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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소설] [풍자] 대한민국 1% 남자들의 속살 이야기,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

by 노지재배 2017.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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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뷰는 소설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이다.


박생강 작가의 이 작품은 신도시 고급 사우나를 통해 보는 세상을 그린 작품으로, 제13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받았다. 본래 제목은 '살기 좋은 나라?'였다가, 단행본 출간을 앞두고 출판사의 요청으로 작가가 바꾼 제목이 바로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이다. 한편,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은 《누운 배》의 도선우 작가가 쓴 《저스티스맨》이 차지했다.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




소설은 대한민국 1퍼센트를 자처하거나, 이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남자 사우나에 매니저로 취직한 소설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학원 강사였다가 소설가가 된 등단 10년 차 작가였지만, 소설로 생계가 유지되지 않자 주인공은 생계를 위해 사우나에 취직한다. 생계를 위해 취업을 했지만, 소설가의 습성일까. 정신없는 사우나 물품 관리와 난데없는 1퍼센트 회원님들 접대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소설가의 눈과 귀에 대한민국 1퍼센트 사람들의 속마음과 속살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한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자신은 본래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먼, 현실과 허구 사이의 발랄한 망상에 기댄 작품을 쓰는 작가"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직접 엿들은 상류층 남자들의 별것 없는 대화나 혼잣말, 누군가와 통화할 때의 속닥거림, 나에게 투덜대며 한 말 등등을 생생하게 소설로 옮기고픈 욕심이 들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 사우나 회원들의 대사 중 70퍼센트 정도는 내가 들은 그대로다."라고 적고 있다.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은 대한민국 1퍼센트 남성들을 그대로 등장시켜 상류층의 허세와 이면을 실감 나게 풍자하고 있다.


출판사의 요청으로 출간을 앞두고 급박하게 바꿨다는 제목인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는 사실 작가가 일했던 1퍼센트 사우나의 실상이었으며, 작품 속 등장하는 무너지지 않는 '보수'를 부르짖는 대한민국 1퍼센트들을 상징하는 위트 있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보증금만 3천만~4천만 원 하는 1퍼센트 남성들의 고급 멤버십 피트니스인 '헬라홀'에서 철저하게 '을'도 아닌 '병'으로 일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헬라홀'은 사실 이 고급 사우나의 진짜 이름은 아니다. 헬라홀은 주인공 태권이 사우나에서 수거한 더러운 세탁물을 세탁실까지 흘려보내기 위해 사용하는 구멍이다.


작가는 이 '헬라홀' 이라는 상징을 통해 대한민국 1퍼센트 남자들의 허세와 속살, 그리고 그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인간군상들을 그려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풍자를 깔고 있는 작품이라서 이야기는 재미있고 우스꽝스럽게 읽힌다. 소설의 지문과 대화 전체에 걸쳐 작가의 위트가 잘 읽힌다. 


대한민국 1% 남성들에 대한 풍자가 궁금한 이들에게, 늘어나는 주름살과 사라져 가는 청춘을 감추기 위해 대한민국 1퍼센트 남성들이 덕지덕지 발라대는 보디로션 이야기,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추천한다.





■ 저자


박생강(박진규)


1977년 경기 파주 금촌에서 태어났다. 2005년 단군신화 설화를 패러디한 호랑아낙을 등장시킨 장편소설 《수상한 식모들》로 제11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며 본명 박진규로 등단했다. 2014년 장편소설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를 출간하면서 박생강이란 필명으로 바꿨다.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로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2012년부터 최근까지 엔터미디어를 통해 대중문화 칼럼 〈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를 연재했다. 




■ 목차



이력서

헬라홀 

이름 없는 병 

대여품 양말 

게으를 권리 

비상사태 

사우나 사나이

정거장

벌거숭이

독재자

운동아재 

정답과 정답 아닌 남자

코털과 콧수염

일꼬의 법칙 

헬라홀의 보르헤스

악착같이

의정부 

살기 좋은 나라

그리고 1년 후


 


■ 책 속으로



"


게으를 권리


(...)


집에 도착하자마자 새로 취직한 직장에 대해 털어놓고 싶었으나 쉽게 말문이 터지지 않았다. 헬라홀이라는 말이 혀끝에서 해롱해롱 맴돌다가 침과 함께 꼴깍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 순간에 확실히 깨달았다. 내 안에 꾹꾹 눌러놓은 부끄러움이 있다는 것을. 아니,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차마 배운 지식인으로서 그 생각을 의식의 표면으로 둥실 띄울 수가 없었던 거지.

아니라고 부정하고 부정해도 나는 이 일이 남자로서 창피했다. 소설가였을 때는 돈을 못 벌어도 창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데도 듬직한 내 어깨가 무언가 부끄럽게 여겨졌다. 고추발에 웅크리고 앉아 잡초를 뽑는 부끄러운 고추의 심정이랄까?

결국 그날 저녁을 먹은 후에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슬그머니 소파에 앉은 아버지 옆에 다가갔다. 아버지는 싫다 좋다 표정 없이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아버지 저......." 

아버지는 넌지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때 나는 50대 중반을 넘어 회갑이 가까워오는 어중간한 공무원의 눈동자를 가까이에서 처음 보았다. 흐리고 탁하고 쓸쓸했다. 나는 그 눈을 피하 고 싶어 절로 고개를 숙이고 말끝을 흐렸다.

"저기 사우나......." 

아버지가 침을 꼴깍 삼키는 동안 나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내 말을 다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우나? 목욕 가자고? 별일이다. 가자, 그러잖아도 오늘 아침에 목욕 가려다 말았는데."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 때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와 목욕탕에 갔다. 명절 전날의 목욕탕 안은 사람들로 미어터져 자리를 잡기도 힘들었다. 탕에는 때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지만, 나와 아버지는 한참을 말없이 탕 안에 앉아 있었다.

교육 기간까지 합쳐 남자 사우나에서 일한 지 거의 일주일이었지만 탕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히노끼탕, 열탕, 냉탕, 아이템탕까지 있었지만 우리에게 그곳은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우리에게 허용된 곳은 서서 씻는 샤워대가 전부였다. 팀장은 그것도 가장 구석자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빨리 씻으라고 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어이없게도 뜨뜻한 탕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 대단한 호사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눈을 감고 편안하게 온탕을 즐길 수도 없었다. 동네 목욕탕은 내가 일하는 헬라홀 남자 사우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조막만 한 아이들이 소리 지르며 목욕탕 끝에서 끝으로 뛰어다녔다. 젊은 아버지들은 그런 애들을 붙잡아 억지로 씻기느라 난리였다. 그러면 또 아이들은 엉엉 울고 난리도 아니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젊은 아버지들 중 몇몇은 나와 비슷한 또래인 것 같기도 했다.

탕에서 나온 나와 아버지는 자리에 앉아 서로를 보지 않고 묵묵히 때만 밀었다.

"등 밀어드려요?"

나는 퉁명스럽게 아버지에게 말을 붙였다. 헬라홀의 노인들에게는 어느새 친절하게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입버릇이 되었지만 정작 아버지에게는 그게 안 됐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머리 없는 녀석이라고 핀잔만 들었으니 정이 싹틀 리가 없지.

"아니 됐다. 네가 때나 제대로 밀 줄 알겠냐?"

그러더니 아버지는 내 어깨를 툭 쳤다.

"너나 돌아앉아라."

나는 멋쩍게 아버지에게 등을 대고 돌아앉았다. 그리고 생각하는 사람 동상처럼 턱을 괴었다.

아직 고백하기에 제대로 된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처음에는 폭탄선언으로 아버지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나 정작 얼굴을 마주하니 그게 안 됐다. 자그마한 고추를 달고 다니는 다섯 살짜리 아들을 데려오는 젊은 아빠들 중 먼 훗날 내 새끼가 목욕탕에서 땀 뻘뻘 흘리며 일하게 될 거라 상상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렇게 생각하니 열심히 내 등을 미는 아버지가 조금은 안쓰럽게 여겨졌다. 아니, 그릴 뻔했지만 그러기엔 등이 너무 아팠다.

"아 씨발 그만 좀 벅벅 밀어요. 너무 아프잖아요."

"이런, 이놈이 말버릇하곤. 이 때 좀 봐라." 

아버지가 불쑥 때 묻은 때수건을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씻기를 싫어하더니. 도대체 목욕탕에는 몇번이나 가나? 1년에 한 번은 가나?"

"아니, 매일 갑니다. 매일 가요. 거기서 아버지보다 잘난 영감탱이들 시중듭니다."

때수건을 손에 낀 채 아버지가 두 눈을 껌뻑거렸다. 때수건에 묻은 굵직한 덩어리들이 미처 내밸지 못한 욕설처럼 느껴졌다.

에이, 씨발, 좆같잖아.

목욕탕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아버지는 별말이 없었다. 우리는 설날 전날의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그저 걷기만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파트 단지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헛기침을 했다.

"잘했다."

"뭐가요?" 

"네가 한 일 중에 제일 잘한 거야. 몸으로 일하니 얼마나 떳떳하게 돈 버는 일이냐."

나는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지금까진 제가 뭐 사기 쳐서 돈 빌었어요?"

"허황된 말로 돈 벌고 거짓말로 쓴 글로 돈 벌고 내가 보기에 그건 땀 흘려 번 돈이 아니야."

"저 옛날에는 그래도 잘나가는 논술 강사였다고요. 대치동에서 오라는 제안까지 받았어요. 그때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바람에 그쪽으로 가지 않아서 그렇지."

아버지는 여전히 내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채근담』에 이런 명언이 있다. 달인은 물욕에서 벗어나 진리를 보고, 죽은 후의 명예를 생각한다. 차라리 한때 적막하게 지낼지언정 평생 처량하게 보내지는 말아라."

나는 아버지가 왜 뜬금없이 『채근담』의 명언을 인용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내가 남을 가르치려면 물욕에서 벗어나고 진정한 명예를 생각할 줄 아는 달인이 되어야 하는 거야. 그게 진정한 스승이지. 어쭙잖은 스승은 기껏해야 허황된 말로 귀가 얇은 학생들을 현혹시키는 게 전부인 거지."

나는 아버지의 말이 귓구멍에 붓글씨로 쓰는 글씨 같아 무언가 간질간질하기만 했다. 그래서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파며 말했다.

"참, 그런 사람만 스승이 될 수 있으면 학원 바닥에서 강사 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을걸요."

나는 찬바람 부는 허공에 대고 손톱에 낀 귓밥을 후 불어 날렸다. 

더구나 내가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학원 강사를 그만둔다고 할 때는 펄펄 뛰던 양반이었다. 그때 일은 까맣게 잊고 진정한 스승 운운이라니.

"하여간에 딱 1년만 적막하게 지내라. 친구한테도 미안하다고 말하고."

"아...... 그럴게요."

아버지가 말하는 친구는 나와 함께 사는 여배우는 아니었다. 그건 잠시 빈방을 빌려준 가상의 친절한 대학 동창이었다. 나는 차마 사귀는 여자와 함께 산다는 말을 부모님께 하지 못했다. 그걸 말하는 순간 일이 상당히 복잡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까요?"

"공무원 시험 준비해야지. 고생해보면 너도 알게 될 거다. 알아서 공무원 시험 준비하게 될 거다. 이제 겨우 서른 넘은 나이니 아직 안 늦었다."

그렇게 말하고서 아버지는 앞서 걸어갔다. 바람이 찼다. 나는 점점 작아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다 투덜거리며 뒤따라갔다.

그날 밤 자정 무법 목이 말라 방 밖으로 나왔다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버지는 목을 아래로 푹 꺾고 있었다. 그리고 발로 베란다의 화분들을 툭툭 차고 있었다. 게으를 권리는 생각 않고 열심히 달려온 사내의 초라한 모습에 괜히 착잡해졌다. 더구나 그게 게으를 권리를 풍족하게 누리는 이들을 위해 일하는 아들 탓이라니.


"



.

.

.



"


사우나 사나이


(...)


금방 새로운 근무자가 들어올 거란 팀장의 말과 달리 보름이 지나도 전화 문의만 올뿐 면접 보러 오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 사이 나는 어느새 소설가 스타일에서 사우나 스타일로 변한 지 오래였다.

걸음걸이는 팀장처럼 빨라진 지 오래였다. 세탁물을 수거하는 시간은 처음보다 반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팀장이 없으니 비눗물이 튀건 말건 상관없이 후다닥 목욕탕의 젖은 거품 타월을 걷어서 그렇기도 했다. 운동복과 바지를 수납장에 쌓다가도 바닥의 물기를 발견하면 재빠르게 양말로 닦아냈다. 다행히 상황이 상황이라서 내 운동복 정돈 솜씨가 엉망이라도 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팀장과 내가 만나는 시간은 하루에 고작 10여 분이었다. 내가 출근하면 팀장은 퇴근 준비에 바빴다. 그런 팀장을 붙잡고 오늘은 지원자가 없느냐고 간절히 묻는 것 또한 새로운 내 일상 중 하나였다.

"오늘도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요? 아니, 그때 그 어르신한테 연락을 해보시지 그래요. 요즘은 환갑 넘어도 다 청춘이잖아요"

"이력서 보낸 분은 환갑이 아니라 칠순이었어요. 게다가 이제 여기 회원님들이 우리처럼 젊은 남자들에게 수발받는 데 익숙해져서......."

"조선족 남자들은 어때요?" 

"회원님들이 정말 싫어하세요. 예전에 한번 채용했다가 항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보냈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다 와서 그랬나 눈치 없이 회원님들께 말을 많이 걸었대요. 회원님들은 그 특유의 말투도 싫어하고요. 하지만 사실 그냥 싫은 게 거겠죠. 여기는 평범한 남자들이 오는 데가 아니라 1퍼센트를 위한 곳이니까."

그는 늘 강조했다. 그런 까다로운 조건이라서 여기서 일할 만한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고. 더구나 월급도 짜고 여탕에서 일하는 것도 아닌데 마음 바쳐 여기서 일할 사람이 나타날 리 없다면서.

"이아고 얼마나 잘난 사람을 기다리시는데요?"

"사실 너무 잘난 사람도 피곤합니다."

"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잘난 사람들이 여기서 일하겠어요?"

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있었어요. 별 셋이라고."

"장교예요?"

"아니, 삼성 임원이었다가 명퇴한 양반. 우리끼린 별 셋이라 그랬어요. 뭐가 그렇게 잘났는지 맨날 수첩 들고 남자 사우나 안이나 돌아다니고."

"수첩을 어디다 써요?"

"뭐, 헬라홀 피트니스의 문제를 분석한다며 수첩에다 뭔가를 적더라고요. 보고서 만들어서 윗선에 올리고. 정작 운동복 정리는 엉망이었어요."

하기야 팀장 눈에는 아무리 엘리트 사우나 매니저라도 운동복을 각 맞춰 쌓지 못하면 형편없는 직원으로 보였겠지.

"그러다가 1년 후에 회사 차원에서 정리하더라고요. 그사이 회원 관리실에 항의가 많이 들어갔거든요." 

전직 삼성 임원이었던 남자는 오전 업무가 끝나면 대놓고 히노끼탕에 들어갔다고 한다. 탕 안에 있던 홀딱 벗은 회원님들은 그 모습에 경악했을 게 틀림없었다. 이곳에서 사우나 매니저는 탕에 들어갈 수 없다는 암묵적인 규칙을 대놓고 위반했으니까. 회원님들께 눈치 없이 삼성 시절 일화를 이야기하다 비웃음을 산적도 여러 번이라고 했다.

"그래도 너무 심하네요. 겨우 그런 걸로 자르고."

"그것도 그건데 이혼남이라서."

"이혼이 죄예요?"

"죄는 아닌데 자기 이혼남이라 외롭다고 밤마다 프런트 여직원들에게 문자를 보냈나 봐요. 놀러 올 생각 있으면 놀러 오라고 술 한잔 하며 대기업 문화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주겠다고. 아이고, 프런트 여직원들이 팀장 빼고 다 20대 초중반인데 주책이지 삼성 시절엔 그런 게 먹혔을지 모르지만 주제도 모르고."

아마 별 셋 양반은 뒤통수까지 철판인 남자일 것 같았다. 남들이 뒤에서 흉보는 일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꼰대들 말이다. 그런 인간들은 대개 뒤통수를 얼얼하게 얻어맞고 난 뒤에야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깨닫는다.

나는 작업복 바지와 셔츠로 갈아입었다. 발목이 무지무지 늘어나 회원님들은 절대 신지 않는 양말도 골라 신었다.

"하여간에 사람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이게 진짜 사나이가 할 일도 아니고."

"그럼, 뭐 우리는 가짜 사나이예요?" 

"우린 뭐 진짜 사나이가 별거 아니라는 걸 아는 사나이 정도로 해두자고요. 그럼, 태권 씨 오늘 하루도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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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거장


팀장은 그 남자의 채용을 조금 꺼리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 지원한 사람은 사우나의 달인이었다. 환갑 가까운 나이의 그 남자는 사우나에서 일한 경력만 30년이었다. 그리고 최근 10년간 대치동의 한 고급 피트니스 남자 사우나에서 일을 했다. 그 남자가 이리로 오면 하찮기는 하나 사우나 매니저 간의 권력 위계가 팀장에게서 달인으로 넘어갈 확률이 꽤 높아 보였다.

"거기는 수건이 모자라거나 운동복 바지가 늘어나 있거나 하진 않겠죠?"

"하지만 거기에도 양말 도둑이 있을 겁니다. 반드시."

"그 좋은 곳에서 왜 여기로 이직을 해요?"

"지금 일하는 피트니스가 곧 폐업한대요."

팀장의 말에 따르면 사우나가 망하면 사우나 매니저는 개털이라고 했다. 이 일이 그다지 대단한 기술을 요하는 직업은 아니라서 대단한 경력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았다. 최악의 경우 다른 사우나에서 일자리를 얻어도 월급은 똑같이 초봉이라고 했다.

"자기 발전에 눈곱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일이죠. 그냥 급한 사람들이 스쳐가는 정거장이라고요."

"정거장이요?" 

"여기서 기다리는 거죠. 더 좋은 일을 찾기 전까지만.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태권 씨나 나나 미련 없이 여기를 떠나는 거지. 그런데 마혼 훌쩍 넘은 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우리 둘이 서 있는 창고방 안은 낡은 정거장의 대합실보다 좁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면도크림, 치약, 대여용 양말보다 계급이 낮은 존재인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자 무언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태권 씨, 나는 갑니다. 오늘도 수고하세요."

팀장도 착잡한 마음이 드는지 재빠르게 창고방 문을 열고 사라졌다.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창고 밖으로 나와 복도를 가로질러 로커룸으로 향했다. 그사이 슬리퍼를 벗고 두 번이나 재빠르게 양말로 바닥의 물기를 닦아냈다.

"안녕하세요." 

나는 땀에 젖은 운동복을 벗고 있는 회원님께 인사하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 남자는 1퍼센트의 아르마니 펜티였다. 얼마 전 그가 운동복과 함께 아르마니 팬티를 던져 넣는 바람에 세탁실까지 내려가서 팬티를 찾아주어야 했다. 슬쩍 보니 오늘은 버버리 펜티였다. 버리 팬티를 흘랑 벗어 조심스레 옷장에 넣은 회원님은 엉덩이를 씰룩이며 목욕탕으로 향했다.

어쩌면 헬라홀 남자 사우나는 대한민국 1퍼센트 남자들의 정거장 역할도 하는지 몰랐다. 물론 우리들처럼 더 좋은 행운의 날을 꿈꾸며 잠깐 머무는 정거장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1퍼센트 남자들은 아무리 유세를 떨어도 폼은 안 났다. 명품 셔츠에 명품 등산복을 입고 들어와도 다들 후줄근한 운동복으로 갈아입어야만 했다. 사우나 곳곳에서 마주치는 그들의

알몸 또한 그다지 명품은 아니었다.

갑의 사내들은 희한하리만큼 이곳에선 힘을 주지 않았다. 


(...)


다만 그들 모두 여기 이곳에서는 도드라지려 애쓰지 않았다. 그들 모두 사우나의 규칙에 순응했다. 남자 사우나란 원래 땀을 빼고 발기하지 않은 채 벌거벗고서 아무 생각 없이 축 늘어져 있는 남자들의 유일한 공간이니까.

그렇기에 가끔은 헬라홀 남자들의 한숨을 엿볼 수도 있었다. 그런 광경은 특히 파우더룸에서 벌어졌다. 그들은 거울을 바라보며 서글픈 표정을 짓다가 세면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그 가방의 지퍼를 여는 순간 헬라홀 남자 사우나의 파우더룸은 그들을 위한 정거장으로 변했다.

이곳 헬라홀 정거장에서 헬라홀의 회원님들은 세월을 거스르려 애썼다. 일흔 훌쩍 넘어 보이는 노인이 눈가에 주름 방지 크림을 바르는 걸 나는 여기서 처음 보았다. 손걸레로 거울을 닦으며

훔쳐보니 글자가 모두 자잘한 외국어였다. 중년의 사내들은 탈모 방지 토너를 머리에 뿌리거나 대여섯 개 정도 되는 화장품을 차근차근 얼굴에 발랐다.


(...)


하지만 내가 보기에 격을 떠나 헬라홀 남자 사우나의 노인들은 대부분 보디로션을 좋아했다. 그게 꼭 피부가 건조해서만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늙고 볼품없어진 몸에 보디로션을 바르며 헬라홀의 노인들은 무언가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무리 갑이라지만 중장년의 갑들과 달리 노년의 갑들에겐 대개 가난의 그늘이 느껴졌다. 파우더룸 청소를 하다 보면 뜬금없이 일사후퇴와 육이오 전쟁 꿀꿀이죽 이야기가 그들 사이에 화제로 오르기도 했다.

배곯던 시절의 그늘이 마음의 허기로 새겨졌는지 헬라홀의 노인들은 헬라홀 남자 사우나에서 그 허기를 마음껏 채웠다. 자기 물건은 악착같이 아끼고 공공의 물건은 어떻게든 마음껏 쓰는 행동으로, 헬라홀의 노인들이 모여드는 시간에는 그래서 파우더룸 바닥이 반질반질했다. 다들 발바닥까지 보디로션을 바르고 돌아다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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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독재자의 만찬에 초대받은 헬라홀 피트니스 직원들은 꽤 수가 많았다. 헬라홀 피트니스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부장, 전직 교사 출신의 골프연습장 팀장, 새벽기도의 힘으로 모든 업무의 고통을 인내하는 여자 사우나 팀장, 여전히 90년대 마돈나 스타일의 물결 머리를 고수하는 수영장 팀장, 전직 여자 농구 선수 출신이 아닐까 의심되는 나보다 키가 큰 회원관리실 팀장 일란성 쌍동이 공룡 같은 헬스클럽 트레이너 둘, 프런트 여직원 팀장과 센 언니 캐릭터의 여직원 한 명. 그리고 소설가, 아니 신입 사우나 매니저가 이곳에 함께였다.

하지만 이발소 사장님은 여기 초대받지 않았다. 그분은 개인사업자였기에. 대형 세탁건조기 탓에 사계절 내내 실내 평균 기온이 35도인 지하 세탁실에서 일하는 반장님도 올 수 없었다. 그분을 관리하는 건 헬라홀이 아닌 용역회사였기에. 사우나나 골프장 설비만이 아니라 헬라홀 타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맥가이버 부대 방제실 직원들도 여기 없었다. 그들은 지금도 헬라홀 타워 어디선가 나사를 조이거나 전기 배선을 살피고 있을 터였다. 아니 늘 문제가 터지기 일쑤인 헬라홀 남자 사우나 사우나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무언가를 고치고 있거나. 피부관리실 원장도 여기 올 수 없었다. 그녀 역시 개인사업자였다. 팀장 말에 따르면 그녀는 마사지만이 아니라 화장품 판매로 헬라홀 회원들의 지갑을 탈탈 털어 가는 능력자지만, 회장님에게 늘 빳빳이 턱을 들어 심기를 거스르는 인물이라고 했다.

"자. 이렇게 모인 김에 내 한마디 한다."

큼지막한 탕수육 하나를 집어 입에 넣은 그대로 나는 독재자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독재자는 다시 한 번 큼큼거렸다. 나는 커다란 고깃덩이를 몇 번 씹지도 못하고 목으로 넘겼다. 목이 따귀를 맞은 듯 아렸다.

사실 다른 사람은 일절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식탁에 앉아 바로 수저를 드는 게 아니라 회장님의 훈화 말씀이란 의례가 있는 거였다.

"큼큼 알고 있을 거야. 큼큼, 요즘 우리 피트니스에 회원들 탈퇴가 늘어나고 있다."

직원들은 고개를 폭 숙인 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 그 이유가 뭔가?"

헬사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회장님, 그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경기가 다 불경기고……."

"불경기? 이 동네에 불경기 그딴 게 어디 있어!"

그러더니 곧이어 헬스클럽 트레이너들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놈들아, 너희들 몸만 키울 줄 알지 회사를 키운다는 생각을 왜 못 해! 큼큼, 내가 회의 시간에 누누이 말했잖아. 자기가 관리하는 회원 통해서 새 회원들 유치시키라고, 큼큼큼큼."

"회장님, 그게 말이 쉽지 안 쉬워요."

"다들 지갑 여는 데 얼마나 인색한데요."

트레이너 둘이 짧게 한마디씩 했다.

그 짧은 대답이 독재자의 부아를 돋운 모양이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어! 쉽지 않으면 연구를 해야 할 것 아냐, 응? 큼큼큼, 내가 너희들 매일 시간 날 때마다 휴대폰 보는 거 모를 줄 알아? 앞으로, 큼큼, 헬스클럽이건 프런트건 큼

큼, 골프연습장이건 멀뚱히 휴대폰 보는 거 다 금지야. 그리고, 큼큼. 한 달에 한 명씩 회원 유치시키는 거야. 그러기 싫다? 그럼 나가. 밥값을 못 하면 너희들이 있을 이유가 뭐가 있어?"

나는 회장이 흥분해서 떠드는 동안 밥맛이 뚝 떨어졌다. 배는 고픈데 거창한 요리 앞에서 밥맛이 떨어지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제야 소화제를 챙기라던 팀장의 말이 이해가 갔다. 

"자, 회장님 말씀 잘 들으셨죠. 나나 회장님이나 여러분의 노고에 늘 감사하고 있어요. 그럼, 이제 만찬 시작할 데니 식사 즐기도록 하세요."

독재자의 사모는 문화센터에서 에티켓 교육이라도 받은 듯한 말투와 몸짓으로 우리에게 명령했다.

속이 부대끼는 만찬이 끝난 후에 회장은 사장과 긴히 할 말이 있다며 그를 붙잡았다. 그 바람에 행사장만 남고 우리들만 먼저 독재자의 아파트를 떠났다.

"회장 할아버지 도대체 왜 그런데? 우리가 뭐 거기서 밥 달라고 그랬나? 밥을 주려면 밥만 주지 왜 잔소리를 쌍으로 끼얹고 지랄"

프런트 팀장과 함께 온 센 언니 여직원이 돌아가는 길에 계속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호응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기운 빠진 얼굴로 일렬로 헬라홀 타워를 향해 걷기만 했다. 상황이 그러니 나라도 나서야겠다 싶었다.

"뭐, 그게 다 괄약근 때문일 수도 있죠."

내 말에 사람들이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아니, 신문에서 봤는데 노인들이 신경질이 많아지는 이유 중 하나가 괄약근 때문이래요,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게 마음대로 안 되면 만사가 짜증이 나잖아요."

내 말에도 사람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직원이 팍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 피부관리실 원장 언니한테 들었는데 회장님 마사지실에서 대형사고 치셨대요. 새로 온 어린 직원한테 전립선 마사지 안 되냐고 물었다 슈퍼 울트라 개망신. 여직원 울면서 나가고 원장 언니 그딴 소리 할 거면 여기 출입금지시킬 거라 협박. 그리고 사모님한테도 말할 거라면서 내쫓았대요. 아마 벌써 사모님 귀에 들어갔을걸요. 그래서 오늘 더 기분이 최악이셨던 듯. 어쩌면 사모님께 몇 안 남은 머리털 뽑히신 듯."

다른 사람들 모두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지었지만 감히 독재자를 흉보지는 못했다. 회장님의 왼팔 격인 부장이 옆에 있었으니까.

"자, 이제 그만들 하고 얼른 들어갑시다. 업무 복귀들 하셔야죠."

부장의 말에 멈춰 있던 사람들은 다시 일렬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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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과 정답 아닌 남자


그때였다. 저쪽에서 정답 아닌 허물이 하나 나타났다. 헬라홀의 남자가 몰티즈 한 마리를 몰고서 홀로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올 때마다 사우나 매니저들에게 냉탕과 온탕의 온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눈을 부라리며 투덜대는 1퍼센트의 트집이었다.

"히노끼탕 온도 봤어요? 39도가 아니라 38도잖아요. 여기 규정이 원래 39도 아닙니까? 내가 여기 회원으로 다닌 지 10년째야. 규정이 39도 확실해. 냉탕은 또 왜 그럽니까? 왜 이렇게 온도가 높아요! 내일 이 시간에 와서 다시 온도 확인해보겠어요."

1퍼센트의 트집은 존댓말이 얼마나 재수 없게 들릴 수 있는지 확인시켜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산책로의 이 남자는 제멋대로 앞서가는 몰티즈에 몸을 맡긴 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자. 따로! 가자, 따로!"

몰티즈의 이름이 따로인 모양이었다.

나는 눈이 마주치기 전에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사실 헬라홀 바깥에서 헬라홀의 회원님들이 출몰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았다. 한 도시에 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쇼핑몰에서, 지하철역에서, 길가에서 그들은 뜬금없이 나타났다. 그렇다고 내가 헬라홀의 남자들을 보자마자 상류층 좀비를 보듯 놀라 도망치는 건 아니었다.

생각해보라 사실 내가 그들을 피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들과 마주치면 째째한 복수를 하곤 했다. 사우나 매니지에게 친절한 회원님에겐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귀찮게 구는 회원님들은 물끄러미 쳐다보고 그냥 지나갔다. 우리는 헬라홀에서나 갑과 병의 관계이지, 길거리에서 만나면 그저 군중의 일원일 따름이니까. 그들 또한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고 서둘러 나를 피해 갔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나는 1퍼센트의 벌거벗은 모습을 코앞에서 본 것 같은 이상하고 민망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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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털과 콧수염


"이상해. 여기 헬라홀 이발소는 왜 코털을 콧수염이라 그래?"

어느 날 영수가 창고방에서 내게 물었다.

"코털이 콧수염이래?"

그건 나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나는 그날 파우더룸을 청소하며 슬쩍 이발소에 신경 썼다. 여기서 일하면서부터 희한하게 고막이 도청기로 샤샤샤 변하는 듯했다. 아마도 창고방에서 쉴 때도 스테이션 전화벨 소리나 회원님들이 사우나 매니저를 찾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애써서 그런지 몰랐다. 하여간에 이제는 헬라홀 곳곳에서 회원님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까지 귀에 똑똑하게 들렀다. 회원님들이 헬라홀 밖의 누군가와 히히덕대는 통화 내용까지 전부 들리는 날도 있었다. 엿들어서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귀로 흘러 들어왔다.

언젠가 로커룸에서는 이런 말이 들려왔다.

"너 '용사'라고 아냐? 모른다고? 돈만 벌지 말고 인기 있는 건 좀 보고 살아라, 이놈아. 응답하라, 1994 보니까 이런 생각 들더라. 내가 왜 그때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을까. 어차피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뭔가 억울하고 막 그렇더라고."

통화 내내 낄낄대던 회원님은 전화를 끊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고 주먹으로 로커 문을 내리쳤다.


(...)


그리고 이발소의 사장님은 정말 영수의 말대로 회원님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회장님 콧수염이 좀 자랐네요. 제가 잘라드릴게요."

그러고서 엄지와 검지로 콧방울을 잡은 다음 작은 가위를 콧구멍에 스윽 집어넣었다.

물론 그 호호백발 회원님에게 콧수염은 없었다. 콧구멍 밖으로 무람하게 빠져나온 몇 가닥의 코털만 있었겠지.

나는 그날 오후 출근한 팀장에게 헬라홀의 코털이 콧수염인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래요? 그건 나도 처음 알았네. 그런데 그게 왜 그리 궁금하죠? 코털이건 콧수염이건 우리하고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우리가 회원님들을 코털이나 콧수염으로 부를 일도 없는데."

다음 날에 출근한 나는 영수에게 알려주었다.

"네 말이 맞더라고. 코털이 여기선 콧수염이야.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한 건데?"

창고방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영수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그냥 그거 좀 웃겨서. 내가 밋밋한 얼굴이라 대학 때 잠깐 콧수염 길렀거든. 그때 다들 코털 존 깎으라고 구박했어. 그런데 여기는 코털마저 콧수염을 대접받는 세상이네, 되게 신기하다. 뭐 그래서."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영수의 평균 수면 시간은 하루에 세 시간 남짓이었다. 그는 꿈속에서 아장아장 걷는 딸을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꿈꿀 여유조차 없다고 했다. 영수는 목욕탕 출입구 발매트 위에 덧씌우는 커다랗고 도톰한 분홍 수건을 베개 삼아 다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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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착같이


영수는 오토바이 사고로 오른쪽 다리뼈가 부서지는 바람에 두어 달은 쉬어야 했다. 병문안을 간 내 앞에서 영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팔자 늘 재수 없는 팔자라면서, 전날 오랜만에 딸과 놀아주느라 영수는 꼴딱 밤을 새고 헬라홀에 출근했다. 그러나 헬라홀 일을 마치고 다시 배달 일 하러 오토바이를 타고 족발집으로 향하다가 살짝 졸았던 것이리라. 그때 그는 헬라홀 남자 사우나 히노끼탕의 뜨듯한 물에 편안히 몸을 담그는 꿈을 꾼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탕에서 발이 틱 미끄러지는 순간 감이 왔지. 이건 헬라홀이 아니고 길바닥이고, 나는 오토바이 사고로 다칠 거라는 걸."

그런 상황에서는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해. 나냐, 오토바이냐. 넘어질 때 내 몸을 지키려고 하면 오토바이가 망가져, 반대로 오토바이를 지키려고 하면 내가 다치고. 그런데 내가 깜빡한 거야. 내가 늘 재수 없는 놈이었다는 걸. 빗길에 넘어지면서 오토바이에 깔려 다리뼈가 산산조각 나는 사고는 그렇게 흔치 않거든."

당연히 헬라홀은 영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영수는 대신 그가 배달 일을 하는 족발집에 산재 신청을 했다. 하지만 족발집 사장은 산재 처리를 해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영수 의 사고가 헬라홀과 족발집 사이의 도로에서 일어났으니 족발집에서 처리해줄 이유가 없다는 거였다.

어느 날엔가 헬라홀로 영수의 전화가 걸려왔다. 영수는 자신의 상황이 억울한지 한참을 떠들었다.

"나 어떻게든 산재 처리받을 거야. 악착같이, 내가 헬라홀 남자들한테 배운 게 그거야. 악착같이 챙기는 거."

하지만 영수가 요구하는 건 당연한 권리이지 악착같이 챙겨야만 하는 권리가 아니었다. 그게 좀 슬폈다. 당연한 권리를 위해 악착같이 굴어야만 한다는 현실이. 겉으로는 여유를 부리면서도 잇속을 챙기려고 뒤에서 악착같이 구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영수의 퇴사는 안타까웠지만 헬라홀 남자 사우나에 기쁜 소식도 들려왔다. 독재자가 곰팡이 핀 천장을 다 뜯어내기로 결정했다는  뉴스였다. 


(...) 


나는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이었다.

"술 한잔 할래? 나 10시면 일이 끝나는데, 편찮으면 이리로 올래?"

"헬라홀에?"

"헬라홀에, 피트니스 영업시간이 끝나면 그때부터 남자 사우나는 오로지 사우나 매니저의 세계라서. 여기서 맥주 한잔 같이 하자."


그날 밤 사우나 정리를 모두 끝내고서 작업복을 벗고 내 옷으로 갈아입었다. 나는 남자 사우나 밖으로 나가 프런트 앞에서 서성이며 공을 기다렸다. 헬스장 트레이너와 프런트 여직원들까지 모두 퇴근한 헬라홀 안은 을씨년스러웠다. 조명은 그대로였지만 텅 빈 유령도시의 컨트롤 타워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헬라홀 빌딩을 빠져나가도 온통 이 도시가 괴괴할

것 같았다.

잠시 후 편의점 비닐봉지를 든 공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나는 그녀가 의기소침한 모습일 거라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공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뭔가 후련한 얼굴이네?"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 거기다 나 남자 목욕탕에 정말 오랜만에 와본다."

"오, 설렌다는 거네?"

"설렐 거야 있겠어. 일곱 살 때까지 아빠하고 같이 목욕탕에 다녔는걸 그때 이미 엄마가 집에 없었으니까. 보통은 할머니하고 다녔지. 어쩌다 한 번씩 아빠가 나를 데려갔어. 그냥 그런 기억이 야. 딱히 좋은 추억도 아니고, 몇 안 되는 손톱 밑의 때 같은 아빠와의 추억."

공은 그렇게 말하고서 씁쓸하게 웃었다.

"자, 이제 아빠 아닌 남친하고 남탕에 다시 들어가 볼까?"

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자 공은 슬그머니 내 손등을 간질였다.

"그냥 오라니까 온 거거든. 거리도 가깝고. 남탕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여자가 어디 있는 줄 알아? 그 반대야 엄청 많겠지만."

나는 가끔 신규 회원님에게 투어를 시켜주듯 그녀를 데리고 개인 사물함과 로커룸, 그리고 목욕탕 안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말없이 무심하게 내 뒤를 따라다녔다.

"태권은 정말 여기 탕 안에 들어가면 안 돼?"

공이 히노끼탕 앞에 멈춰 선 채 물었다. 

"안 되지. 헬라홀의 회원님이 아닌 남자는 못 들어간다고."

"들어가면 누가 나타나서 어흥 잡아먹나? 아니면 헬라홀의 회원님들에게 집단으로 두들겨 맞아?"

나는 누가 듣는 것도 아니건만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우리는 헬라홀 목욕탕의 비밀을 알아."

"비밀?"

가끔 탕 안에서 1퍼센트의 노인들이 실수로 약간의 응가를 흘릴 때가 있다고 그러니 뭐 아무리 희석된들 똥물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진 않지."

공은 내가 일하는 헬라홀을 별로 특별하게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어찌 보면 그건 당연했다. 헬라홀의 회원님들이 다 떠나간 이 곳은 겉만 번지르르한 자그마한 목욕탕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공은 천장을 뒤덮은 시커먼 곰팡이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걸 보니 여기가 그다지 위생적인 장소라는 생각은 안 든다."

"좀 더럽지?"

"좀이 아니라 많이 더러워. 그런데 여긴 왜 저렇게 시커멓게 곰팡이가 피었을까?"

"그게 천장이 철판으로 되어 있어서 녹이 스니 페인트로......." 

"아니 내 생각엔 마음의 독기 때문에 목욕탕 천장이 까맣게 된 거야. 탕 안에 들어간 사람들의 마음에서 독기가 빠져나와 천장에 찰싹 들러붙은 거지."

공은 무대 위의 여배우처럼 한참이나 그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 남자 사우나에서 가장 볼 만한 게 곰팡이 슨 천장이라는 듯. 여배우인 그녀의 쓸쓸한 눈빛과 일그러진 입술만으로 정말 곰팡이는 마음의 독기가 엉긴 그로테스크한 흔적인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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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좋은 나라


그날 오후 세탁물을 수거해서 나가려다 사우나 입구에서 일꼬 회원님과 마주쳤다. 그는 정장 차림에 골프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홈, 옷이 바뀌었네?"

"독재자...... 아니, 회장님이 바꿔주셨습니다."

"그래, 깔끔하고 좋아. 뻘겋고 두꺼운 옷보다 낫네. 그거 입고 있으면 꼭 매운 라면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애들처럼 보였다고."

"이 옷이 얇아서 훨씬 시원해요."

"이게 다 내 덕이라고. 내가 지난번에 사장한테 말했다니까. 직원들 서비스만 서비스가 아니라, 직원들 옷차림도 다 서비스다. 고작 남자 사우나에서 일하는 직원이라도 보기 좋게 입혀야 드나

드는 우리들 기분도 좋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오랜만이세요?"

일꼬 회원님은 고개를 양쪽으로 까닥거렸다.

"그냥, 운전기사하고 기분 전환 겸 일주일쯤 동남아 놀러 갔다 왔는데 별거 없네. 그냥 그래 똥남아. 역시 여기저기 다녀도 우리나라가 제일 살기 좋아. 그럼 된 거 아나?"

나는 그냥 세탁물이나 버리러 갈까 하다 말문을 열었다.

"뭐, 회원님께는 그렇겠죠. 돈 많으면 살기 좋은 나라죠. 아닌 사람한테는 아니고."

그는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화를 내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웃는 상도 아니었다. 사무실에서 여직원에게 커피를 시킬 때의 그 얼굴과 비슷했다.

"소설가, 그건 어디나 다 그래. 미국도 그렇고, 북한도 그렇고, 북극도 그래. 그럼 수고!"

신발을 벗으려던 일꼬 회원 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혹시 여자 친구한테 그 말 들었어? 여주인공 사라졌다고."

"어 그거 어디서 들으셨어요?"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그 친구 이제 그런 일 할 필요 없거든. 예쁜 아가씨가 그렇게 시시한 극장에서 일하면 쓰나?"

놀라는 척은 했지만 사실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공과 함께 서울에 나갔다가 여배우와 일꼬 회원님이 함께 있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지 오래였다.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거리에 위치한 카페에서, 일꼬 회원님은 어려 보이고 싶었는지 타이트한 청바지에 영문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 거기에 야구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물론 신발은 새하얀 농구화였다. 그가 그 짜릿한 만남의 순간을 즐기고 있는 건 틀림없어 보였다. 예쁜 여자만이 아니라 20대의 연애에 대한 환상을. 물론 나와 공이 봤을 때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청바지를 입은 그 모습은 뭔가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일꼬 회원님의 말을 들으며 웃어주는 여배우의 시선은 은근히 건너편에 홀로 앉아 있는 CK One 향수 냄새 날 것 같은 폴로셔츠 입은 젊은 남자에게 가 있었다. 나와 공은 출입구에 서서 그 광경을 슬쩍 엿보다가 다른 카페로 옮겼다.


"불륜이세요?"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혹시...... 사랑?"

"소설가가 왜 이렇게 꽉 막혔어, 답답하게. 이건 부부 생활 아니라 그냥 사적인 생활. 그 아가씨 입장에서는 상부상조. 뭐, 그럼 된 거 아나?"

"아재 고추 곧추서요?"

만민평등의 댓글도 아니고 실생활에서 병이 갑에게 그리 물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냥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만 까닥였다.

일꼬 회원님은 휘파람을 불며 로커룸 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렇듯 세탁물을 버리러 재빠르게 카트를 밀었다.

바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대형 유리벽 안에서 신도시에 사는 헬라홀의 남녀 회원님들은 땀을 뻘뻘 흘렸다. 다리를 찢고, 엉덩이는 뒤로 번쩍, 숨은 헉헉거렸다. 비단 살을 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주식 시장이 폭락하건 부동산 시장이 꽁꽁 얼어붙건 간에 불안하지 않은 환상적인 1퍼센트의 삶을 느끼려고 매일 헬라홀을 찾았다.

나는 헬스장이 빤히 보이는 복도를 지나쳐 안쪽 구석으로 카트를 꺾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 자리에는 나만 아는 헬라홀이 있었다.

"살기 좋은 나라? 그게 여기 있다고?"

기껏해야 벌거벗은 임금님들의 나라겠지.

나는 재빠르게 세탁물을 그 구멍에 밀어 넣은 다음 남자 사우나로 돌아왔다.


(...) 


사실 내가 일했던 멤버십 피트니스의 진짜 이름은 헬라홀이 아니었다. 

더러워진 세탁물을 내리는 구멍에 내가 직접 헬라홀이란 이름을 붙였다.

의정부에서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이 곳의 이야기를 쓴다면 무덕하고 초라한 상류층 남자들의 사우나를 헬라홀이라 부를 거라고.

1퍼센트의 사람들만, 혹은 자신을 1퍼센트라고 믿는 사람들만 빠져드는 그곳은 본명 어마어마한 구멍이었다. 위험한 맨홀 같기도 하고 시공간이 일그러진 웜홀 같기도 한 헬라홀이었다. 한번 빠진 귀한 사람들은 쉽 새 없이 달리고 땀을 빼며 영원을 꿈꾸지만 혹 꺼져 사라질 때까지 빠져나가지 못하는 구멍, 헬라헬라 헬라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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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년 후


결국 조씨는 내가 헬라홀이란 별명으로 불렀던 멤버십 피트니스에 등록했다. 조씨는 그곳에서 나를 만나면 눈치 없이 아는 척을 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특히 회원님들이 몰려들어 바빠 죽겠는 시간에 자꾸만 말을 걸어 귀찮을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지금 다니는 학원에 내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미안, 그다지 고맙지 않았다. 그 말은 몇 달 후 다시 사업을 시작할 거라는 선언으로 바뀌었다. 거기에 내 자리가 있을 거라면서  어깨를 다독였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해가 바뀌었다. 몇 달 후 조씨는 헬라홀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 정도 얼굴이 보이지 않자 내가 워낙에 마음이 따뜻한 자인지라 괜히 궁금해져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목이 잠긴 목소리로 당분간 운동을 쉴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헬라홀 남자 사우나에서 일하다 보면 그 정도의 눈치는 생겼다. 학원에서 잘렸거나, 이식한 모발에 문제가 생겼거나,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아 각설탕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던 삶의 환상이 다 녹아버렸겠지.

나는 그렇게 새해를 맞았다. 그리고 그 해가 끝나기 전에 헬라홀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사이 헬라홀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나와 내 주변에 몇 가지 일들이 있기는 했다.

헬라홀의 월급은 그대로였지만 카운터 여직원들은 자주 바뀌었다. 카운터 여직원들은 헬라홀 회원들의 짜증을 참지 못하고 떠났다. 여자 사우나에서 일하는 사우나 매니저들도 수시로 교체되었다. 여자 사우나 매니저들이 그만두는 이유는 회원들의 짜증보다 월급 때문이었다. 그녀들의 일은 우리 같은 남자 사우나 매니저보다 배는 많았지만, 월급은 오히려 우리보다 조금 적었다. 그 조금이 그녀들의 분노의 계기가 되었다.

어떤 일에서든 불합리한 부분을 찾아내기를 좋아하는 팀장은 여자 사우나 매니저들의 월급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좀 이상하긴 하죠. 일은 우리보다 배는 많은데 월급은 우리보다 적으니까. 물론 그래 봤자 겨우 5만 원 정도지만."

하지만 팀장은 여자 사우나 매니저들을 위해 상부에 건의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면 그냥 참고 일할 수도 있을 텐데......."

이러면서 한숨을 내쉬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여름이 지나고 늦가을에 접어들 무렵 나와 공은 헤어졌다. 헬라홀을 그만두기 두 달 전쯤이었다. 헤어지는 이유에 대해 각자 변명을 할 수 있고 불평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담담하게 작별을 고했다. 그녀의 공연은 제법 성공적이었기에, 그녀는 대학로에서 올릴 다른 작품에 캐스팅되어 연습에 몰두했다. 그러다 보니 대학로 공연장에서 꽤 먼 신도시의 원룸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날이 잦아졌다. 그럴수록 우리 두 사람 사이는 소파와 침대처럼 데면데면해졌다.

먼저 싫증이 난 쪽은 공일지 몰랐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이 건조해지기 전에 내가 공을 붙잡았다면 과연 어땠을까?

"어땠을까? 내가 결혼하자고 말했으면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을까?"

노트북으로 인기 고전 미드인 〈앨리 맥빌〉을 보고 있던 공은 고개를 내저었다.

"태권, 그런 바보 같은 '만약에'는 하지 말자. 우린 서로 알고 있잖아. 서로의 마음을 붙잡을 기회가 있었어. 하지만 외면하고 잡지 않은 게 사실이잖아."

인정, 공은 이럴 때 보면 역시 나보다 철든 사람이었다. 

"태권, 모든 건 타이밍인지도 몰라. 우리 두 사람의 타이밍이 맞았다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한 가정을 이뤘을지도 물라. 그리고 내 생각에는...... 아마 우린 불행한 삶을 살았을 거야. 다행히 우린 인생을 걸고 모험을 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어. 그래서 그 타이밍을 넘긴 거 같아. 우리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의 환경 때문인지 그건 확실히 모르겠어. 다만 지금 다행이라고 느끼는 건 내가 태권을 저주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는 거야."

공은 그 말을 담담하게 내뱉었다. 그래, 그럼 된 거지. 이별에 대해 말할 때 담담한 사람들은 어쩌면 옛 연인에 대한 환상만 부여안고 꾸역꾸역 살아온 자들인지도 모르니까. 

공의 분리형 원룸 계약 기간이 끝나면서, 우리는 완전히 결별했다. 각자의 길을 가는 타이밍으로는 기가 막힌 셈이었다.


(...)


내가 헬라홀을 떠나던 날은 희한하게도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날이었다. 같은 날 대통령의 업무는 정지되고 사우나 매니저였던 소설가는 헬라홀에서 스스로 하야했다. 헬라홀 남자 사우나 휴게실에 모인 노인들 중 몇몇은 대통령을 욕했다. 물론 대단한 욕은 아니고 수군수군 정도였다. 요지는 여자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는 거였다. 물론 그 노인들은 당연히 그녀를 대 통령으로 뽑았을 터였다. 아니, 노인들만이 아니라 이곳을 드나드는 회원님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그날 헬라홀의 노인들은 내내 침통한 표정으로 로커룸과 목욕탕을 돌아다녔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무거운 먹구름이 헬라홀에 잔뜩 껴 있었다. 그들은 아랫것인 국민들의 항의에 중간관리자인 국회의원들이 표결로 1퍼센트의 권력자를 밀어내는 현실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세상이 바뀐 거니까. 더군다나 헬라홀의 노인들은 스스로를 평범한 국민보다 대통령에 가까운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그날 일꼬 회원님은 옷을 갈아입다 말고 한숨을 내쉬며 내게 말을 붙였다.

"나라 꼬라지가 이게 뭐냐! 이게 말이 돼? 어떻게 강남 아줌마가 나라를 뒤흔들어?"

"회원님도 선거 때는 탄핵당한 대통령을 뽑지 않으셨어요?" 

"당연하지. 나는 보수니까. 하지만 보수가 왜 보수인지 알아? 썩은 것들을 재빠르게 도려내는 게 보수라고. 여기서 보수가 망할 순 없어. 안 그래? 도려내버리면...... 그럼 된 거 아냐?

나는 이왕 떠나는 마당에 한마디 하기로 했다.

"뭐, 도려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잖아요. 그러다 다 도려내는 거 아니에요? 결국 아무것도 안남고."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헝클어진 옷가지를 접었다.

"하 소설가가 참 뭘 모르네, 보수가 사라지진 않아요. 사람들은 원래 보수를 좋아해, 나도 잘되고, 나라도 잘되면 좋은 게 보수야. 물론 남이 잘되는 건 배 아픈 게 보수지만. 그리고 꼴 보기 싫은 것들 그냥 다 쓸어버리는 게 보수고. 그게 보수야. 얼마나 깔끔해. 나는 부자 되고, 보기 싫은 놈들은 다 싹 쓸어서 환경 미화하고. 겉보기에 점잖고 폼 나고, 당연히 사람 마음은 원래부터 다 보지 아니, 보수에 끌리는 거지. 그럼, 된 거 아냐?" 

그렇게 말하면서 일꼬 회원님은 특유의 포즈로 턱을 쳐들었다. 그리고 그 대화가 헬라홀을 드나드는 1퍼센트 남자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였다.

내가 헬라홀을 떠나기 전 팀장은 잠시 내 손을 잡아주었다. 

"잘 가요, 그리고 이상하게 부럽네." 

그는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았다. 헬라홀을 떠나는 수많은 회원님들에게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보이는 눈빛은 아니었다. 신경질이 빠지직거리는 눈빛도 아니었다. 그 눈빛은 자신이 선 절벽에서 다른 사람이 선 절벽을 보는 눈빛과 비슷했다. 다시 말해 뛰어넘으면 금방 넘어갈 수 있는 절벽. 하지만 뛰어넘기로 결심하기까지가 힘든 절벽, 바로 그 절벽을 막 건너간 사람이 여전히 또 다른 절벽 앞에 서 있는 것을 바라보는 눈빛이랄까.


"



.

.

.



"


작가의 말


면접을 보기 전까지 내가 일할 멤버십 남자 사우나가 대한민국 상류층 1퍼센트에 가까운 회원들이 드나드는 곳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서 세탁물을 나르고 운동복을 정리하면서도 그 경험을 소설로 쓸 생각은 없었다. 그냥 한 기업의 대표이사나, 잘나가는 벤처사업가나, 드라마에 출연하는 연예인이나 딱 벗으면 우리랑 별로 다를 것 없네, 이랬을 뿐. 그러다가 남자 사우나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정신없이 일 하던 시기가 지나고 귀가 열리면서부터였다.

워낙 헐렁한 단순노동이어서 나는 금방 남자 사우나 업무에 적응했다. 하릴없이 로커룸과 휴게실, 목욕탕 안을 돌아다니다 보니 그때부터 회원들의 웅얼과 속닥이 귀에 들어왔다. 내 등단작 『수상한 식모들』에는 사람들의 귀를 드나들며 꿈을 갉아먹는 쥐가 등장한다. 나 역시 그 사우나에서 사람들의 말을 엿듣는 쥐 같은 존재가 된 셈이었다. 여기서 흐르는 말들로 소설을 쓸까 생각할 무렵 떠올렸던 초고의 제목은 ‘수상한 사우나 매니저, 알고보니 쥐'였다.

하여간에 나는 이 장편소설을 작업하면서 과거와는 다른 식으로 글을 써갔다. 나는 원래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먼, 현실과 허구 사이의 발랄한 망상에 기댄 작품을 쓰는 작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 엿들은 상류층 남자들의 별것 없는 대화나 혼잣말, 누군가와 통화할 때의 속닥거림, 나에게 투덜대며 한 말 등등을 생생하게 소설로 옮기고픈 욕심이 들었다.


(...)


원래 세계문학상에 응모할 때의 제목은 '살기 좋은 나라'였다.

나는 이 제목이 마음에 들었지만 출판사 관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감해했다. 새벽종이 울리는 새마을운동 시절도 아니고 너무 낡고 심심한 제목 아니냐는 의견이었다.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지금은 1970년대가 아니라 2017년이니까.

교정 작업에 들어가기 전까지 끊임없이 압박을 받다가 투덜거리며 몇 분 만에 바꾼 제목이 바로 이것,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다. 이 제목에 정치적인 은유는 없다. 한 방송사를 추앙하거나 깎아내리려는 의도도 아니다. 정말로 내가 일하는 동안에 남자 사우나 휴게실에서 JTBC 방송을 보는 회원들을 본 적이 없었다. 좀 급박하게 제목을 짓긴 했으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내

가 일했던 세계를 정의하는 또 다른 문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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