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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지젝][난민][테러] 슬라보예 지젝, 『새로운 계급투쟁』

by 노지재배 2020.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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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책은 슬라보예 지젝의 『새로운 계급투쟁』이다. 소제목은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을 달고 있다. 자음과 모음 출판사에서 나왔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 책에서 난민 문제는 난민들이 탈출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가장 큰 문제는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이슬람이나 아프리카는 결코 지금의 모습을 자신들의 선택만으로 완성하지 않았다. 중동이나 아프리카에 그어진 국경선조차도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석유와 다이아몬드 등 천연자원을 둘러싼 서구의 욕심이 이들 나라의 자생력과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지젝은 지적한다.

 

새로운 계급투쟁
국내도서
저자 :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 김희상역
출판 : (주)자음과모음 2016.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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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은 말한다. 


"아프리카는 결코 자율적으로 사회를 바꾸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왜? 서구인들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


지젝은 난민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만든 것은 바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력과 군사개입 등의 '신세계질서'의 지속적 혼란이라고 꼬집는다. 

리비아를 혼란의 나락에 빠뜨린 것은 유럽의 개입이었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슬람국가IS를 부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남부 기독교와 북부 이슬람 사이에 내전이 끊이지 않는 것도 단지 종족 간 미움이 아니라 북부의 유전 발견이 촉발한 글로벌 자본주의의 결과라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지젝은 "오늘날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겪고 있는 식량위기도 늘 그랬듯 정부의 부패, 비효율성, 간섭에 그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반대로 식량위기는 농업의 글로벌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새로운 계급투쟁



서구 정치권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 정부에 압력을 행사해 비료와 개량종자를 비롯한 농업투자 보조금을 삭감하게 했고, 이를 통해 기계농법으로 대량생산된 수입 곡물이 이들 저개발 국가로 쏟아져 들어왔다. 결국, 글로벌 자본주의가 제3세계 국가들의 농업을 자급자족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망가뜨렸다. 

수입 농산물로 인해 경쟁력을 상실한 농부는 땅을 버리고 도시로 흘러들었고, 빈민으로 전락, 노동력을 착취하는 공장에서 일하며 근근이 연명할 수밖에 없게 됐다. 더구나 이러한 노동력 제공도 어려운 상황에 처한 국가의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난민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지젝은 반복해서 글로벌 자본주의와 경제적 신식민주의를 규탄한다.  


"우리는 경제적 신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음에도 여전히 수많은 지역경제의 자급자족 토대를 붕괴시키고 있는 글로벌 시장의 파괴적 영향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멕시코 식품 수입상은 지역농업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구매자를 모두 잃었고, 수백만 명의 멕시코인들을 미국으로 수출해 돈을 버는 실정이다."


특히 지젝은 "주목할 것은 대다수 난민이 소위 '실패한 국가', 즉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권력이 무너진 국가(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리비아, 소말리아, 콩고, 에리트레아......)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실패한 국가들에서의 공권력 붕괴는 국지적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 정치-경제의 결과"이며, 리비아와 이라크처럼 많은 경우 서구가 직접 개입한 결과라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점점 증가하고 있는 '실패한 국가'는 예상 밖의 불행이 아니라 강대국에 의해 강행된 경제 식민주의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 지젝이 일침이다.

특히 중동에서 실패한 국가가 태동할 싹은 이미 1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영국과 프랑스가 제멋대로 선을 그어 만든 일련의 '인공' 국가에서부터 싹트고 있었다고 지젝은 말한다. 

결국, 강대국의 경제 식민주의가 시리아와 이라크가 재결합한 IS가 결집되는 호기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이 지젝의 결론이다. 

난민을 탄생시킨 것이 결국 서구권의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해석은,난민들이 '자신을 받아들여주었다고 해서 결코 유럽인에게 감사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지적에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지젝의 말대로 그들의 눈에 자신의 조국을 등지게 만든 참상을 빚어낸 원한이 유럽이기 때문이다. 

소름 돋는 슬라보예 지젝의 통찰이 눈에 띄는 책의 한 주석은 이렇다. 


"이 책이 출간된 지 10일 후인 2015년 12월 31일 쾰른에서 열린 새해맞이 축제에서 시리아 난민 몇 명이 성추행 범죄를 일으켰다. 범인 중 한 명은 "우리가 너희에게 감사할 줄 알았더냐!"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이 책이 사회의 흐름을 얼마나 정확하게 짚었는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계속해서 지젝은 시야를 넓히라고 권유한다.


 "난민은 글로벌 경제의 대가다. 인류 역사상 늘 민족 대이동 흐름이 있었지만 주원인은 근대 식민지 팽창이었다. 식민주의 이전,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자율적이고 상대적으로 고립된 지역공동체였다. 식민주의자들이 전통 질서와 생활방식을 뒤흔들었고, 집단 이동을 촉발했다(특히 노예무역)."


슬라보예 지젝은 아메리카 원주민, 곧 '인디언'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상황을 안정시킬 새로운 생활방식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난민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동정적'이거나 무조건적인 '선량함', 보편적인 선과 인류애 등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고 지젝은 지적한다. 


"선량한 부자가 부유함을 누리면서 자기는 가난한 사람과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말할지라도 그는 틀렸다. 우리가 사회적 위상(계급)을 만들었다고 해서 모두 동등한 인간이라는 휴머니티의 영도零度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과 같은 배에 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동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망상이다(네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너의 사회적 지위를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사회적 지위야말로 네가 '정말' 어떤 인간인지를 결정한다. 부자가 실제로 가난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면[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부자에게 돌아갈 길은 없다[달리 선택할 수 있는 대안적 인생이 그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 글자 그대로 다른 인간이다])."


지젝은 "난민을 두고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와 그들의 다름은 명확하며, 신식민지주의가 만든 계급의 격차도 뚜렷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결과가 난민이나 난민들의 국가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난민을 만나보았더니 그들도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 곧 조바심을 내고 폭력적이며 요구하는 것이 많은 인간인 데다가 심지어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많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문화에서 온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그래서 우리는 난민과 인도적 동정을 한데 묶는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 난민을 도우려는 자세는 그들이 겪는 아픔에 대한 동정에 뿌리를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돕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 제발 일체의 감상일랑 떨쳐버리자, 그 감상은 대다수 난민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진다. 난민이 우리와 다른 사람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우리와 같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젝은 서구가, 선진사회가 난민을 받아들인다 해서 결코 그들에게서 '고마움'과 같은 감정을 당위적으로 요구하거나 결부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들이 탈출한 생활은 서구가 가끔 맞닥뜨리는 테러의 끔찍함이 일상화한 곳이며, 자본의 침략으로 '생활'이 무너진 곳이기 때문이다.


"파리 테러가 벌어진 다음 날, 한 난민이 텔레비전에서 무미건조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파리 같은 도시가 이런 비상사태에 빠져 몇 년은 아닐지라도 몇 달 동안 일상생활의 평온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바로 우리가 도망친 곳입니다." 우리는 이 말에 담긴 진리가 번쩍이는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테러리스트와 테러의 희생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지젝은 윈스턴 처칠의 말투를 흉내 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경우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비록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할지라도 충분하지 않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요구되는 바로 그것을 행해야 한다."고. 이어 지젝은 "두 팔을 활짝 펴고 맞아주며, 공감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관대함이라는 최선(우리의 눈에 최선)은 아무리 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런 관대함의 과시가 우리에게 좋은 기분을 안겨준다는 단적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의심을 품어야 한다. 과시는 정작 요구되는 것을 애써 잊으려는 꼼수가 아닐까?"라고 강조한다. 

끝으로 지젝은 자신의 생각이 이상향에 그칠 수도 있다고 덧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세계적인 연대는 유토피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함이 마땅하다."



■저자

슬라보예 지젝 

1949년 옛 유고연방이었던 슬로베니아 태생.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파리 제8대학의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독보적인 철학으로 ‘동유럽의 기적’ 혹은 라캉 정신분석학의 전도사로 일컬어지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그는 독일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새롭게 이론화하였다. 철학자로는 드물게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최근 인문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각주에 인용되고 있다. 한국을 방문하여 가진 두 차례의 강연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정치에도 관심을 보여 1990년에는 슬로베니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개혁파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현재는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선임 연구원으로 있으며, 슬로베니아의 주간지 「믈라디나」의 정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 현상에 대한 관심을 가진 그는 이론과 현실, 문화의 창의적인 결합을 담아 지속적으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SF 소설, 할리우드 영화,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예술을 철학과 접목시킨 독특한 문화 비평을 내놓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요 저서로 『삐딱하게 보기』,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까다로운 주체』, 『신체 없는 기관』, 『혁명이 다가온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HOW TO READ 라캉』, 『죽은 신을 위하여』, 『시차적 관점』 등이 있고, 함께 쓴 책으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 『성관계는 없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레닌 재장전』, 『바디우와 지젝 현재의 철학을 말하다』(공저)등이 있다. 



■역자

김희상

성균관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독일 뮌헨의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대학교와 베를린 자유 대학교에서 헤겔 이후의 계몽주의 철학을 연구했다. 깊이 있는 인문학 공부와 생생한 유럽 체험을 바탕으로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연쇄살인범의 고백』, 『살인본능』 등 지금까지 모두 8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2008년에는 『생각의 힘을 키우는 주니어 철학』을 썼다. 최근 옮긴 책으로는 『늙어감에 대하여』,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 『블러프를 벗겨라!』, 『지루하고도 유쾌한 시간의 철학』 등이 있다. 



■목차

이중의 협박 
좌파의 금기를 깨자 
종교의 음란한 이면 
신적 폭력 
난민의 정치경제학 
문화전쟁에서 계급투쟁으로, 그리고 다시 거꾸로 
위협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웃의 경계 
무엇을 할 것인가? 

주석 
슬라보예 지젝 국내 단행본 목록



■책 속으로


"

난민의 정치경제학

사회와 경제의 구체적 분석을 위한 좋은 단초는 달리 뭐라 칭할 수 없는 '난민의 정치경제학'을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그리고 누가 난민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만들었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첫 단계는 당연히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력과 군사개입 과정에서 난민 발생의 원인을 찾는 일이다. 이 시대의 민낯인 '신세계질서'의 지속적 혼란이 난민 발생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는 결코 자율적으로 사회를 바꾸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왜? 서구인들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리비아를 혼란의 나락에 빠뜨린 것은 유럽의 개입이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슬람국가IS를 부상하게 만들었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남부 기독교와 북부 이슬람 사이에 내전이 끊이지 않는 것은 단지 종족 간 미움이 아니라 북부의 유전 발견에서 촉발되었다. (이슬람과 손잡은) 프랑스와 (독일과 손잡은) 중국이 배후에서 석유 통제권을 놓고 싸우고 있다.
오늘날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겪고 있는 식량위기도 늘 그랬듯 정부의 부패, 비효율성, 간섭에 그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 반대로 식량위기는 농업의 글로벌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2008년 10월 23일, AP통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빌 클린턴이 '세계 식량의 날' 식량위기를 주제로 한 유엔 연설에서 이를 분명히 밝혔다고 보도했다. 연설 제목은 직설적이었다. '우리가 망가뜨렸다. 세계 식량을(We Blew It. On Globad Food)' 연설의 요지는 오늘날의 세계 식량위기가 '대통령 시절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망가뜨린 결과"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식량을, 세계의 가난한 이들이 지닌 권리가 아닌 상품으로 취급하도록 허용한 '우리'는 바로 서구사회다. 클린턴은 개별 국가나 정부가 아니라 서구의 장기적인 세계 정치에 그 잘못이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서구 정치는 미국과 유럽연합이 주도했고, 오랜 세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기관이 이를 앞장서 실천했다. 서구 정치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여 비료와 개량종자를 비롯한 농업투자 보조금을 삭감하게 했고, 이로써 선진국 농산물이 수출될 길이 활짝 열렸다. 기계농법으로 대량생산된 수입 곡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제3세계 국가의 자급자족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망가졌다. 이런 '구조조정' 결과, 지역 농업은 글로벌 경제로 통합되었다. 수입 농산물로 인해 경쟁력을 상실한 농부는 땅을 버리고 도시로 흘러들었고, 빈민으로 전락, 노동력을 착취하는 공장에서 일하며 근근이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제3세계 국가들의 수입 곡물 의존도는 갈수록 커져갔다. 이런 식으로 이들 국가는 포스트 식민지 종속성에 사로잡혔고, 세계 시장 변동에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해져 아이티와 에티오피아 등의 국민들은 곡물 가격 급등으로 극심한 기아에 시달려야 했다(곡물 가격 급등에는 점점 더 많은 곡물이 바이오연료 생산에 투입된 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문제에 올바르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대규모 공동대책을 숙고해야 한다. 통상적인 국가 개입이나 과도한 평가를 받고 있는 지역의 사회운동단체들은 이 문제를 감당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세계의 온실 내부는 식량과 에너지로 넘쳐나는 반면, 여기서 제외된 나머지 세상은 혼란과 기아와 끊임없는 전쟁으로 더없이 피폐해질 것이다.
오늘날 아이티처럼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나라의 국민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총궐기하여 강력하게 항의할 무조건적인 권리가 그들에게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들도 난민이 되어야 할까 우리는 경제적 신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음에도 여전히 수많은 지역경제의 자급자족 토대를 붕괴시키고 있는 글로벌 시장의 파괴적 영향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멕시코 식품 수입상은 지역농업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구매자를 모두 잃었고, 수백만 명의 멕시코인들을 미국으로 수출해 돈을 버는 실정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잘못에서 시작된 것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오늘날 다시 아프리카의 '암흑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콩고다. 2006년 6월 5일 자 「타임」지 표제는 '세계 최악의 전쟁(The World's Deadliest War)'으로, 지난 10년 동안 콩고에서 약 4백만 명이 어떻게 정치적 폭력과 관련하여 사망했는지를 추적한 탐사보도였다. 그러나 이 기사에는 평 소 비슷한 주제에서 강조된 인도주의적 호소가 전혀 없었다. 모종의 여과장치가 뉴스의 충격과 확산을 막고 있는 듯했다. 냉소적으로 꼬집자면, 「타임」지는 미디어업계의 헤게모니 장악에서 부적절한 고통의 희생물을 택한 셈이다. 그들은 차라리 이슬람 여성의 운명, 티베트 탄압...... 같은 주제를 택했어야 했다.
콩고의 참상은 도대체 왜 무시되었을까? 2001년 유엔은 콩고 천연자원의 불법 개발 문제를 조사했고, 그 결과 전쟁의 주된 원인이 다섯 개 주요 광물자원(콜탄, 코발트, 구리, 금, 다이아몬드)을 누가 차지하고, 통제하며, 거래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발생된 것임을 확인했다. 그렇다. 우리는 부족 간 분쟁으로 치장된 싸움의 배후에 글로벌 자본주의가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 공고는 통일 국가가 아니다. 여러 지역으로 잘게 나뉘었고, 각 지역마다 우두머리를 달리 하는 군대가 지배한다. 병사들 중에는 마약에 중독된 아이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각 군벌 지도자들은 저마다 외국기업과 연결되어 있고, 외국기업들은 지역 천연자원을 앞다퉈 착취하기에 바쁘다. 아이러니하게도 콩고산 광물은 노트북과 휴대폰 등 하이테크 제품의 원재료로 쓰인다. 콩고 국민이 워낙 야만적이어서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고? 이제 그런 말은 깨끗이 잊으시라! 외국 하이테크 기업들이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해묵은 갈등으로 이어진 콩고의 부족 간 분쟁은 순식간에 붕괴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진정 아프리카인을 돕고 난민 발생을 막고자 한다면 바로 자본주의의 개입부터 비판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다수 난민이 소위 '실패한 국가', 즉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권력이 무너진 국가(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리비아, 소말리아, 콩고, 에리트레아......)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공권력의 붕괴는 국지적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 정치-경제의 결과이며, 리비아와 이라크처럼 많은 경우 서구가 직접 개입한 결과다. 점점 증가하고 있는 '실패한 국가'는 예상 밖의 불행이 아니라 강대국에 의해 강행된 경제 식민주의의 결과일 뿐이다. 더구나 중동에서 실패한 국가가 태동할 싹은 이미 1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발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제멋대로 선을 그어 일련의 '인공' 국가를 양산했다. 바야흐로 강대국의 경제 식민주의는 시리아와 이라크가 재결합한 IS가 결집되는 호기를 만들어주었다. IS는 옛 식민지 지배국들이 갈라놓은 수니파가 재결합된 결과다.
카다피는 죽기 얼마 전 이런 암담한 예언을 했다.* '잘 들어라, 나토 국민들아! 너희는 장벽에 폭격을 퍼붓고 있다. 아프리카인이 유럽으로 이주할 길을 막고, 알카에다 테러리스트 들을 막고 있는 그 장벽에 말이다. 그 벽은 리비아다. 너희 바보들이 그 벽을 허물고 있다. 너희는 아프리카에서 밀려올 수많은 이민자들로 지옥의 불을 맛볼 것이다. 바로 너희가 알카에다를 지원한 것이다. 난 거짓말을 한 적이 없고, 지금도 허풍이 아니다. 너희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카다피는 분명한 사실을 예고한 것이 아닐까? 아래 인용문 (2011년 5월 한 러시아 일간지에 게재된 공개서한)은 비록 푸틴 파스타** 냄새가 나지만 결정적 진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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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0월 20일 사살됨. 
** pasta putinesca. 스파게티의 하나인 'pasta alla puttanesca'와 같은 뜻의 루마니아어(putinesca)를 빌어 '푸틴'을 빗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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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보리스 돌고프는 타스 통신에 이렇게 밝혔다. '난민 위기가 미국과 유럽연합이 펼친 정책의 결과라는 것은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라크와 리비아의 파괴, 이슬람 과격분자들의 손을 빌려 바사르 알 아사드 대통령을 실각시키려는 시도는 유럽연합과 미국이 추진한 정책이다. 그 결과 수십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이는 다양한 양상의 지극히 심각한 문제다." 모스크바 국립국제관계 연구소 산하 오리엔트연구소의 이리나 츠야겔스카야 교수도 이렇게 밝혔다. '시리아 내전, 이라크와 리비아의 긴장이 난민 유출을 일으켰지만 그게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나는 이 사건을 시발로 경제가 취약한 나라를 떠나려는 대이동 추세가 촉발되었다고 본다. 고향을 등지게 만든 것은 결국 체제의 문제다. 유럽의 진보적 법률 덕에 난민은 유럽에 체류하면서 일자리 없이 각종 복지혜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작가, 극작가, 연출가인 예브제니 그리쉬코예츠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그들은 탈진했고, 분노했고, 굴욕감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유럽적 가치, 생활방식, 전통, 다문화주의, 관용을 전혀 모른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유럽의 법을 지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자신을 받아들여주었다고 해서 결코 유럽인에게 감사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럽이 자신의 조국을 피바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 앙겔라 메르켈은 현대 독일 사회와 유럽이 이 문제에 충분히 대비했다고 장담했지만 그건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다!"

난민이 '자신을 받아들여주었다고 해서 결코 유럽인에게 감사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지적은 단적인 진실이다. 그들의 눈에 자신의 조국을 등지게 만든 참상을 빚어낸 원한이 유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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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출간된 지 10일 후인 2015년 12월 31일 쾰른에서 열린 새해맞이 축제에서 시리아 난민 몇 명이 성추행 범죄를 일으켰다. 범인 중 한 명은 "우리가 너희에게 감사할 줄 알았더냐!"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이 책이 사회의 흐름을 얼마나 정확하게 짚었는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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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카다피의 예언과 러시아 지성인의 지적에 보편적 진리는 담겨 있다. 그렇다고 이 보편성에서 곧장 난민 행렬이라는 경험적 사실로 비약해 우리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머리를 조아릴 필요는 없다. 먼저, 독일과 프랑스는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지 않았던가. 둘째로, 사담 후세인 정권은 미국의 암묵적 지원을 받아가며 공격적 정책(이란 공격)을 밀어붙였다. 그럼에도 난민 위기를 보도하는 미디어의 행태는 경악스럽다. 언론은 흡사 그리스의 배후에 난민을 빨아들여 이를 유럽으로 토해내는 전쟁과 황폐화의 블랙홀이 있는 듯한 그림을 그려가며, 아나톨리아 해변에 그리스 제도로 난민들이 건너갈 수 있는 구멍이 뚫린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리스의 배후에 아주 분명한 입장을 지닌, 정치적 지형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이해관계가 있을 뿐이다. 먼저 터키는 아주 교묘한 정치 게임을 벌이고 있다(공식적으로는 IS를 퇴치하는 싸움을 벌인다고 하면서 IS와 혈전 중인 쿠르드족을 폭격한다). 다음으로, 무한 재력을 자랑하는 아랍의 엘리트 국가들이 따로 놀고 있다(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는 단 한 명의 난민도 원치 않는다. 또한 이라크가 자랑하는 막대한 석유자원이 문제를 더욱 이게 만들고 있다. 이런 거대한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어떻게 난민 행렬이 발생하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유럽으로 건너가기를 원하는 난민의 처지를 노려 돈을 벌려는 엄청난 규모의 지하경제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난민 수송으로 누가 돈을 벌까? 또 그 돈은 누가 댈까? 수송 조직의 관리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검은 지하세계를 추적할 임무를 띤 유럽 정보부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난민이 암울한 상황에 처해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난민 행렬이 교묘하게 기획된 프로젝트의 일부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몇몇 중동 국가(터키, 이집트, 이란)가 막강한 부를 자랑하는 다른 중동 국가들보다 난민에게 문호를 더 활짝 열어주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위기 지역과 인접한 부자 나라임에도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 나라는 이슬람 난민들에게 문화적으로 유럽보다 더 가깝지만 난민을 한사코 외 면한다.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는 소말리아에서 온 난민을 강제 귀환시켰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난민 교육을 위한 지원금으로 고작 2억 8천만 달러를 내놓았을 뿐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외국인 불청객'을 용인하지 않는 이슬람 근본주의 신정국가이기 때문에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는 것일까?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사우디아라비아가 경제적으로는 서구에 완전히 동화된 나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서구 자본의 전초기지, 즉 서구로부터 들어오는 석유 수익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국가가 아닌가? 국제사회는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쿠웨이트, 카타르 등에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일정 비율의 난민을 수용하도록 최대한의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더욱이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과격분자들의 알 아사드 축출 음모를 지원해 시리아 상황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들 부유한 나라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새로운 노예제도의 출현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장려하는 경제체제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지만 경제 현장의 자본주의 작동 방식은 노예 양산일 뿐이다. 노예제는 중세 말 폐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근대 초기부터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에서 더 기승을 부렸다. 비약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가정해보자. 글로벌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대는 노예제의 부활이라는 서막을 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직접적으로 개인을 노예로 규정한 법적 신분 규정은 없지만 노예제는 온갖 새로운 형태로 진화 중이다. 아라비아반도(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에서 '일하는 수백만 명의 이민 노동자는 사실상 기본 시민권과 자유를 박탈당했다. 아시아 공장의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값싼 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완전히 통제되고 있는 현실은 강제수용소와 다를 바가 없다. 중앙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에서는 천연자원을 착취하는 강제노동이 버젓이 시행된다. 그 좋은 예가 앞서 살펴본 공고다.
그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다. 2013년 12월 1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 프라토에서 중국인 소유의 섬유공장에 화재가 발생, 최소 7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한 노동자들은 공장 한 귀퉁이에 슬레이트로 얼기설기 만든 숙소에서 잠을 자다 불길에 놀라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사고가 일어난 곳은 섬유공장이 많기로 유명한 마크롤로토 공단이었다. 지역 노조원 로베르토 피스토니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놀라지 않았어요. 벌써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는 1천 명 남짓한 사람들이 노예와 다를 바 없는 환경에서 살았거든요." 인구 2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프라토에만 공식 거주권을 취득한 최소 1만 5천 명의 중국인 이민자가 살고 있다. 그리고 4천 개 이상의 공장이 중국인 소유다. 추정한 바로는 수천 명의 중국인 밀입국자들이 이 도시에서 매일 16시간씩 노동하며 도매상과 공장 유통망이 주문한 싸구려 의류를 제작하고 있다고 한다.
새로운 노예의 비참함이 어떤지 궁금한 사람들은 당장 주변을 둘러보면 된다(상하이 교외, 두바이, 카타르). 중국을 위선적이라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아니, 새로운 노예제는 바로 우리 지척에서 번성 중이다. 단지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다(아 니면 못 본 척하거나).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 사실상의 노예제의 체계적 확산은 참사가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적 필연성의 결과, 그래서 어쩌면 난민은 사우디아라비아로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난민은 유럽에서도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지 않는가? 현지 노동자들은 난민의 값싼 노동력에 압박과 위협을 느낀 나머지 반이민적 대중영합적 극우파에게 그들의 표를 몰아주지 않을까? 대다수 난민들에게 다가올 꿈은 정확히 이런 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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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은 어디에서 오는가?

평범한 사람들의 우려를 경청해야 한다고 해서 그들의 잠재적 억측, 즉 우리의 생활방식이 외부로부터 이방인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까지 용납될 수는 없다. 오히려 갈수록 악화되는 생활방식의 파괴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가져온 예를 들어보자.
우디 알로니 감독의 신작 「정션 48」(2016)은 1949년 이스라엘에 잔류한 팔레스타인 가족의 후손인 '이스라엘 거주 팔레스타인' 청년들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들의 일상은 두 전선과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한 편으로는 이스라엘 정부의 압제와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 주의자의 압박과 싸운다. 주인공은 이스라엘의 유명 팔레스타인 래퍼 타이메르 나파르로, 팔레스타인 가족이 딸을 상대로 자행하는 '명예살인'의 전통을 신랄하게 조롱한 랩으로 유명하다. 그는 최근 미국 공연에서 희한한 경험을 했다.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에서 '명예살인'을 반대하는 노래를 부르자 반시온주의 대학생 몇 명이 거칠게 공격하면 서 그가 팔레스타인 사람을 야만적 원시인으로 보는 시온주의자의 입장을 적극 홍보했다고 비난했다. 또 명예살인이 저질러졌다면 그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원시적 생활을 강제하며, 현대화를 방해하는 이스라엘에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다. 나파르의 현명한 답변은 이랬다. '너흰 날 비판하지만 그건 내 공동체를 욕보이는 거야. 너흰 급진적인 지도교수들 맘에 들려고 영어로 날 비판하지. 난 이웃에 사는 여인들을 보호하려고 아랍어로 노래를 불러." 나파르가 표명한 입장의 핵심은 그가 팔레스타인 딸과 여인을 가족의 테러로부터 지켜주고 싶다는 것뿐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신을 위해 싸울 기회가 있음을 보여준 점이다. 알로니의 영화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콘서트 무대에 선 한 여성을 보여준 뒤, 명예살인을 저지르려고 그녀의 집에 침입하는 두 오빠의 모습으로 끝난다.
스파이크 리의 영화 「말콤 엑스」에는 놀라운 장면이 하나 있다. 대학에서 강연을 마친 말콤 엑스에게 한 백인 여성이 다가와 흑인해방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뭐냐고 묻는다. 그의 대답은 "없소"였다. 이 말은 말 그대로 백인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흑인해방 운동은 먼저 흑인 공동체 내부에서 시작되어야지 선량한 백인 진보가 선물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정의 토대 위에서만 백인은 흑인을 돕는 뭔가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나파르의 생각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서구 진보의 부성애적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서구 좌파가 팔레스타인 생활방식을 '존중'한다며 '명예살인'에 침묵을 지키는 것은 더더욱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들 두 측면―서구적 가치를 보편적 인권으로 강요하는 것, 타문화에 대한 존중에서 이 문화의 일부인 잔혹 행위를 간과하는 것은 신비화된 이데올로기라는 한 동전의 양면이다.
보편적 인권의 보편성이 어떻게 왜곡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은밀하게 서구문화의 가치와 규범에 특혜를 주었는지 논한 글은 많다(일례로, 개인이 공동체에 우선한다). 그러나 다문화주의자와 반식민주의자의 생활방식의 다양성 옹호에도 잘못이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즉, 폭력적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행동이 특수한 생활방식의 표현이며, 우리가 이를 낯선 '서구적 가치'로 평가할 권리는 없다고 합리화하는 것은 각각의 특수한 생활방식에 내재된 적대를 은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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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경계

이웃과의 관계가 비틀어진 배경을 이해하려면 '이웃'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보다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시카고 샤이머 대학의 종교학자 애덤 코츠코는 『소름 끼침Creepiness』에서 '소름 끼치는 낯섦'이야말로 오늘날 이웃의 기묘한 본질이라고 지적했다. 모든 이웃은 궁극적으로 기이하다. 이웃을 기이하게 만드는 것은 이웃이 보여주는 기묘한 행동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저런 행동을 하는지 속내를 알 수 없어서다. 일례로, 사드 후작의 작품에서 소름을 끼치게 만드는 것은 그 내용이 아니다(내용은 오히려 상당히 따분하며, 지루하게 되풀이될 뿐이다). 정작 우리를 섬뜩하게 만드는 것은 '왜 저런 짓을 할까?' 하는 물음이다. 사드가 선보인 모든 것은 '사디스트'의 변태 행위다. 글을 쓴다는 행위, 그 행위의 수행을 제외하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의문은 이것이다. 저 소름 끼치는 이웃은 뭘 원하는 걸까? 대체 뭘 얻어내려는 걸까? 왠지 분명한 이유로 지금 저렇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는 경험, 그래서 이상하다는 혐의를 결코 지울 수 없을 때, 이웃과의 조우는 섬뜩해진다.
1968년 이후 점점 더 많은 나라들이 점점 규모가 커져가는 공동체에 참여하며 글로벌 시장을 이루어가자 자유방임적 향락주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 향락주의는 보편적 관용을 끌어올리기는커녕 거꾸로 인종차별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촉발시켰다. 라캉은 이렇게 말했다. "공동시장으로서의 우리의 미래는 인종차별 과정의 갈수록 과격해지는 확산으로 균형을 이루게 될 것이다. 왜? 인류를 하나로 묶는 통일된 소통 공간이 창출되는 기회로 세계화를 보는 사람은 종종 세계화의 어두운 측면을 간과한다. 이미 프로이트가 오래전에 우려했듯, 이웃은 무엇보다 하나의 사물이며,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어떤 침입자이자, 우리를 훼방하며 우리의 익숙한 생활방식을 혼란에 빠뜨리는 다른 생활방식(혹은 사회생활과 의례에서 드러나는 주이상스*의 방식)을 지닌 사람이다. 그래서 너무 가까이 있는 이웃은 공격적 반응을 촉발시킨다. 우리는 한 침입자를 쫓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슬로터다이크가 뭐라고 했던가. "더 많은 소통은 무엇보다도 더 많은 소동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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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issance. 원문은 프랑스어. 라캉의 정신분석 용어로 '쾌락' (plaisir, pleasure)과 대립적 의미를 지닌다. 쾌락은 어떤 끝에 도달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만, 주이상스는 무한한 것으로 이해된다. 육체적인 것 너머의, 그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쾌락 원리(상징계의 원리) 너머로 향하고자 하는 전복적(실재를 향한) 충동이다. 라캉에게 상징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가까운 개념이고, 실재는 그 상징계 너머에 있는, 아직 도래하지 않고 다다를 수 없는 지점을 뜻한다. 즉, '쾌락'처럼 만족되고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계속 어떤 잃어버린 대상에 가닿으려는 갈망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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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서로 이해함'이라는 태도는 '서로 길을 비켜감'이 라는 태도로 보완되거나, 새로운 '비밀 보호법'에 부합하는 적절한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비판자들이 종종 유럽 문명의 약점이자 실패라고 비난하는 이른바 '사회생활의 소외'는 오히려 유럽 문명이 더 쉽게 다른 생활방식을 용인하게 만든 요소다. 소외는 사회 내부에 거리감이 필요하다는 역설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타인과 지척에서 살더라도 평소 나는 그를 모른 척한다. 나는 타인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된다. 나는 타인과 더불어 외부의 '기계적 규칙'을 지키면서 서로의 '내면세계'를 나누지 않고 소통하면서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 활동한다. 여기서 배워야 할 교훈은 이것이다. 생활 방식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우리에겐 어느 정도의 소외가 필수적이다. 많은 경우, 소외는 문제가 아니라 해법이다. 그렇다면 상이한 문화(혹은 각각의 일상생활의 구조에 각인된 상이한 생활방식)가 양립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무언일까? 융화, 최소한의 조화로운 발전, 평화적 공존을 가로막는 진정한 장애물은 무엇일까? 정신분석은 이 장애물을 주이상스(향락)라고 답한다. 주이상스가 서로 달라서, 혹은 공통점이 없어서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단지 자신의 주이상스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서(또 모르는 만큼) 타인의 주이상스를 참을 수 없다. 결국 나와 타인의 주이상스가 아니라, 나와, 늘 불청객인 나 자신의 주이상스가 양립하지 못할 뿐이다.
이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려고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주이상스를 타인에게 투사하고, 타인은 끊임없이 이 주이상스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투사는 피할 수 없이 질투심을 자극한다. 질투는, 내가 낙원(완벽한 주이상스의 유토피 아)을 창조하고 상상했는데 정작 자신은 거기에서 제외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같은 정의가 정치적 질투에도 적용된다. 반유대인주의자는 유대인을 탐욕이 심하다고 비난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는 호모와 레즈비언의 성생활을 난잡하다고 툴툴댄다 등이 그 좋은 예다.
프로이트와 라캉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유대기독교의 기본 율법을 집요하게 문제 삼은 것은 고유의 가치를 보편성으로 치장해 이 가치에 맞지 않는 사람을 따돌리는 은밀한 배제가 숨겨져 있다는 식의 흔한 이데올로기 비판이 아니었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이웃이라는 개념이 보편성이라는 차원과 양립할 수 없다는 훨씬 더 강한 논증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요지는 아주 정확하게 취급해야 한다.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보편성은 남에게서 나를 보는 인간적 보편성이다. 즉 정치적 종교적 기호와 무관하게 우리 모두가 하나이며, 우리 모두 동일한 두려움과 열정을 공유하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이스라엘 군은 중요한 이데올로기 (자기) 표현을 위해 이와 동일한 '인도주의' 이데올로기 전략('실수는 인간적이다'는 속담을 사용한 전략)을 사용한다. 이스라엘 언론은 자국 병사의 불완전함과 심리적 고통을 종종 상세히 보도하면서 그들이 완벽한 전투기계나 초인적 영웅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역사와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다른 사람처럼 실수를 저지르고 방황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일례로 2003년, 이스라엘 군이 '테러리스트' 혐의를 받는 한 남자의 집을 파괴했을 때, 군인들은 유독 친절한 티를 내며, 심지어 그 가족을 도와 집에서 가구를 들어내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불도저로 그 집을 깔아뭉갰다. 최근에도 이스라엘 언론은 이와 비슷한 사건을 보도했다. 한 이스라엘 병사가 테러리스트가 숨었다고 의심되는 팔레스타인 사람의 집을 수색했다. 이때 어머 니는 놀란 딸을 진정시키려 딸의 이름을 불렀고, 병사는 겁에 질린 소녀의 이름이 자기 딸의 이름과 똑같아 놀랐다고 했다. 감상에 사로잡힌 병사는 지갑을 꺼내 딸의 사진을 팔레스타인 어머니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식의 공감 제스처에 담긴 허상은 쉽게 알 수 있다. 정치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근심과 열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시각은 병사가 해야 할 일이 가져올 충격을 완화하려는 획책이다. 팔레스타인 어머니가 보여야 할 유일한 옳은 반응은 이것이다. "당신이 정말 나와 같은 인간이라면 당신은 왜 지금 이런 일을 해야 하죠?" 병사는 현실적 의무로 도피할 수밖에 없다("저도 좋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제 임무입니다......"). 병사의 보편적 인간성은 임무라는 특수성에 속절없이 무너질 뿐이다.
이런 식의 '인도주의'는 개인이 처한 복잡한 현실과 그의 인간적 본성에 반하는 역할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 가족에 군인이라는 유전자는 없었습니다." 클로드 란츠만의 영화 「차할」에서 어떤 이스라엘 장교가 자신이 직업군인이 된 것에 스스로 놀라며 한 말이다.
결국 우리는 문화적 상대주의에 구속된 것일까? 보편적인 인간적 차원은 없는 것일까? 아니다, 있다. 그러나 이 보편적 차원은 인간적 공감과 이해 너머에, '우리는 모두 하나다'라는 보편적 차원 너머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진정한 보편적 차원은 바로 '비인간적인 이웃'이라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사항을 나는 예상 밖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려고 한다. 로버트 피핀은 존 포드 감독의 「수색자」라는 영화를 명쾌하게 해석하면서 영화 끝부분의 주요 장면에서 어떻게 타인(곧 이웃)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을 뛰어넘는 운동이 일어났는지 설명했다. 에단은 오랜 수색 끝에 마침내 소녀 시절 인디언에게 끌려간 조카 데비의 행방을 찾아내고 숙녀가 된 그녀를 구한다. 그런데 영화 내내 에단은 데비를 구출해 집으로 돌려보내려는 게 아니라 죽일 생각이었다. 인종차별주의에 사로잡힌 에단은 오랜 세월 인디언과 함께 생활한 백인 처녀는 죽어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마침내 무방비로 쓰러져 있는 데비를 발견한 에단은 그녀를 두 팔로 안아 올리고 포옹하며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한다. 이런 태도 변화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일반적 해석은 마지막 순간, 에단의 마 음에 담긴 선함이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핀은 이런 해석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정답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에단의 헝클어진 눈빛, 그를 피해 달아나려는 데비를 잡기 직전 보여준 그 눈빛에 담겨 있다. 그 눈빛은 홀연 되살아난 인간적 온기와 동정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눈빛은 무엇보다도 혼란, 곧 에단이 불현듯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돌연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혼란을 보여준다. (......) 이 헝클어진 눈빛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틀림없다고 확신한 자신의 원칙이 부분적으로 허구와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깨달음이며, 에단이 백인으로서 품어온 정체성에 대한 회의이다. 우리(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념에 집착하지 않고 마침내 행동에 나설 때에만 비로소 그 신념의 폭과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깨닫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단이 혼란에 빠진 표정을 짓는 바로 그 순간, 자기 정체성의 알 수 없는 심연 속에서 자신을 이웃으로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깨달음은 그동안 굳게 믿어왔던 자신의 정체성, 에단(그리고 관객인 우리)이 영화 내내 도식적으로 보여줬던 정체성, 데비를 죽임으로써 그녀를 구원할 수 있다고 집착한 인종차별주의자의 정체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이 문제가 보편적 차원과 맞물리는 지점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에단은 데비를 '마침내 이해해서' 혹은 그녀의 감정 세계를 헤아리고 공감하는 통찰을 통해 그녀를 살려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깨달음, 자신이 곧 타인이라는 깨달음으로 그녀를 살려주었다.
보편성은 곧 '타인'의 보편성이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이웃만 섬뜩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소름 끼치는 존재라는, 알 수 없는 정체성의 심연과 직면한 개인들만이 이 보편성을 지닌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인을 대하면 헤겔의 간결한 지혜를 기억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인의 비밀은 이집트인 자신에게도 비밀이다." 바로 그래서 이웃과 만날 때면 공감하거나 이해하려 시도하지 말고, 마음에도 없는 존중을 가장하는 대신, 너희나 우리나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구나 하며 낄낄대고 웃어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인종차별'을 빗댄 농담을 주고받는 것까지 포함해서).
이런 통찰에서 우리는 이웃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살펴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난한 사람을 이해하고,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감정을 흉내 내려는 부자에게 너는 누구냐고 물어야 한다. 철학자이자 사회이론가인 알렌카 주판치치는 이 문제의식을 아주 간단명료하게 정리했다.
부유한 영화감독이 '시대의 절박한 문제'를 다룰 수 있는지, 다룰 수 있다면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건 미국 영화 「설리번의 여행」(1942)은 프레스턴 스터지스(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가 영화제작자 캐프라와의 공개 논쟁을 도발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스터지스는 '가난한 것이 좋다'는 명제와 잘난 척 이 말을 쓰는 태도를 가차 없이 타파한다. 그리고 철학적으로 대단히 흥미롭게도 스터지스는 일종의 가난의 존재론을 제안한다. 나는 코미디 영화감독 설리번과 그의 집사 버로스 사이에 오간 더없이 유명한 대화를 참조했다. 설리번은 버로스에게 보다 더 현실감이 살아 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거리로 나가 빈곤과 궁핍을 몸소 체험하고 싶다고 말한다.

설리번: 거리로 나가 가난하고 궁핍한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그리고 이 문제를 다룬 영화를 만들 거야. 
버로스: 이렇게 말씀드려도 좋을지 허락하신다면 주인님, 그건 재미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아주 잘 압니다. 그런 주제는 하릴없는 부자나 좋아할 겁니다. 
설리번: 그렇지만 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이걸 하려는 거야.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버로스: 아시다시피 주인님, 부자와 이론가, 물론 이론가는 대개 부자입니다만, 가난을 부정적인 것, 부의 결여라고 생각하죠. 질병이 건강의 결여이듯 말이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님, 가난은 어떤 것의 결여가 아니라, 진짜 페스트입니다. 그 자체로 독성이 강하고, 콜레라처럼 전염되고, 더럽고, 죄악이고 악덕이며 절망입니다. 그저 몇 가지 증상만 꼽아본 겁니다. 가난은 어떤 경우든 멀리해야 하는 것이지 연구 목적의 대상이 아닙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명언이다. 오늘 우리는 이 말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외워 가난에 인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사람이나 가난에 감상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반복해서 들려주어야 한다. 가난에는 결코 어떤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이 없다. 또 우리는 가난을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가난은 독자적 지위를 가지는 존재론적 실체다. 가난은 단지 돈이 거의 없다거나 아예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가난은 어떤 사람의 불운한 상황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단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선량한 부자가 부유함을 누리면서 자기는 가난한 사람과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말할지라도 그는 틀렸다. 우리가 사회적 위상(계급)을 만들었다고 해서 모두 동등한 인간이라는 휴머니티의 영도零度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과 같은 배에 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동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망상이다(네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너의 사회적 지위를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사회적 지위야말로 네가 '정말' 어떤 인간인지를 결정한다. 부자가 실제로 가난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면[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부자에게 돌아갈 길은 없다[달리 선택할 수 있는 대안적 인생이 그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 글자 그대로 다른 인간이다]). 정확히 이 교훈을 설리번은 폭력범으로 몰려 갇혔던 감옥에서, 그러나 공교롭게도 다시 풀려나는 바로 그 순간에 배운다. 전후 사정을 잘 따져보면 그의 석방은 전혀 놀랍지 않다. 설리번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것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경비원을 때려눕혔다. 그 때문에 하층민이 폭력을 저질렀을 때 통상적으로 받는 형벌을 정확히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자 설리번은 곧장 풀려난다. 이런 의미에서 부당함은 개인적 차원의 부당함이 아니다. 부당함은 (신분 증명으로) 즉각 석방이 이뤄지는 것에서 분명해지듯 체제의 부당함이다. 하층민인 다른 죄수는 모두 그대로 감옥에 남지 않았는가(적어도 그들 가운데 몇 명은 설리번보다 더 심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은 얼마든지 정당하다). 영화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계급의 차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이 스터지스가 선량한 부자라는 캐프라의 논리에 가한 불신은 이웃의 '선량함'이라는 논리의 허구성과 딱 맞아떨어진다.

캐프라는 고상하지 않은 가난한 사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캐프라는 고상한 가난한 사람을 아직 만나보지 않아서 그렇다며 일단 만나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고상한 가난한 사람을 만나는 것, 이게 바로 핵심 문제다, 어디에서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이웃도 마찬가지다. 캐프라 같은 선량한 아무개는 '답'을 알리라. '이 삐딱한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웃에 사는 저치가 악당이 아님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웃이 악당인 게 확인되었다면 어쩔 것인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쁘거나, 적어도 더 짜증 나게 만든다면? 그럼 어떻게 하는가? 그냥 그를 잊어버려?

난민을 두고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난민을 만나보았더니 그들도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 곧 조바심을 내고 폭력적이며 요구하는 것이 많은 인간인 데다가 심지어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많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문화에서 온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그래서 우리는 난민과 인도적 동정을 한데 묶는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 난민을 도우려는 자세는 그들이 겪는 아픔에 대한 동정에 뿌리를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돕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 제발 일체의 감상일랑 떨쳐버리자, 그 감상은 대다수 난민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진다. 난민이 우리와 다른 사람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우리와 같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윈스턴 처칠의 말투를 흉내 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많은 경우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비록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할지라도 충분하지 않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요구되는 바로 그것을 행해야 한다.
두 팔을 활짝 펴고 맞아주며, 공감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관대함이라는 최선(우리의 눈에 최선)은 아무리 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런 관대함의 과시가 우리에게 좋은 기분을 안겨준다는 단적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의심을 품어야 한다. 과시는 정작 요구되는 것을 애써 잊으려는 꼼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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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유럽은 무엇을 해야 할까? 프레드릭 제임슨은 최근 해방의 한 형식으로 사회의 모든 분야를 전 세계적으로 군사화하는 유토피아를 제안했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음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지금 그동안 꿈꿔온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풀뿌리 민주화운동을 통한 모든 변화의 시도 역시 결국 실패할 운명이다. 그러므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효과적으로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일종의 '군사화'다. 이는 자율규제 경제의 힘을 무력화無力化시키는 다른 이름이다. 어쩌면 유럽에서 지속될 난민 위기는 정확히 이 가능성을 시험할 기회를 제공하리라.
물론 이 과정이 스스로 아무 문제없이 가동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무엇보다 난민은 식량과 의료 지원을 필요로 한다. 독일이 수십만 명의 난민을 수용하며 예상 밖의 개방성을 보여준 점은 인정한다(물론 독일의 관용의 이면에 2015년 초 그리스를 좌지우지했던 씁쓸한 경험을 씻어내리는 시도가 숨겨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은 든다). 어쨌든 카오스를 다스리려면 범유럽적 협력과 조직이 필요하다. 먼지 이 지역 근처(터키, 레바논, 시리아 해변과 북아프리카 해변)에 난민 수용시설을 세워 난민이 등록과 디지털 관리를 받게 하고, 유럽 등록이 허용된 난민들을 조직적으로 이주시키고, 그들이 체류할 수 있는 곳에 체계적으로 배치할 수 있어야 한다. 군대는 이런 엄청난 과제를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다. 이런 목적에 군대를 활용하는 것은 비상사태나 재앙에 국한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수십 만 명의 난민이 인구 밀접 지역으로 무질서하게 이동하고 있는 것이 비상사태가 아니면 무엇인가. 현재 유럽의 일부가 바로 비상이다.
난민의 수용과 정착의 기준은 분명하고 명쾌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누구를 받아들일 것이고, 몇 명을 받아줄 것인가? 그들을 어디에 정착시킬 것인가? 이는 난민의 욕망―희망(예를 들어 친척이 이미 정착한 곳으로 가고 싶은 욕망)과 각국의 수용력 사이에서 올바른 접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이주의 자유'의 무제한적 권리는 허용될 수 없다. 그런 권리는 난민에게나 그 누구에게나 주어진 적이 없고, 무엇보다 출신 계급과 관련하여―모든 장애를 뛰어넘어 유럽으로 넘어올 수 있는 난민은 그만한 경제적 특권이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다수 난민이 서구의 인권 개념과 양립할 수 없는 문화권에서 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외견상 분명한 관용의 제스처(타인의 특수한 감수성을 상호 존중하는 것)가 결코 분명하게 작동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슬람이 서구의 신성모독적 이미지와 냉소적 유머(두 가지 모두 우리 자유의 일부로 여긴다)를 '수용할 수 없는' 것처럼, 서구 자유주의자도 이슬람의 많은 풍습(일례로, 여성의 복종)을 '견딜 수 없다'고 여긴다. 요컨대, 한 종교 공동체 구성원이 자신의 종교를 겨냥한 직접적 공격을 신성모독 침해로 여기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한 다른 사회의 삶 자체를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경우(그 경우 침묵은 불가능하다), 폭발은 피할 수 없다.―네덜란드, 독일, 덴마크에서 벌어진 호모와 레즈비언을 향한 공격이나, 부르카로 온몸을 두른 여성을 접한 프랑스인들이 이를 프랑스 정체성을 위협하는 공격으로 간주하여 침묵할 수 없다고 한 것도 매한가지다.
그러므로 두 가지에 유념해야 한다. 첫째,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킬 최소한의 규범을 만드는 것이다. '유럽 중심적'이라는 비난을 들을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종교의 자유, 집단적 폭력에 대항하는 개인적 자유의 보호, 여성 인권 등이 그것이다. 둘째, 이 제한 내에서 상이한 생활방식에 무조건적 관용을 행해야 한다. 이런 규범과 소통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가능한 모든 형태의 법적 강제력을 집행해야 한다. 
우리는 진보 좌파에 만연한 인도주의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주문처럼 반복되는 불평과 상황을 윤리화시키는 것―유럽은 공감을 상실했다,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다 등―은 반이 민주의 폭력의 반대급부일 뿐이다. 두 진영 모두 고유한 생화 방식의 수호에 윤리적 보편성이 결여되었다며 이를 회복하자고 가정한다(결코 자명하지 않은 가정이다).
십 년 전의 '주도 문화'* 논쟁에서 보수주의자들은 모든 국가는 하나의 지배적 문화공간 위에 기초하며, 동일 공간에 거주하는 타문화권 사람들은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이런 발언에서 유럽의 새로운 인종차별주의의 전조를 읽고 이를 한탄하며 아름다운 영혼을 연기하는 대신 우리의 추상적 다문화주의가 이런 서글픈 상황을 만든 것은 아닌 지 비판적으로 자문해야 한다. 서로 동일한 방식으로 관계를 공유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다문화주의는 단지 상호 무지와 증오를 법으로 간신히 틀어막는 형태로 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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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itkultur. 원래는 사회 가치관의 합의를 기술한 개념으로 바삼 티비(Bassam Tibi, 시리아 출신 독일 정치학자)가 도입했다. 2000년부터 이민자 문제와 맞물려 의미가 변형되어 다문화주의에 대항하는 반대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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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주의 논쟁은 이미 '주도 문화' 논쟁이다. 그것은 문화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상이한 문화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으며 또 공존해야 하는지, 상이한 관점의 충돌이자, 상이한 문화들이 공존하기 위해 공유해야 할 규칙과 실천을 둘러싼 논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체 우리가 얼마나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거야?'라고 묻는 자유주의자의 게임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들이 아이들을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해도 관용을 베풀어야 할까? 여인들에게 특정 복장을 강요하더라도? 같은 집단의 동성애자를 잔인하게 폭행하더라도? 이 경우 우리는 절대 관용을 보여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여성 인권을 방치할 정도로 지나치게 관대해서도 안 된다. 단순한 관용을 넘어서서 타인과 진정으로 공존하고자 한다면 이 막다른 상황을 돌파할 유일한 방법은 이것이다. 단순하게 서로 존중하는 선에 그치지 말고 함께 투쟁하자고 제안하자.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공동의 문제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해방투쟁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중차대한 과제는 단순한 타인 존중을 넘어서서 서로 다른 문화의 진정한 공존과 융화를 보장해줄 해방의 긍정적인 주도 문 화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해방투쟁이 동일한 보편적 투쟁의 일부임을 분명히 의식해야 한다(반서구 신식민주의 투쟁, 반근본주의 투쟁, 위키리크스와 스노든의 투쟁, 푸시 라이엇의 투쟁, 반유대주의 투쟁과 반극우 시오니즘 투쟁). 여기서 실용적으로 타협할 때 우리는 패배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살 만한 가치를 잃는다.
우리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 난민은 글로벌 경제의 대가다. 인류 역사상 늘 민족 대이동 흐름이 있었지만 주원인은 근대 식민지 팽창이었다. 식민주의 이전,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자율적이고 상대적으로 고립된 지역공동체였다. 식민주의자들이 전통 질서와 생활방식을 뒤흔들었고, 집단 이동을 촉발했다(특히 노예무역).
이민자 물결은 유럽만의 상황이 아니다. 짐바브웨에서 남아공으로 넘어온 1백만 명 이상의 난민은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이유로 현지 빈민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인구 이동은 무력 충돌, 새로운 '테러 지원국', 경제위기, 기후변화로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추세다. 우리는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때 도쿄 전체―2천만 명의 시민―를 소개疎開하려고 구상했음을 알고 있다. 이 시도가 성공했다면 과연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동은 어떤 조건하에서 이뤄졌을까? 우리는 그들에게 한 조각의 땅이라도 내주었을까? 아니, 그들은 그냥 세계로 퍼져 나갔을까?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남부의 거대한 지역이 너무 건조해진 나머지 사람이 살 수 없게 되는 반면 시베리아 북부가 그럭저럭 거주할 만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런 대규모 인구 이동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할까? 과거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때, 사회 변화는 야만적이고 충동적인 폭력과 파괴로 행해졌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가 대량살상 무기를 보유했다는 점에서 최악의 시나리오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인류가 유연한 유목민적 삶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지적―세계적 환경변화는 분명 전대미문의 대규모 사 회 변화와 인구 이동을 불러올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떤 특정 생활방식에 뿌리를 두고 위반 시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를 보호할 당연한 권리를 지니지만 삶의 기본 좌표를 전면적으로 바꿔야 할 역사적 격변이 발생할 수도 있다(아메리카 원주민, 곧 '인디언'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상황을 안정시킬 새로운 생활방식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이런 혼란기에는 국가주권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고하여 새로운 차원의 세계적 협력을 구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기후변화, 물과 에너지 부족으로 일어날 경제와 소비의 대변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누가 이 문제를 결정할 것인가? 누가 어떻게 실천에 옮길 것인가? 이 모든 질문의 답은 '만인에게 평등한 이주의 자유'라는 애매한 용어가 아닌 정교하게 계획되고 잘 조직된 변화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
유럽은 자신의 의무를 자각하고, 난민의 인간적 생존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 타협은 있을 수 없다. 민족 대이동은 우리의 미래이며, 이 의무 외의 유일한 선택은 신종 야만이다(혹자는 이를 '문명의 충돌'이라 칭한다). 그러나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난민 이동 발생의 조건을 제거할 철저한 경제 변혁이다. 난민의 주원인은 글로벌 자본주의와 그 지정학적 게임이다. 이를 철저히 바꾸지 않으면 머지않아 아프리카 난민에 이어 그리스와 다른 유럽 국가의 난민들이 그 뒤를 이을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 공산주의는 공유 재산을 조직적으로 통제하려는 시도를 뜻했다. 아마도, 우리는 이러한 정의를 재발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 우리는 공산주의 이념을 시급한 현안으로 부상시킨 역사적 현실의 적대성을 직시해야 한다. 오늘날 유일하게 진정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계속되는 자본주의 지배를 지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그 무한 재생산을 막을 충분히 강한 적대성을 찾을 것인가? 적대성은 네 가지다. 생태 파국의 위기, 이른바 '지적재산권'의 사유재산화, 새로운 기술―과학 발달이 초래할 사회윤리적 영향(특히 유전공학), 마지막으로 무시할 수 없는 적대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 새로운 장벽과 슬럼이다.
마지막 적대와 앞의 세 적대 사이에는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를 구분하는 질적으로 상이한 간극이 존재한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앞의 세 적대를 공유지*라 칭했다. 이는 사회적 존재의 공유물로, 공유지의 사유화는 폭력적 행위이며, 필요하다면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 사유화에 저항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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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ommons. 생태, 지적재산권, 기술―과학은 사유재산이 아닌 인류의 공유재산이라는 의미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고안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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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공유지는 직접적으로 사회의 공유재산이 되는 '인지' 자본의 형태를 띤다. 주로 언어, 커뮤니케이션 및 교육 도구이며―빌 게이츠가 독점권을 가졌다면 말 그대로 사적 개인이 우리의 기본적인 소통망의 소프트웨어를 장악하는 부조리한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ㅡ, 또한 공공교통, 전기, 우편 등 공유 인프라가 포함된다. 외부 자연의 공유지는 공해와 착취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석유에서부터 숲, 자연 서식지에 이르기까지). 내적 자연의 공유지(인류의 유전자 유산)의 경우, 새로운 유전공학 기술은 말 그대로 인간 본성을 바꾼 새 인간의 출현을 예고한다.
이들 모든 투쟁에는 공유지의 사유화enclosing라는 자본의 논리가 폭주할 때 인류 자체가 자멸할 것이라는 파괴적 잠재성에 대한 자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므로 공유지 논리는 공산주의 이념의 부활을 정당화한다. 공산주의는 공유지의 점진적 사유화enclosure로 인해 여기서 배제된 자들이 프롤레타리아화하는 과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는 공산주의 없이도 공유지를 되돌려 받을 수 있다. 모든 것을 잃은 채 '뿌리를 잃고' 떠도는 주체는 권위적인 공동체주의로 나아가면서 자신의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배제된 자를 하나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들과 어떻게 거리를 둘 것인가를 우려하는 국가공동체보다 더 '사적인' 것은 없다. 달리 말하면, 일련의 네 가지 적대 중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의 적대가 가장 결정적이다. 그 적대 없이는 다른 모든 적대는 체제 전복의 예각을 상실하게 된다. 생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문제로, 지적소유권은 복잡한 법적 다툼으로, 유전자공학은 윤리적 문제로 판결된다. 물론 우리는 포함과 배제 사이의 적대를 직시하지 않고도 진지하게 환경운동을 하거나, 광의의 지적재산권 개념을 옹호하거나, 유전자 복제에 반대할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배제된 자들이 포함된 자들을 위협하는 바람에 이런 운동이 불가피하다고 둘러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우리는 진정한 일반성(보편성)에 이르지 못한다. 칸트적 의미에서 오직 '사적인 문제'에 함몰될 뿐이다.
홀푸드Whole Foods나 스타벅스 같은 기업은 그 노조 적대적인 태도에도 진보의 총애를 받는다. 술수는 진보적 색채를 띠는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정무역 원두커피를 마시고, 하이브리드 승용차를 타며, 고객에게 최대의 혜택(기업이 정한 기준에 따라 주는 혜택)을 돌려준다는 기업의 상품을 산다. 요컨대, 포함과 배제라는 적대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빌 게이츠는 빈곤과 질병 퇴치에 힘쓰는 최고로 선량한 인간이며, 미디어 제국을 통해 수억 달러를 모금하는 루퍼트 머독은 최고의 환경운동가인 셈이다.
이 점에서 난민, 외부 출신으로 내부로 침투하려는 난민은 다른 차원의 위협받는 공유지가 있다는 증거다. 즉 인류라는 공유지 자체가 새로운 장벽과 다른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만들어내는 글로벌 자본주의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오직 이 네 번째 적대, 배제된 자를 직접 드러내는 이 적대가 '공산주의' 개념을 정당화한다. 앞의 세 가지 적대는 본질적으로 인류의 생존(경제적, 생태적, 심지어 물리적 생존)과 관련된 문제인 반면, 네 번째 적대는 궁극적으로 정의의 문제를 제기한다. 인류가 생태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언젠가 우리는 모두 사라지리라. 그럼에도 기존의 사회적 위계질서와 분할과 배제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강화하는 권위적 수단으로 앞의 세 적대를 해결하려는 사회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이 과제를 맡을까? 오랫동안 갈망해온 철저한 사회변혁을 이끌 새로운 혁명가를 애타게 기다려온 좌파 지식인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은 실체에서 주체로의 전환이라는 헤겔 변증법의 분위기를 풍기는 호피족(Hopi. 미국 애리조나주 북부를 근거지로 하는 인디언)의 옛 속담이다. "우리는 우리가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람이다"(이 속담은 간디의 좌우명과 흡사하다. "너 자신이 네가 세상에서 보기 원했던 변화가 되어라").
그런 사람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노력을 방기하는 것은 게으름의 합리화일 뿐이다. 물론 삐뚤어진 자기 도구화의 함정에 빠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람이다'는 말은 우리가 이 과제를 수행할 운명적(역사적 필연성) 인물임을 깨달으라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의지할 위인은 없다는 뜻이다. '역사는 우리 편이다'(프롤레타리아는 보편적 해방이라는 예정된 과제를 완수한다)라고 본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현재의 정황에서는 오히려 우리의 반대편이 거대 세력이다. 역사 발전의 내적 동력은 그 자체를 움직이며 파국과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 그러므로 이 파국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순수한 자발성, 역사적 필연성에 대항하려는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어떻게 보면 내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21년, 볼셰비키는 이와 비슷한 딜레마에 빠졌다. 레닌은 죽기 2년 전, 범유럽적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일국의 사회주의 건설은 망상임이 점차 분명해지던 시점에 이런 글을 썼다.

철저하게 절망적인 상황이 노동자와 농민의 힘을 열 배로 고무시켜 서구 국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문명의 근본적인 필수 조건을 창조할 기회를 우리에게 줄 수 있을까?

바로 이 딜레마가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정부, 아이티의 (지금은 실각한) 아리스티드 정부, 네팔의 마오쩌둥주의 정부, 그리스의 시리자 정부의 딜레마가 아닐까? 그들의 상황은 '객관적'으로 희망이 없다. 역사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그들과 역방향이며, 그들의 노선을 견지하면서 의존할 그 어떤 '객관적 경향도 없고, 절망적 상황에서 단지 할 수 있는 것을 임시방편으로 수행할 뿐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그들에게 다른 무엇보다 하나의 유일한 자유를 준 것이 아닐까? 여기서 '~으로부터의 자유'와 '~을 위한 자유'라는 해묵은 구분을 적용해보자. 역사로부터의 자유(역사적 법칙과 객관적 경향으로부터의 자유)는 창의적 실험을 위한 자유가 아닐까? 그들의 행동은 오직 지지자들의 집단의지에만 의존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 모든 것은 유토피아가 아닐까? 아마 그럴 것이다. 최근 유럽의 극심한 혼란,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무기력한 발언과 최악의 이기적 행태가 보여준 희비극의 혼재, 최소한의 협력도 끌어내지 못하는 무능은 유럽연합의 완벽한 실패 이상으로 유럽연합의 생존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드러났다. 이런 혼란에 대한 좌파의 대응으로, 실망한 여러 급진좌파 사이에 은밀하게 떠도는 것이 있다. 68운동 이후 제기된 무장투쟁의 약화된 형태를 재현하자는 것이다. 이는 재앙(특히 생태적 재앙)만이 대중을 일깨우고 이로써 급진적 해방이 추진될 것이라는 가히 미친 생각이다. 이 광기의 최신판이 난민에게 투사되었다. 이들 급진좌파들은 난민의 대규모 유입만이(유럽이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난민의 환멸까지 포함하여) 유럽의 급진좌파가 다시 활력을 얻을 기회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발상의 논리가 터무니없다고 본다. 엄청난 반이민 폭력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은 논외로 하더라도, 실종된 급진 프롤레타리아를 외국에서 수입하여 공백을 메우고 수입된 혁명분자들로 혁명을 완수한다는 것은 더없는 망상이다.
2015년 상반기에 유럽은 주로 급진 해방운동(시리자, 포데 모스)에 몰두한 반면, 하반기에는 난민의 인도주의적 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계급투쟁은 관용과 연대라는 자유주의적 문화적 주제에 그야말로 압도당하고 밀려났다. 그러나 이 주제(상당한 사회 경제적 문제임에도)조차 11월 13일 파리 테러 이후 모든 민주세력이 단합하여 테러세력과 무자비한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단 하나의 대립에 묻히고 말았다. 이후 전개될 상황은 충분히 예견된다. 피해망상에 젖어 난민 속에서 IS 테러리스트를 찾고, 이민자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며, 자유를 제한하려는 시도가 잇따를 전망이다. 자유의 제한은 IS와의 투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지속적인 비상 상황을 창출할 것이다. 결국 파리 테러의 가장 큰 피해자는 난민이다. "나는 파리다"*는 식의 진부한 구호 뒤에 숨은 진정한 승자는 결국 양측의 전면전을 부추기는 세력이다.
그렇다, 우리는 파리 테러를 심판해야 한다. 그러나 올바르게 심판하자. 테러 반대의 비장한 연대감을 과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간단하게 쿠이 보노** 라고 묻자. 테러로 누가 이득을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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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 suis Paris, 원문은 프랑스어. 파리 테러 이후 등장한 구호다. 
** cui bono. 원문은 라틴어. '누가 이득을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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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테러리스트를 더 깊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너희의 끔찍한 행위는 결국 유럽의 잔인한 간섭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는 그들의 실체 그대로 인식해야 한다. 이슬람 파시즘은 유럽 반이민 인종차별주의의 쌍생아이며, 결국 둘은 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제 우리는 계급투쟁을 다시 의제로 삼아야만 한다. 이를 수행할 유일한 길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를 강조하는 것뿐이다. 이런 전체적 시야 없이, 파리 테러 희생자들과의 비장한 연대감은 윤리의 가면을 쓴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유럽에 도착한 난민의 상황은 무엇 하나 분명한 게 없지만 분명 많은 난민들은 조국의 끔찍한 현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파리 테러가 벌어진 다음 날, 한 난민이 텔레비전에서 무미건조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파리 같은 도시가 이런 비상사태에 빠져 몇 년은 아닐지라도 몇 달 동안 일상생활의 평온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바로 우리가 도망친 곳입니다." 우리는 이 말에 담긴 진리가 번쩍이는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테러리스트와 테러의 희생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이런 세계적인 연대는 유토피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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