지 책임을 회피하고 ③어떤 정치적인 이익(예컨대 현상 유지, 기득권 수호)을 챙기기 위해 특정 세대를 희생양 삼아 비난하는 것이다.

앞서 내용을 요약하자. 청년상의 추락은 세대 전쟁론을 고리로 해서 새로운 노인상의 부상과 연결된다. 오늘날 청년이 비참해진 까닭을, 노일을 포함한 기성세대에게서 찾기 때문이다. 내일보다 오늘을 사는 기성세대에게 젊은이의 일자리, 주거 문제, 기업의 상황, 국가 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중요한 바는 안정적이고 풍요롭고 건강한 그들의 삶이다. 그렇게 기성세대는 미래 세대에게 마땅히 남겨야 할 몫을 거덜 낸다.
세대 전쟁론은 기성세대의 상상적imagined 지위 상승으로 청년의 현실적 몰락을 설명한다. 상상이 현실을 압도한다. 현실은 극소수의 기득권층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청년과 노인과 기성세대의 삶이 힘들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청년 대 기성세대의 상상의 전쟁이 부각된다. 계급이나 젠더나 지역(국내적이며 국외적 선진국과 후진
국)과 같은 전통적인 대립은 조명받지 못하고, 연령 차이일 뿐인 청년 대 기성세대의 대립이 사회적 고통의 진원지가 된다. 다른 사회적 대립에는 가로등 불빛이 미치지 못하도록 하고, 세대 대립을 절대화하는 것이 세대 전쟁론의 세계관이다. 그것을 수사적으로 완성한 것이 비난의 세대 게임이며, 그 게임의 플레이어로 정부를 포함한 각종 정치 세력을 지목할 수 있다.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동의 정당성을 '개혁'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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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세대 프레임을 넘어서

2. 세대 프레임 들여다보기

그런데 왜 하필 세대인 걸까. 오래전부터 세대 명칭의 과잉이 우려되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아무개 세대”가 나타났다고 호들갑이다. 새로운 상품의 혁신성을 알리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라는 광고 카피는 필수가 되었다. 삼성 스마트폰 갤럭시는 해마다 새로운 세대를 출산하고 있다. 변화를 바라는 “세대교체”라는 구호는 정치권의 단골 메뉴다. 이해하기 힘든 젊은이의 성향이 등장하거나 사소한 취향의 변화도 “새로운 세대의 출현”으로 설명된다. 세대, 더 정확히 말해서 세대에 대한 이야기는 도처에 널렸다. 하지만 현실의 세대와 그에 대한 이야기, 곧 세대 담론은 판이하다. 
예컨대 2002년 월드컵에서 거둔 기적 같은 성과와 길거리 응원에 흥분했을 때 모든 대중매체는 선언했다. 식민지, 전쟁, 후진국과 같은 역사의 “굴욕을 씻어낸, 자신감 넘치는 청년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월드컵 세대다." 그로부터 불과 5년 후 한국의 청년 세대는 88만 원짜리로 전락했다. 청년 세대가 정말 그렇게 짧은 시간 동한 흥하고 망했을까. 아마 세대 자체보다 그에 대한 이야기의 변덕일 거다. 현실의 세대와 세대 담론은 다르며, 우리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전자보다 후자의 영향을 입는다.
세대 담론이 남용된다는 것은 세대에 깃든 독보적인 아우라의 증거이기도 하다. 세대 담론의 아우라는 그에 동반한 두 가지 약속에서 비롯한다. 앞으로 지켜질 약속과 이미 파기된 약속. 지켜질 약속은 미래를 가리킨다. 새로운 의견, 과제, 인식, 세계...... 세대는 우리에게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 꿈같은 앞날, 희망찬 미래를 약속한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세대가 약속한, 새로운 시대를 바라며 앞을 바라본다. 동시에 세대는 약속이 파기되었음을 알려 준다. 파기된 약속은 과거를 향한다. 자기 삶의 역사가로서 우리는 현재가 과거보다 더 나아지지 않았음을 안다. 그렇다고 그것이 언제나 좌절, 실망, 체념을 뜻하지는 않는다. 비록 젊은 시절의 꿈, 희망, 기대, 그 어느 것 하나 실현하지 못했지만, 세대를 통해서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가 어디서 비롯했구나. 요컨대 세대는 정체성의 버팀목이다. 우기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한때 집합적 정체성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민족은 그 효력이 약해졌다. 무엇보다 세계화가 국적을 숙명이 아니라 선택 사양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 중요한 버팀목이던 계급은 이 땅에서 변변한 역할을 한 적이 없다. 세대는 그러한 공백을 성공적으로 메웠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건강' 하고 숙명의 무게를 덜어낸 세대는 말 그대로 한국의 정체성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다.
세대가 가장 '핫'한 정체성 상품이 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의 가소성 덕이다. 세대의 가소성은 대단해서, 과장하자면 세상만사에 다 쓰인다. 세대는 시간을 초월한 존재를 제외한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다. 세대 용어의 탁월한 가소성은 그래서 사회과학자들에게는 큰 골칫거리다. 모든 것을 지칭하지만,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속성 때문에 세대는 정치인에게 인기가 높다. 정치라는 비즈니스에 적격이기 때문이다. “정치의 언어는 언제나 매우 다양한 요구들을 동시에 만족시켜야만 한다. 그로써 정치 언어는 과학의 언어와 구분된다." 만약 정치인이 세대 정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외칠 때, 젊은이나 노인 들은 모두 자신들을 위한 정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세대 언어의 매력”은 그것의 분석적 명확성”이 아니라, 그것의 가소성에 기인한 불명확성, 말하자면 대상의 차이는 물론이고 그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소를 뒤섞어버리는 능력에 있다.
세대 레토릭은 전혀 상이한 층위, 즉 사회 전체와 조 직과 가족에서 나타나는 긴장과 갈등을 뒤섞어버린다. 사회 전체에서 나타나는 노인과 청년의 갈등에 대해 생각할 때 보통 우리는 일상적으로 겪는 경험들, 예컨대 부모와 자식 사이의 긴장이나 교사와 학생의 알력 또는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의 불화를 염두에 두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회 전체 수준에서 나타나는 세대 갈등, 예컨대 권력이나 연금이나 일자리를 둘러싼 다툼은 그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의 다양성이나 범위에서 가족이나 학교나 조직의 세대 갈등과는 전혀 다르다. 문제 해결을 염두에 둔다면 똑같이 들리는 세대 용어를 엄격히 구별하겠지만, 자기 정치에만 주력하는 정치인처럼 책임 공방(비난)이나 지지자를 모으는 데만 관심을 둔다면 그렇게 까다로울 필요가 없다.
칸토레크들은 권력이나 돈에 대해서는 물러섬이 없지만, 세대들에 대해서는 까다롭지 않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세대의 명칭이나 속성보다 그것의 '활용'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 우리는 “다양한 사회정책 담론과 과학 분야에서 '세대'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도구화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세대의 속뜻이나 본래적 의미에 상관없이 세대를 말하는 사람이 나름의 이익과 의도에 따라 그것을 활용하는 정도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대나 세대들의 존재 여부를 분석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분석이 필요한 부분은 세대나 세대들이 표명되고 구성되는 방식과 이해 관심이다.” 지금껏 세대 연구가 몰두해온 존재론적 탐구 양식, 즉 세대나 세대 갈등의 존재 여부를 입증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세대나 세대 갈등이 어떤 이해 관심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논의되고 다뤄지고 가공되는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요컨대 세대가 커뮤니케이션 되는 방식과 그것의 전략적 측면, 곧 세대 언어와 세대 게임을 성실히 살펴야 한다.
세대 언어의 매력을 극대화한 것이 세대 프레임이다. 앞서 언급한 가로등의 은유로 말하면, 세대 프레임은 가로등 불빛에 세대들만 비추는 것이다. 세대 프레임은 어떤 사회적 문제를 세대의 틀로 정의하고, 특정 세대에게 책임을 묻고, 그 세대에게 벌을 가하거나 그들로 인해 손해를 입은 다른 세대에게 보상하는 식으로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
어떤 기업 조직이 적절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 치자. 그 까닭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한국의 산업구조가 취약해서, 4차 산업혁명이 이미 시작돼서, 그것도 아니라면 자본주의적 발전이 한계에 도달해서 그럴 수 있다. 원인 진단 자체가 지난한 작업이다. 그러나 세대 프레임은 그 문제의 원인을 빠르고 쉽게 밝혀준다. 즉 조직의 신세대와 구세대가 소통을 못 해서 생긴 문제이며, 그 책임은 '싸가지' 없는 신세대가 또는 '꼰대'인 구세대가 져야 하며, 해결책은 신세대에게 '싸가지'를 또는 구세대에게 '꼰대' 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세대 프레임이 경우에 따라서는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문제를 진단하는 컨설턴트와, 사가지나 꼰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치는 기업교육 강사는 돈을 벌고, 경영자나 조직 구성원은 성과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만족한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조직의 외부(컨설턴트와 교육 강사)를 뺀 모두가 불행해질 공산도 적지 않다. 가깝게는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된 특정 세대, 멀게는 성과가 개선되지 않아 조직이 와해되어 실업자가 된 모든 조직 구성원들이 불행하다. 말하자면, 조직 구성원과 외부 전문가의 처지가 다르다.
우리는 앞에서 세대 게임의 플레이어와 세대 당사자
를 나눴다. 외부 전문가는 플레이어, 조직 구성원은 당사자에 가깝다. 지지자 세대 게임은, 위 사례와 마찬가지로, 플레이어와 당사자를 모두 행복하게 할 수 있다. 당사자는 자긍심을, 플레이어는 지지자를 얻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플레이어를 제외한 모두가 불행해질 수 있다. 적으로 지목된 세대는 부당한 취급을 받게 될 것이고, 쓸데없는 세대 갈등에 주력하느라 진짜 중요한 문제를 챙기지 못해 나라 전체가, 따라서 모든 세대 당사자가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플레이어는 예외다. 최악의 경우 그들은 마치 세월호 선장이 그랬듯이, 이 나라를 가장 먼저 탈출할 능력과 자원과 의지가 있다.
세대 프레임은 사회문제를 '세대'의 부호로 변환한다. 이렇게 되면 그 문제의 세대적이지 않은 다른 측면들은 보이지 않게 된다. 세대 프레임이 작동하여 문제 사안을 호도하는 위험에 대한 경고는 예전부터 있었다. 이를 가장 체계적으로 말한 연구자는 역사학자 로버트 볼이다. 그는 세대 연구의 고전 『1914년 세대』에서 모든 사안에 세대 프레임을 들이대는 태도를 “세대주의" 또는 “세대주의자"라 불렀다.● 세대주의자는 세대 게임 플레이어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볼이 관심을 둔 20세기 초반 유럽의 세대주의자들은 오늘날 세대 게임의 플레이어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당시 세대주의자들은 플레이어와 게임에 참여하는 세대 당사자의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볼에 따르면, 1914년 세대의 대부분은 플레이어 역할('세대 이념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착취"하는 역할)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예외는 있게 마련, 바로 오즈월드 경이다. 세대주의가로서 1940년대까지 영국의 정치 무대에서 활약한 오즈원드 경은 1968년 자서전에서 자신이 세대 게임의 플레이어로서 '세대 이념을 착취했음'을 고백했다. “청년 팔이youth racket,” 풀어 말해서 「청년을 팔아서 부당한 이익을 보는 행위」라는 챕터에서 이렇게 썼다. “세대 전쟁은 계급 전쟁보다 멍청하다. 그럴 이유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언제나 〔......〕 지적인 능력이 부족함을 알려주는 신호다. 어느 정도 지능을 갖추게 되면, 세대들의 충돌은 존재하기를 중지할 것이다.”


●1 다수인 연금 생활자가 투표와 같은 민주적 의사 결정을 통해 지배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칭하는 말.

●2 박세인, 「대국민담화 전문」, 『프레시안』, 2015-08-06, 편의를 위해 전문의 내용은 출처 표시 없이 인용하겠다.

●3 데마고기demagogy: 흑색선전으로도 번역되는 데마고기는 사실무근의 이야기를 통해 상대방을 모략하는 정치적 술책을 말한다.

●Robert Wohl. The generation of 1914, Cambridge et al.: Harvard University Press, 1979, p. 5. '1914년 세대'는 당시 유럽의 청년 지식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로스트lost 제너레이션" 이라고도 불렀다. '로스트'의 뜻은 다양한 의미를 포함한다. 패배나 실종missing, 또는 방향 상실 disorientation 등으로 쓰였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는 용어는 그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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