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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소설][성장소설][복싱] 권투와 함께하는 불우한 성장소설 《스파링》

by 노지재배 2017.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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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뷰하는 책은 《스파링》이다.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은 작품이다. 


한마디로 소개하자면 분명 약점이 있지만, 계속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스파링 도선우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스파링》은 나를 두 번 놀라게 했다. 첫째, 고아 소년이 학교에서 주먹을 휘두르다 소년원에 가서 권투를 배우게 된다는 이 낡고 닳은 소재를 2016년에 읽게 되다니. 둘째,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다니."라고 평했다. 함축적으로 작품의 내용과 매력을 잘 드러낸 평이다.


《스파링》의 가장 큰 약점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이야기가 긴밀하게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라는 점이다. 심하게 얘기하자면 따로 노는 감도 없지 않다. 그리고 마지막에 소중한 가족들을 잊고 헛된 성공에 지쳐 파국으로 치달았던 주인공 장태주가 끝으로 찾아 떠날 것으로 암시된 '사랑'인 '아라'라는 인물과의 접점도 소설 속에서 제대로 필연적이라고 느껴질 만큼의 안배가 이뤄지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사소하지 않은 큰 약점이랄 수 있는 부분들을 감안하더라도 《스파링》이라는 소설 자체는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진부하면서도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분명 존재한다.


소설 속 곳곳에 등장하는 유머스러운 대화나 서술도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즐거움 중 하나다. 또한, 복싱 용어 및 복싱 연습과 경기 장면에 대한 세세한 묘사나 설명, 복싱 및 이종격투기 그리고 페이퍼뷰 등 격투기 세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등도 작품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또 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성장소설이라고 했지만, 사실 화자가 어떠한 의미에서 성장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지도 애매하다. 주인공은 불합리한 세상에서 폭력의 맛에 빠져들었다가, 담임과 할아버지, 누나를 만나고 복싱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힘을 규칙과 절제 속에서 스스로 통제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세속적인 성공과 부가 쌓여가면서 주인공은 폭력을 제어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과는 또 다른 타락과 나락 속으로 떨어지는 모습으로 소설이 끝나기 때문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소설은 어느 날 눈을 떴다가 마침 '마이크 타이슨은 왜 경기 중에 상대 선수의 귀를 깨물었을까?'라는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주인공 장태주는 억압된 폭력을 폭발시키며 일종의 비행청소년으로 일탈했다가 규칙에 따라 힘을 제어하는 복싱의 세계에서 정상에 오르면서 성장을 구가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역시 마이크 타이슨을 염두에 둔 듯 소설 속 장태주는 현실에서도 복싱 세계에서도 점차 타락과 쇠락의 길을 걸으며 주변 사람들과 대중들의 지탄을 받기까지 이른다. 결국, 장태주는 마지막 시합에서 일부러 지는 경기를 펼치며 속으로 "이게 나의 마지막 시합이므로 당신들이 내가 그렇게 두들겨 맞기를 원한다면 당신들이 원하는 만큼 맞아 주겠다고. 그게 내가 당신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토로한다. 그리고 기자들과 카메라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다. "내가 당신들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한편, 소설 속 장태주의 타락과 쇠락의 중심 원인으로는 핏줄로 이어진 사이는 아니지만, 세상에서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이었던 담임과 누나, 할아버지를 한꺼번에 사고나 세상의 비리로 잃게 된 상처가 그려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자연이나 환경적인 위험의 우려로 지어서는 안 되는 '신자유대교'가 정치권과 건설업계의 야합과 비리로 추진되고, 급기야 부실공사와 예고됐던 위험으로 붕괴되는 등의 자본의 논리를 앞세운 신자유주의나 사회의 부조리, 불합리가 함께 거론된다. 신자유대교의 붕괴로 담임은 장인이자 스승인 할아버지와 아내(장태주의 누나)를 잃고 사고 원인 파악과 대책 강구를 촉구하는 집회와 시위를 펼치다 석연치 않은 교통사고로 연이어 목숨을 잃는다.


다만, '신자유대교'를 놓고 갑자기 전개되는 할아버지와 누나의 교통사고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자본의 불합리, 그리고 이것에 맞서다 어이없고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는 담임의 마지막 등도 소설 전체에서는 약간 따로 놀거나 필연성이 떨어지게 급박하게 전개된다는 느낌이 있다. 물론, 폭력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폭력 속에 빠져 소년원까지 오게 된 비행청소년을 복싱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 담임은 소설 속에서 항상 올바르고 정의로운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어 어느 정도 내용적 전개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그럼에도 너무 급박스럽거나 튀어나온 듯한 전개라는 생각을 금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링》은 복싱과 폭력, 권력과 정의, 행복과 성공 등의 이야기를 정공법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서술과 서사 속에 적절하게 버무리면서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큰 점수를 줄 만한 작품이다.


리뷰 첫머리에서 언급했던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말이나 "인정한다. 나는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에서 심사에 임했고 이 작품을 일관되게 지지했다."는 말로, 작가 도선우와 주인공 장태주를 지지한 권여선 작가의 언급처럼 《스파링》, 그리고 이 작품의 주인공 장태주는 분명 많은 단점을 뛰어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로 리뷰를 마친다.


 



■ 저자


도선우 


2016년 《스파링》으로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2017년 《저스티스맨》으로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서른일곱이 될 때까지 글을 쓴다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소설을 읽을 시간이 있으면 시사주간지를 읽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다 우연히 《호밀밭의 파수꾼》과 만나 "세계가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도선우 작가는 일 년 동안 200권의 소설을 읽었다고 한다. 결국 소설 작법을 배워본 적도 없고, 한 명의 문인 친구도 없었으며, 습작을 평가받아 본 경험도 전무했던 작가는 8년 동안 매년 한 편씩 장편을 써서 공모전에 응모하는 노력 끝에 소설가의 길에 들어서는 뚝심을 발휘했다.




■ 책 속으로


"


나는 이물異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남과 달랐다. 어렸을 땐 남과 다른 게 뭔지 잘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나는 시작부터 남과 달랐었다. 나는 화장실에서 태어났다. 멍청한 나의 엄마는 화장실에서 똥을 누다가 나를 낳았다. 똥을 누다가 낳았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화장실엔 왜 들어갔겠는가. 애초부터 나를 낳을 생각이었다면 화장실보다 더 나은 공간이 이 세계에 없을 리 없었다. 엄마는 공중화장실 변기에 기대어 똥 대신 나를 낳았고 나는 ㅍ피로 범벅된 타일 위에 누워 이 황당한 현실을 개탄하며 울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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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신 새끼. 못 치지? 내가 너 같은 새끼들을 잘 알아. 너 같은 새끼들은 겁이 많아서 치래도 못 쳐. 차라리 맞는 게 낫지. 때리는 건 무서워서 못 해. 그렇지? 병신들. 돈을, 백만 원을 거저 줘도 너 같은 것들은 쓰지도 못해. 쓰다가 무슨 큰일이라도 날까봐. 아니야? 아우 무서워."



(...)


"야, 너희도 이 새끼 몸에서 냄새나는 거 느끼지. 느끼잖아? 보육원엔 물도 잘 안 나오는지 씻지도 않나 봐. 이러다가 우리까지 무슨 병이라도 옮는 거 아닌가 몰라. 안 그래?"

나는 말했다.

"냄새 안 나. 보육원이라고 해서 물 안 나오는 거 아니고 나도 매일 씻어. 그리고 나한테도 무슨 병 없어."

"지랄하네. 병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바이러스는 본래 잠복 기간이라는 게 있는 거야."

오재호가 이죽거렸다. 나는 잠시 그런 오재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네가 괴롭히려던 게 나냐, 알리냐."

오재호는 느닷없는 나의 질문에 잠시 멍한 표정으로 의미를 되새겨보는 듯하더니, 이윽고 무언가를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짜 알고 싶어? 너도 싫고 새도 싫어. 나는 약한 것들은 다 싫어. 알아? 약한 것들은 뭐든 자기 손으로 할 줄 아는 게 없어. 전부 우리한테 빌붙어서 우리가 이룬 것들을 좀먹기만 한다고 우리 엄마가 그랬어. 자기 손으로 뭘 할 생각은 안 하고 남이 해주기만을 바란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너희 보육원 새끼들을 보면 엄마 말이 딱 맞아. 너희 보육원 것들이 나한테서 빼앗아간 돈이랑 학용품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그래, 너희는 그걸 나한테서 빼앗아갔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엄마가 그냥 주랬어. 너희는 어차피 다 거지들이니까 괜히 그따위 돈 몇 푼, 사소한 물건들 때문에 너희하고 섞이지 말고 앞에서 거치적거리면 그냥 던져주랬어. 너희는 천생 우리가 던져주는 걸 받아 먹고사는 애들이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애들이니까."


(...)


"우리는 거지가 아니야"

오재호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돌려 반 아이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아이들은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침묵에서 형언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그것은 기묘한 감정이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 배신을 운운할 만한 그 어떤 관계도 형성된 바 없었음에도 그들로부터 느껴지는 배신감이란, 실로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세상 모든 게 싫어진다는 감정이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오재호가 말을 이었다.

"나중엔 어차피 너희 같은 것들은 우리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날이 오니까 지금 사소한 거 챙기려다 험한 꼴 당하지 말, 너희가 가까이 오면 그냥 원하는 걸 던져주고 말랬어. 우리야 얼마든지 또 사면 되지만 너희는 우리가 주지 않으면 영영 만져볼 수도 없는 애들이니까 그냥 적선하는 셈 치라고 말이야. 하지만 왜? 내가 왜 그래야 해? 나는 싫어. 너희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너희가 노력해서 가져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걸 왜 내가 해줘야 하는 건데? 어? 내가 너희 부모야?"


(...)


"게다가 너희 보육원은 국가에서 보조금을 받고 그 보조금도 부족해서 우리 부모님 같은 사람들한테서 후원금도 받아. 재미있는 게 뭔지 알아? 국가보조금이라는 게 세금이고 그 세금을 낸 사람이 또 우리 부모님이야. 알아? 너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리 부모님이 번 돈으로 먹고 자고 입고 사는 거라고. 알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 국가보조금이 뭔지 세금이 뭔지 들어나 봤냐? 너 같은 새끼들은 늘 그렇게 주는 거나 받아 처먹고 남이 다 알아서 챙겨주니까 그런 단어가 있는지조차도 몰랐을 거야. 그렇지? 너희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니까. 어? 누구는 밤새워서 공부하고 노력해서 성공하고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꼬박꼬박 세금 내가며 떳떳하게 사는가 하면, 너 같은 것들은 세상 편하게 우리가 주는 혜택이나 받으면서 고마운 줄도 모르고 살아. 난 진짜 이해가 안 돼. 솔직히 우리 엄마 아빠 같은 사람들한테 존나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오재호는 정말 그래야 하는 게 아니냐는 듯 눈을 부라리고는 손가락을 세워 내 가슴을 두어 차례 쿡쿡 찔렀다.

"그런데 네가 지금 나한테 하는 꼴을 봐. 새 새끼 한 마리 죽은 걸 가지고 도끼눈을 뜨고 째려보고 있잖아. 너는 그게 이해가 돼? 이 양심도 없는 새끼야? 자기 몸뚱이 하나도 제대로 못 기르면서 새고 나발이고 누가 뭘 기른다는 거야? 어? 지가 토끼를 기른대.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새니 토끼니 그 사료들은 또 어디서 나냐? 학교에서 다 사주는 거 아니야? 그건 세금 아닐 거 같아? 그것도 우리 부모님 돈에서 나가는 거라고. 알아?"


(...)


그래서 내가 그 새도 태워버리라고 시켰다. 왜? 불만 있어?"


(...)


"이 새끼 이거 나 쳐다보는 거 좀 봐봐. 오오, 무서운데? 그러니까 자신 있으면 한 대 쳐보라고 새끼야. 그렇게 병신처럼 노려보지만 말고. 네가 그렇게 노려보면 누가 무서워할 줄 알아?"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딱히 오재호를 때려야겠다는 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오재호가 나를 또 칠 기세였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던 거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한 발이 체중을 실어 가격하기에 가장 알맞은 거리였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기다렸던가? 그것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내가 알맞은 거리로 물러난 후 오재호의 음성이 먼 곳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그의 주먹이 내 얼굴로 날아들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룰 숙였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취해보지 않은 동작이었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요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고 그와 동시에 오른쪽 어깨를 뒤로 뺀 뒤 허리를 중심으로 회전하듯 몸을 틀었다. 사선으로 휘어져 이던 상반신이 튕겨나가듯 회전했고 그 맨 앞쪽에 나의 주먹이 놓여 있었다. 그 주먹이 오재호의 얼굴에 맞기까지 필요했던 시간은 찰나도 되지 않았다.

뼈와 뼈가 부딪쳐 작렬하는 느낌을 나는 그때, 내 생애 처음으로 받았고 그 최초의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아주 오랫동안-마치표식처럼-내 주먹에 남아 있었으며, 이후에도 바로 그 위치에 상대의 얼굴이나 몸이 와 닿을 때마다 그들은 모두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쉬이 일어서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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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 상운고 일대가 예쁜 여장의 등허리로 팔을 두르고는 손을 올려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자는 깜짝 놀라며 아이 왜 이래, 라고 작게 말했지만 그 이상의 어떤 제스처를 보이지는 않았다. 상운고 일대도 여자의 가슴을 움켜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말해다.

"만져 볼래?"

"네?"

"만져보고 싶으면 만져봐도 돼."

나는 만져보고 싶기는커녕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내가 그런 기분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음에도 이상하게 모욕감 비슷한 기분이 들었고, 순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먹은 게 있으니 참았다. 나는 예쁜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내 눈을 피했다. 제 것도 아닌 것을 마치 제 것인 양 멋대로 만져봐도 된다고 지껄이는 상황의 부당함을 여자도 충분히 아는 듯했다. 그러나 여자는 가만히 있었다. 왜 가만히 있는 걸까.

후환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의 오만함에 어떤 대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두려움을 견디는 모양새는 분명 아니었다. 수치스러움은 충분히 느끼지만 오히려 그 이상의 무언가를 위해 납득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무엇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


나는 그들이 처음 우리 교실에 등장했을 때를 떠올려보았다. 역 잘하는 여자가 행동대장처럼 나타나서 예쁜 여자를 내게 안내했다. 그리고 그 뒤에 앞머리 여자가 마치 보디가드처럼 서 있었다. 그제야 나는 신묘하게도 그녀들의 역할과 그 옆에 앉은 남자들의 위치가 꼭 같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갑자기 그녀들의 존재가 더없이 하찮게 보였고 그렇게 예뻤던 여자의 얼굴도 말할 수 없이 추하게 느껴졌다. 상운고 일대가 말했다.

"이리로 와서 만져봐."

나는 대답했다.

"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


"너 왜 남자들이 좆 빠지게 공부해서 명문대 들어가고 의사 검사 변호사 사짜 달려고 그 지랄들을 하는 줄 알아?"

나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이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상운고 일대가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 밑에 그런 인간들이 자갈처럼 깔려 있어서 내가 좀 아는데, 그게 다 여자 때문이야. 조금이라도 더 예쁜 여자랑 떡을 치려고 그러는 거라고. 유 노우? 성공한다는 게 그런 거거든. 떡으로 시작해서 떡으로 끝나는 거야. 떡이 포상이고 그게 대가리고. 아킬레스와 아가멤논이 그랬고 메날라오스와 파리스도 그랬어. 남자한텐 돈과 여자가 전부야. 그게 힘이고 그게 권력이야. 그 모든 권력을 얻으려는 이유가 다 여자 때문이라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것들은 늘 시작과 끝의 구분 없이 그 자체가 시작과 끝이고 알파와 오메가야. 네가 아직 어리고 좆도 몰라서 그러는 건데 너도 결국 거기 올라가서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살게 될 거라고. 알아들어?"


(...)


"그런 기회를 내가 지금부터 너한테 주겠다 그 말이야. 알겠어? 네가 살면서 어디 가서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네가 사는 그 거지 같은 동네에서 평생 그러고 살 거야? 아무리 몰라도 그 정도는 알지 않아? 한 번 그러고 사련 영원히 그렇게 살게 된다는 거? 너 있잖아. 인생에서 나 같은 사람 못 만나면 평생 가야 타고난 팔자 못 고쳐. 유 노우 왓 아임 세잉? 네가 지금부터라도 미쳐서 좆 빠지게 공부해봐야 그 끝에 있는 건 의사고 변호사고 그딴 게 고작이야. 그거 되면 그다음엔 뭘 한다? 예쁜 여자랑 떡 한 번 쳐보려고 여기저기 하이에나처럼 기웃거린다. 그러면서 나 같은 사람한테 빌붙어서 알랑방귀나 뀌고 뭐 하나 주워 먹을 거 없나 두리번거리면서 사는 거야. 왜, 아닐 거 같아? 내가 다 보고 하는 얘기거든?

너 같은 새끼들이 미쳐서 날뛰어봤자 올라갈 수 있는 제일 높은 자리가 그 정도라고. 그걸 내가 지금 새끼야, 너한테, 그따위 멍청한 짓 하지 않고도 단박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잖아. 네가 힘 좀 쓰니까 앞뒤 똥오줌 못 가리고 사리 분별이 안 되나 본데, 유 노우 왓? 네 인생엔 지금 내가 엄청난 기회라고, 나중에는 인마, 너는 나 같은 사람은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


(...)


"나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요."

"뭐?"

"나는 내가 사는 그 거지 같은 동네가 좋은데요."

상운고 일대의 눈빛이 달라졌다. 상운고 부대가 내 말을 손바닥으로 쳐서 떨어뜨리듯 곧바로 대꾸했다.

"병신 지랄하네. 보육원 것들은 무슨 보지에 금테라도 둘렀냐?"

나는 순간 몸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자제력의 발목을 간신히 붙잡았다.

"말 함부로 하지 마시죠?"

"뭐?"

"에이, 씨발,"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음식도 존나 느끼하네, 씨발. 이런 걸 도대체 왜 처먹어?"

체한 것처럼 얹혀 있던 말을 테이블 위로 냅다 던지고 몸을 돌려 나가려는 찰나, 상운고 일대의 목소리가 바로 뒤통수를 때렸다. 

"거기 안 서?"

나는 섰다.


(...)


내가 제자리에 서서 고개를 반쯤 돌렸을 때, 이미 내가 바라던 결과를 기대하기란 글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상운고 부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주먹을 뻗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커다란 머리통에 겹쳐 날아오는 주먹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의 주먹은 제법 정확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대체로 성질 급한 싸움꾼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이를테면 반드시 상대를 맞혀 쓰러뜨리겠다는 의지 없이 일단 휘두르고 보는 주먹의 궤도와는 사뭇 달랐다.

게다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기세로 그 주먹에 실린 강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도 나처럼 몇 차례 주먹을 휘두르지 않고도 단숨에 승부를 결정지어왔다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의 궤적에는 그런 경험이 녹아 있었고 확신이 체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주먹을 제대로 맞는다면 누구라도 그 한 방에 마무리되었을 공산이 컸다.

그러나 결국 제아무리 센 주먹이라도 맞혀야 밥값을 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일격에 승부를 갈랐던 그의 습관이 나 같은 동류의 사람에겐 득으로, 그 자신에겐 독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공격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하고 있었어야 할 방어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에 관한 계산이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았다. 빗나가면 그는 즉각, 별로 경험해보지 않은 상황에 당황할 게 분명했다. 거기에 자신이 못 맞힌 게 아니라 상대가 피했다는 사실이 더 믿기지 않을 것이었다.

느린 주먹은 아니었으나 더 빨랐더라도 피하는 게 어렵지 않았을 내가 그러므로 그냥 맥없이 대주고 있을 리 만무했다.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몸은 반응했고, 나는 돌아서던 동선 그대로 몸을 낮췄다. 조금만 더 지나면 그의 주먹이 내가 섰던 위치를 지나 균형을 잃을 참이었고, 그 찰나에 나는 내 머리 위로 항모의 뱃머리처럼 함께 밀려오던 그의 턱을 보았다. 거기가 타점이었다. 나는 그곳을 향해 정확하게, 마치 땅의 기운을 공중으로 퍼올리듯 확고한 의지를 담아, 주먹을 끌어올렸다.

정확도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도, 그러나 힘을 조절하는 능력만큼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통제되지 않은 힘은 언제나 생각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에 관해서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렇게까지 세게 부딪칠 줄 몰랐던 나는 그의 턱이 내 주먹에 맞닿는 순간, 찰나였으나 마치 그의 목이 뽑혀나가는 듯한 기분 나쁜 감촉을 느꼈다. 그의 입속에 들어 있던 음식물이 튀어나오면서 허공에 흩뿌려졌고 그는 마치 나무토막처럼 뒤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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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호처분 오호와 구호를 판결받았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감찰에 송치되어 거기서 다시 소년분류심사원으로 끌려가기까지 채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심사원 아이들 말에 따르면 그렇게 빠른 처리는 이제껏 듣도 보도 못 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들어온 건지 궁금해했다. 나 또한 내가 무슨 일을 저질러서 소년분류심사원, 이른바 감별소까지 오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체포 과정에서 상해죄라는 것만 들었을 뿐 그 외에 자세한 내막은 듣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때까지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던 나로서는 그저 모든 게 다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모든 일이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났다.

내가 내 죄로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은 강충식이 이미 내게 했던 이야기들, 즉 상운고 부대를 때려눕힌 일과 충훈중 개돌이를 발로 차서 젖힌 일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내가 먼저 시비를 붙여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둘 다 나를 먼저 공격했거나 공격하려 들었고, 나는 다만 위협을 느껴 방어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다. 하지만 포승줄에 묶여 딸려 들어온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솔직히 두렵다기보다 신기했다. 모든 일이 강충식의 말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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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는 시작부터 좀 이상했어. 긴급조치 사안도 아닌데 고지도 없이 체포된 과정도 수상하고 제대로 된 조사도 없고 국선 보조 통지도 없고 재판 과정도 희한하고 하여간 네 얘기만 들어보면 죄 이상하더구만. 네가 모지리라 이만큼이나 산 거지, 딴 새끼들 같았으면 사선 변호 붙여서 애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내가 봐도 이상한 걸 알겠는데, 변호사라면 양치질하면서 변호를 해도 너 같은 처분은 안 나오겠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지, 씨발. 불멸의 진리라니까."

"유전무죄요?"


(...)


"너 말수 적은 이유가, 말하면 멍청한 게 다 티 나니까 그래서 그런 거냐?"

몇몇 아이가 이불속에서 낄낄거리고 웃었다. 나는 과연 멍청한 기분으로 자리에 누워 소나무 형을 바라보았다.

"너 인마, 있는 집 새끼가 여기 들어오는 거 봤어?"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못 본 것 같았다. 왠지 나와 다들 비슷한 처지라 오히려 위안받는다는 느낌까지 들었던 걸 기억해보면, 과연 이곳에 집안 환경이 좋은 아이는 들어오지 않았다. 차라리 부모가 없는 게 고맙다고 느껴질 정도로 개 같은 부모 밑에서 고생만 하다가 들어온 아이가 태반이었다. 세상엔 미친 어른과 책임감 없는 부모가 차고 넘쳤다. 나는 못 봤다고 대답했다.

"여기 들어와 있는 건 다 거지 같은 새끼들이잖아. 오히려 여기서 나가면 뭘 하고 살아야 하지 그게 더 걱정인 새끼들이 훨씬 많다고. 안 그래? 그러면 있는 집 새끼들은 하나같이 다들 착해서 아무도 죄를 안 지으니까 여길 안 들어오는 거겠냐?"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럴 리는 없었다. 소나무 형이 또 말했다.

"그럴 리가 없겠지? 우리랑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다녀도 그 새

끼들은 안 들어와. 그게 왜 그런지 알아?"


(...)


"니들 재판받기 전에 니들 나와바리에 분류심사관이나 보호관찰관이 나가요. 판사가 무슨 신도 아니고 검찰 기소 내용이나 니들이 법정에서 떠드는 소리만 듣곤 다 알 수가 없잖아. 그래서 조사관이 나가서 사전조사를 한다고. 그러면 걔들이 나가서 뭘 조사할 거 같으냐.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얘가 어떤 애였냐고 묻고 다니겠냐? 그냥 뻔한 조사하는 거야. 집구석이 얼마나 사는지, 부모는 뭘 하는지, 교우관계가 어떤지.

그런데 놀랍게도 부모가 있어. 그 와중에 부모가 개 같은 인간들도 아니야. 그러면 자기 자식 감방 간다는데 아 그러세요. 그러고 말 부모가 어디 있겠냐. 뭐라도 하나 어떻게든 더 처먹이려고 기를 쓰겠지. 거기다가 집도 존나게 부자야. 그러면 결국 보고서 내용이 달라지는 거야. 거기에 변호사 붙고 검찰에 줄 좀 대고 그러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끽해야 일호 이호인 거고. 여기 들어올 일이 아예 없는 거야. 처분받고 다시 집에 가서 그냥 자빠져 자면 되는 거예요."


(...)


"조사관 보고서에 부모 재산이나 직업 같은 게 상세하게 기록되는 데 아니, 씨발 무슨 국회의원 출마하는 것도 아니고 애새끼가 죄를 저질렀는데 그게 부모 재산이랑 뭔 상관이냐고, 안 그래?"

  

"







"


"내가 보는 선도연합회의 질서도 그래. 그건 그들이 세운 질서지 너희가 세운 질서가 아니야. 그렇지? 그런데 너희는 그것이 누구의 질서인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너희가 내는 돈은 네 말마따나 적은 돈일 수 있어. 그러나 문제는 너희가 적은 돈을 낸다는 게 아니라. 그 돈을 강제로 내고 있다는 점이야, 이해가 되지?"


(...)


"그런데 이 문제의 핵심은 강제로 낸다는 데 있는 게 아니야."

나는 담임 몰래 사물함에서 과자를 꺼내 먹다 들킨 것처럼 일순 몸이 굳었다.

"네?"

"강제라는 부분만 생각하면 그 문제의 답이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 달라질 수 있어. 네 선배처럼 그건 강제가 아니라 자율이다, 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을 수 있을 거고, 또 누구는 강제이기는 하지만 금액이 적어 억울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고 말하기도 할 테며, 어떤 아이는 억울하지만 대신 폭력이 근절된다고 하니 가치가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어. 그러면 결국 이 문제는 아까 너처럼 잘 모르겠는 문제가 되고 마는 거야. 저마다 각자의 의견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누군가 말해버리면 그게 곧 정답이 되고 마는 상황이지. 자,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득을 보고 있는 사람은 누굴까?"

나는 골똘하게 담임을 쳐다보았다. 나는 무언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 같은 걸 받았다.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고, 결과도 하나 달라진 게 없는데, 저마다의 의견이 존재한다는 이상한 결론 하나로 결국 문제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어. 마술처럼. 신기하지? 자, 그렇다면 이 문제의 문제는 뭘까?"

나는 담임의 눈치를 가만히 살피다가 대답했다.

"생각을...... 하지 않은 거요?"

"맞아. 이 또한 충분히 생각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야. 그래서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지 못한 거지. 이 문제에는 누가 어디서 어떻게 봐도 달라지지 않는 핵심이 하나 있거든. 그게 뭘 거 같아?"

나는 다시 다리를 떨었다. 담임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희가 내는 돈이 모여 너희를 강제하는 집단이 유지된다는 거야. 그것은 누가 어느 각도에서 봐도 틀림없는 사실이지. 그 돈으로 선도연합회 회원들을 운용하고, 선생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그 질서를 만든 사람들의 저금통에 돈을 채워주고 있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그들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건 그들이 아니라 너희들이라는 말이야. 이해할 수 있겠어?"

분명 어려운 말 같은데도 신기하게 나는 다 이해가 되었다. 나는 이해가 되었다고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대답했다. 담임이 기특하다는 듯 빙그레 웃고는 말을 이었다.

"너희가 계속 그 돈을 내는 한, 선도연합회가 없어지는 일도 없을 거야, 그렇지? 그러면 이제 여기서 진짜 문제가 모습을 드러내게 돼. 선도연합회라는 게 네 말처럼 이제 생긴 지 고작 이 년밖에 안 되었잖니? 그래서 지금은 딱 그 이 년만큼의 질서가 잡혀 있겠지.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르는 만큼 더 확고한 질서가 자리 잡힐 거야. 그러면 과연 그때도 그들이 돈 천 원으로 모든 걸 다 편하게 해결해주겠다고 말할까?"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나 듣는 순간 담임의 말처럼 그들이 과연 그럴까? 라는 강력한 의구심이 들었다. 담임이 말했다

"아마 그렇지 않을 거야. 무언가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그리고 그게 꼭 금액이 올라가는 형식일는지도 알 수 없어. 뭔가 다른 미묘한 방식을 만들어내겠지. 그들은 그러기 위해 너희와는 다르게 끊임없이 생각이라는 걸 할 테니까. 그러나 이미 부당한 질서에 순응한 너희들은 그 새로운 질서에도 곧 순응하게 될 거야. 그때도 그게 물 흐르는 듯이 순리대로 사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고. 그렇지? 그러면 곧 네 보육원 후배들이 그 지역 중학교에 올라갈 즈음이면 천 원으로 끝나지 않는 시대를 살게 될 수도 있어. 자 그럼, 그 아이들이 그런 세상을 살게 되는 데에 너희의 책임이 있을까, 없을까?"


(...)


"천원일 때 막지 않으면, 그다음 아이들은 만원을 내야 하고 청소도 대신해줘야 하고 숙제까지 도맡아 해줘야 하는 시대를 살게 될지도 몰라.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왜 그래야 하는지 영문도 모르면서 단지 그게 오랫동안 그곳의 역사를 만들어온 삶의 방식이니까 따라야 한다고, 혹은 따르고 싶지 않아도 결국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살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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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폭력을 통제하는 방법에 관해 담임은 말했다. 분노가 치오른다고 마구 주먹을 휘둘러댄다면 네가 그토록 경멸하는 선도연합회 일원들과 하등 다를 게 뭐냐고 담임은 내게 물었다. 그건 결국 그들이 가진 힘을 내가 갖지 못했으므로 그들처럼 행동하지 않을 뿐이라고 자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도 담임은 말했다. 그것은 상상해보면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걸 시인하고 싶어?"

나는 당연히 절대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담임은 그럼 그걸 나 자신에게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진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통제하여 규칙을 지키는 사람은 다 똑같을 것 같지만, 실은 전혀 다른 두 부류로 나눠볼 수 있어. 한쪽은 그래야 한다는 걸 분명하게 깨우쳐 자신의 신념이자 질서로서 지키는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그냥 겁이 많은 사람이야. 비겁한 건 후자지. 다만 겁이 많아 규칙을 지키고 있을 뿐, 한번 어겨봤더니 별거 아니더라는 걸 알게 되면 그는 마치 그게 새로운 규칙이라도 되는 양 어기고 다닐 사람이니까.

그런 인간들에게 그런 경험이 자꾸 쌓이면 결국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도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랑처럼 떠벌리고 다니게 돼. 자기가 그만큼 배짱이 좋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듯이 말이야. 그런 머저리들은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모두 자기처럼 겁쟁이라서 그런 줄 알거든.

그런 족속들이 없던 힘까지 얻으면 어떤 행동을 하고 다닐까? 굳이 안 봐도 훤히 그려지지 않아? 풍선처럼 가슴을 부풀리고 다니지만 그 속은 텅 비어 있는 사람. 무언가 이 사람에게선 진짜처럼 여겨지는 구석이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 그런 몰골로 산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수치스러운 일이야. 동네 고양이한테 뺨을 얻어맞고 돈을 빼앗기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워. 그렇지 않겠어?"

폭력이 필요해서 꼭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의 감정보다 상대의 태도를 보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상태인가를, 스스로 먼저 확인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담임은 말했다. 무엇을 결정한다는 건 그런 정신 상태에서나 해당하는 말이라고 했다. 냉정함이 우선되지 않은 폭력은 결국 분풀이 이상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잘난 분풀이가 끝나고 나면 남는 게 무엇인지 잘 생각해봐."

그리고 담임은 권투에 관해 이야기했다.

"권투에서 가장 중요한 게 그거야. 어떤 순간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도록 정신과 육체 두 가지를 모두 다스리는 방법. 그걸 끊임없이 훈련하는 거야. 그러니까 평소에도 항상 그렇게 자신을 다스리는 연습을 해야 해."


(...)


"너의 질서를 만들지 못하고 상대가 정한 질서에 질질 끌려다니기만 해서는 절대로 네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어."

분노가 곧 상대가 정한 질서로 말려드는 첩경이라고 담임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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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뷰. 전에도 언젠가 담임이 페이퍼뷰에 관해 말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기억해냈다. 담임이 말했다.

"아, 그거. 그게 미국 프로 복싱 시장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시스템이지. 영화나 스포츠 경기를 볼 수 있는 유료 방송 시스템인데, 말하자면 입장권 같은 거야. 스포츠만 놓고 보자면 경기를 보고 싶다고 모두 다 경기장에 갈 순 없으니, 원하는 사람은 티브이 중계로나마 볼 수 있게 폐쇄회로 시스템을 구축한 거야. 유료로. 티켓처럼. 당연히 현장 티켓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


"그런데 이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돈이 되니까 무언가 조금씩 각도가 달라지면서 음...... 말하자면 선도연합회가 상업적으로 발달한 느낌처럼 바뀐 거야. 선도연합회가 힘이라는 도구로 은연중에 강제해서 돈을 거둬들였다면, 페이퍼뷰라는 건 스타플레이어와 고액의 대전료라는 미끼로 대중을 현혹해서 돈을 거둬들이는 거거든. 현장 입장권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니 사람들은 소비한다는 의식 없이 소비하고."


(...)


"그런데 그게 수십만에서, 큰 경기의 경우 수백만 뷰, 뭐 그런 식으로 그 넓은 대륙 수많은 사람의 호주머니로부터 나오다 보니까 다 모이면 어마어마한 금액이 되는 거지. 그러니까 선도연합회랑은 힘과 강제, 미끼와 현혹이라는 수단만 다를 뿐이지 속성은 비슷한 셈이야."


(...)


그러니까 이게 새로운 산업 시장인 건 맞는데, 그게 우리한테 꼭 필요한 시장인지는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는 거야. 기계가 인력을 대체하면 사람의 휴식시간이 늘어날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기계와 경쟁하는 꼴이 되고 만 착오처럼, 소비할 사람을 찾아 그 시장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새로운 생산 방식이라고 한다면 세상은 점점 더 자극적이고 헛된 욕망에 휩쓸릴 소지가 많아질 거라는 점도 예측할 수 없는 게 아니니까."


(...)


"그것 때문에 일전에 말했던 것처럼 경기 자체가 변질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거든. 모든 순간이 흥행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효율성을 끌어올리려고 하고, 승자독식의 사회구조를 독려하며 경쟁에 패해 약자로 판명 나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있는 거야. 오직 강자만이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환호받을 자격을 얻게 되고 그리하여 모두가, 심지어 편법적이고 부정한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성공부터 하고 봐야 한다는 시각에 매몰되고 마는 거지."


(...)


"이종격투기라고 들어봤어?"

"네."

"그 경기가 표방하고 있는 슬로건이 무규칙이야. 복싱에 발 기술을 넣어 입식 타격이라는 형식을 만들고, 거기에 그래플링이라는 그라운드 기술까지 포함해서 시합을 진행하는 건데, 물론 그게 문제라는 건 아니야. 다만 복싱보다는 더 자유로운 형태의 규칙이 적용되고 그만큼 더 많은 부분에 폭력이 허용되는 상황인 건데, 문제는......"


(...)


"문제는 인간에겐 체력적인 한계가 있어서 정해진 시간 안에 두 사람이 힘을 겨루며 그 모든 기술을 소화할 수가 없다는 거야. 하지만 사람들은 소화하기를 기대하고, 선수들이 그걸 소화하려면 그야말로 초인적인 체력이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그러다 보니 결국 약물에 손을 댈 수밖에 없는 거야."


(...)


"약물이 의미하는 바가 뭐냐. 바로 불공정이거든. 그런데 경기를 주관하는 단체가 약물 규제를 다른 스포츠와 달리 엄격하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체력이라는 부분에 있어. 체력의 한계에 다다른 두 선수의 시합이란 그야말로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힘겨루기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인간이 훈련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체력의 한계점을 그들도 잘 알고 있는 거지."


(...)


"그래서 그렇게 흥행을 위해 하나둘씩 규제를 풀고 규칙을 해제하다 보니 어느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더 많은 부분에까지 허용이 이루어지고, 결국 다시 예전의 노예 경기로 전락하고 만 거야. 아무런 보호대도 하지 않은 무릎으로 얼굴을 가격하고 팔꿈치로 안면을 으깨서 하얀 그라운드에 온통 피를 쏟아내며 선수들은 함께 뒹굴고, 피칠갑을 한 채 뒤엉킨 선수들의 극단적인 폭력을 보며 사람들은 희열을 느끼고, 선수들은 그들이 지급하는 대전료와 페이퍼뷰 수당을 받기 위해 자기 몸을 거리낌 없이 약물에 노출하면서 극한으로 체력을 소모하지. 자본과 흥행의 노예로 전락해서 말이야."


(...)


"그런데 이 이종격투기를 하는 선수들에게 페이퍼뷰가 더 무서운 점은, 그 수익의 대부분을 프로모터와 주최 측이 가져간다는 점이야. 그나마 복싱은 링에 직접 오른 선수가 수익의 가장 많은 부분을 가져가는 데 반해, 무규칙으로 제한이 풀린 이종격투기는 링에 올라 온몸을 던져 싸운 선수가 오히려 그 수익의 가장 적은 부분을 가져가. 복싱은 선수가 칠 할 이상을 가져가는데 이종격투기는 프로모터와 주최 측이 거의 팔 할 이상을 가져가니까, 현대판 노예 계약과 다를 바 없는 거지. 말 그대로 재주는 선수들이 부리고 돈은 프로모터와 주최 측과 페이퍼뷰 컴퍼니가 다 갖는 꼴이야. 그들의 카르텔이 어떻게 선수들을 착취하는지 명명백백히 보여주고 있지."

담임은 자기가 말해 놓고도 그런 시스템은 말도 안 되는 구조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과거에 비해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다는 현대에 이런 로마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가 찰 노릇인데, 문제는 아무도 이 문제를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야. 선도연합회를 옹호하는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


"선수들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 해. 왜냐하면 그렇게라도 링에 오르지 않으면 아예 자기들이 설 자리조차 없다고 생각하니까. 분명히 다른 길이 있음에도 그들 스스로 그렇ㄱ 굳게 믿고 있으니, 결국 선도연합회처럼 경기를 주관하는 자들이 세운 질서를 선수들이 오히려 더 지키고 유지하는 셈이야. 무규칙을 주최하는 집단도 선도연합회와 똑같이 독점적인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까라면 까야하는 상황인 거거든. 그러니까 뭔가 부당하다고 생각해도 말조차 못 꺼내는 거야. 그랬다간 곧 그곳에서 배제되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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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이 그야말로 격노했던 이유는 그 건물을 사들인 후 재건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리 층을 제외한 다른 층의 임차인들을 모두 내쫓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얘길 들어보니 계약 기간이 아직 만료되지 않은 입주자들은 그래도 잘 구슬리고 웃돈도 좀 얹어주어 큰 마찰 없이 내보냈는데, 마침맞게 계약이 만료된 일층과 이층의 세입자들은 그 어떤 협의도 없이 그야말로 매몰차게 내쫓았다는 것이다.


(...)


"내가 너한테 늘 경계하라고 했던 말이 뭐야. 바로 그런 거였어. 자기가 필요하다고 남 사정 볼 것 없이 가진 힘만큼 뭐든지 다 함부로 손에 넣으려는 태도. 그게 선도연합회 애들이 하던 짓 아니야?"

나는 담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깨닫고 있었지만 잠자코 들었다.

"우린 마구잡이 싸움꾼이 아니라 복서야. 복싱에는 규칙이란 게 있어. 상대를 무너뜨려야 하지만 서로 합의한 규칙 안에서 무너뜨려야 하는 거야. 그리고 굳이 규칙이 아니어도 스포츠맨십이라는 게 있어. 그걸 지키지 않는 선수는 아무리 잘 싸워도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어 있어. 너도 이미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잖아. 딱히 규칙을 어긴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왜 그런 선수를 외면하겠어."


(...)


"사각의 링은 내가 지배해야 하고 나만의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막 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야. 마구잡이로 개싸움을 해서 승리하는 공간이 아니라고. 우리가 싸움 이전에 상대를 존중하는 방법부터 가르치는 이유가 뭐야. 일순간은 적이지만 그들은 크게 보면 우리와 같은 동업자들이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라고. 그런 사람들을 단지 지금 그들보다 더 강하다는 이유로 그렇게 마구 상처 입히고 무너뜨리면 결국 다 같이 침몰하고 마는 거야. 배가 균형을 잃어 소용돌이에 휘말리는데, 좀 더 센 놈들이라고 용빼는 재주가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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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 벨트가 채워지고 나의 글러브가 허공 높이 솟아오를 때도 나는 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바라는 삶은 무엇인가. 한 가지 분명했던 건 지금 이 환호의 순간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섯 체급을 석권한 세계 챔피언. 하지만 분명 포기하려던 그때 공이 울리지 않았다면 나는 이룰 수 없었던 꿈. 그런데 막상 이루어진 자리에 서고 보니 이것은 확실히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떤 삶을 원하는가.

담임, 누나, 할아버지와 같은 삶. 그들 자체. 자신이 가진 모습 그대로 한 점의 꾸밈도 없이, 마치 시계처럼 정확히 반복되는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생활에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그들 그 자체. 꾸밈에 눌려 스스로를 피로하게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행동하는 사람들,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만이 찾을 수 있는 패턴. 나는 그들을 통해 원하는 삶의 반복된 패턴이 곧 행복이라는 것을, 처음엔 몰랐지만 서서히 몸으로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때 그들의 모습에서 무언가 내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을 보았던 걸 기억했다. 나의 미래는 분명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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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고가 발생한 시각은 내가 계체를 하기도 한참 전이었다. 그러니까 한영기는 서해에서 공항으로 이어지는 신자유대교가 붕괴된 사건을 시합 전날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영기만 알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나와 담임과 몇몇 시합 관계자를 제외하곤 전 세계인이 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영기는 우리에게 말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설마 그 대교 위에 누나와 할아버지가 탄 버스가 있었을 거라곤 짐작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그냥 한국에서 안타까운 참사가 일어났다고만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그냥 한국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참사?"라고 중얼거린 담임은 이내 "너는 한국 ㅏ람이 아니냐? 이 개새끼야?" 하고 주먹을 다시 휘둘렀지만 한영기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 두 팔을 들어 올려 보이며, 진정하라는 미국인 특유의 제스처를 취했다.


(...)


담임과 내가 간절히 기도했던 건 오직 단 하나였다. 누나와 할아버지가 탄 공항 리무진 버스가 그 시각 그 대교 위를 지나지 않았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설혹 지났다고 해도 천운이 도와 교각 위의 생존자 명단에 포함되었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믿기를 원치 않았을 뿐, 그 어느 쪽의 상황에라도 해당했다면 우리는 이미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을 터였다. 알지만, 알고 있었지만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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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했다. 신자유대교의 참사는 예견된 재앙이었다고. 내륙과 국제공항을 잇는 대교가 이미 두 개나 있는 와중에 새로운 대교가 더 필요한가에 대한 의문이 계획 당시에도 이미 제기되었고, 기존 대교들과 달리 수심이 깊은 바다를 가로질러 이어지게 될 신자유대교는 바다의 횡풍과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할 안전성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첨단공학의 집합체가 되리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의해 무람없이 추진되었고, 이것이 성사됨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공학기술 수준이 세계만방에 드러나게 될 것이며, 그것은 결국 우리나라 토목 건설 분야 대기업들의 새로운 지평으로 평가되어 마침내 국가 전체의 성장 동력으로 작용하게 될 거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고 했다. 그들과 더불어 이 프로젝트가 동북아시아의 허브 공항인 우리 국제공항과 국제적인 비즈니스 도시로 발도움 중인 서해안 항구도시의 시너지로 작용해, 세계적인 복합 물류 단지를 조성할 수 있으며 동시에 수도권 도심과의 통행시간을 단축해 산업 물류 비용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했다.

그들의 아집이 모여 이 프로젝트를 밀어붙였다는 말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 신자유대교가 결국, 대한민국의 산업 성장과 재도약의 상징으로 평가될 거라고 입을 모았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관련된 모든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었고, 무리한 규제 완화를 위해 정재계와 언론의 담합과 부정과 부패와 각종 비리가 저질러졌고, 그렇게 완화된 규제를 바탕으로 시작된 교량 건설은 그러므로 부실시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이 프로젝트를 반대했던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

사람들은 싸웠고 나는 다 개지랄이라고 생각했으나 담임은 달랐다. 어느새 진상규명위원회에 뛰어들어 사람들과 함께 집회도 열고 단식투쟁도 감행했다. 나는 그런 담임을 보며 다 부질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해다. 인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아무 의미 없었다. 진상이고 나발이고 내겐 다 필요 없었고 의미 없었다.

하지만 담임은 이 모든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해서 참사의 근원과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벌어졌고 다 끝났는데 이제 와서 도대체 왜 그래야 하냐고 내가 농성장에서 발작적으로 소릴 질러도 담임은 그저, 이런 일이 한번 묵과되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따름이었다. 이 참사는 부패한 기업과 부정한 기관과 무능한 정부가 만든 재난이므로 이대로 넘어가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고 담임은 말했다.

그러면 밥이나 먹으면서 그 짓을 하시든가요, 하고 내가 말을 싸질러놓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담임이 단식 중이던 천막으로 오 톤 트럭이 달려들었다. 그날, 그곳에서 투쟁 중이던 위원회 핵심 인원 세 명이 즉사했고 두 명이 병원으로 호송되었으나 결국 숨을 거두었으며, 한 명이 크게 다쳤다.

사고를 저지른 트럭 운전자는 현장에서 도주했으나 이틀 만에 검거되었고, 그는 급발진 사고였다고 주장했으나 차량 결함은 발견할 수 없었다. 운전자가 만취 상태인 걸 봤다는 사람이 등장했고, 그가 도주한 것이 아니라 검은색 세단에 실려가는 걸 목격했다는 사람도 나타났다. 당시 사고 현장엔 사복 경찰이 있었음에도 그를 검거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사복 경찰이 왜 그곳에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 또한 제기되었다. 정부에서 언론을 통제한다는 말이 돌았고 방송 통제를 지시하는 방송통신위원회의 내부 문건이 유출되었다.

이 일련의 사태를 규탄하기 위해 모인 시위대를 정부가 또 과도하게 무력 진압했는데, 도리어 시위대가 너무 과격했으므로 정부의 무력 진압이 불가피했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언론 보도 내용과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에서 전하는 사진과 목격담은 상반되었다.

담임은 즉사한 세 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도리어 담임가 시위대를 욕했다. 시위대는 폭력 시위로 국가를 전복하려는 불순 세력이라고 했고 담임은 방구석에 앉아 있지 왜 기어 나왔느냐고, 그러니까 자초한 일이라며, 죽을 만한 일을 하니까 죽은 거라며 그들은 터진 주둥아리라고 제멋대로 지껄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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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까지 단 한 번의 불평불만도 없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여 왔다. 똥간에서 태어난 것도 받아들였고 버려진 것도 받아들였다. 남들 다 화목한 가정에서 존나게 행복하게 살 때도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원망하지 않았다. 나는 잘 견뎌왔다. 그리고 제법 잘 이겨내기도 했다. 오만 개새끼들이 나를 짓밟으려 할 때마다 나는 버티고 견디며 나 자신을 지켜왔다. 개새끼들을 이겨내니 좆같은 소년원이 짓눌렀지만 그래도 나는 견뎠다. 개 같은 권투연맹이 개지랄을 떨었어도 나는 참았다. 그 모든 걸 참고 견디고 깨닫고 반성하고 이겨내면서도 끊임없이 진짜가 되려고 노력했는데, 세상은 알리도 담임도 누나도 할아버지도 그 어떤 행복도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 날보고 어떡하라고. 날보고 도대체 어떡하라고. 이 개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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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태국 선수가 망설이는 기색이 느껴질 때마다 내가 그의 몸통을 끌어안고 약을 올렸다. (...)

영어로 더듬거리는 내 말을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그는 기세를 늦추지 않았고 있는 힘을 다해 나를 두들겨 팼다. 나도 맞을 수 이는 만큼 맞았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게 나의 마지막 시합이므로 당신들이 내가 그렇게 두들겨 맞기를 원한다면 당신들이 원하는 만큼 맞아 주겠다고. 그게 내가 당신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한국에서 열린 경기였던 만큼 승패와 관계없이 기자회견이 열렸는데 재미있었던 건, 내 자리에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세게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철조망 안에 갇혀 기자회견을 진행하게 되었다. 내가 건너편에 앉은 태국 선수를 보고 웃자 그도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문득 언젠가 담임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철조망은 감옥의 상징이고 감옥은 권력의 상징이며 가장 강력한 질서유지의 수단이라던 말. 그러니까 저들은 지금 내게 자신들의 권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장 강력한 질서유지의 수단을 활용하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이마에 붕대를 감은 채 철조망 안에 앉아 껄껄거리고 웃었다. 

기자들은 승자에 대한 예우로 태국 선수에게 몇 가지 형식적인 질문을 던진 뒤 대충 답변을 듣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시선과 카메라의 초점을 내게로 집중시켰다. 그러고는 시합과는 전혀 상관없는 질문들을 내게 쏟아부었다. 그들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것들, 가십거리가 될 만한 궁금증들.

질문을 마치 산탄총처럼 쏘아대던 기자들은 묵묵히 자신들을 바라보고만 있는 대가 전과 다름없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것을 예상했는지, 반쯤 포기한 얼굴들이 되었을 때 내가 마이크를 끌어당겨다. 마이크에서 징, 하는 소리가 한 번 울리고 잦아진 뒤 잠시 고요가 흘렀고,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당신들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들은 기자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다른 이들에게 묻듯, 서로 얼굴을 돌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때 저 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장태주 씨, 당신이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을 찾는 거야. 당신의 사랑을 찾아. 찾아보면 어딘가에 반드시 있어. 당신만의 사랑을 찾아서 당신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계로 떠나. 이곳은 당신에게 어울리는 세계가 아니야!"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고 동시에 그쪽을 향해 플래시가 습관적으로 터져대는 바람에,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볼 수 없었다. 분명히 거기 누군가 우뚝 서 있었는데, 커다란 키를 가진 그 사람의 얼굴은 그러나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방에서 터져대는 빛에 가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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