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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화][분노][스토아]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화에 대한 조언, 《화에 대하여》

by 노지재배 2017.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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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뷰하는 책은 2천 년 전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세네카의 《화에 대하여》이다. 


사이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세네카가 동생 노바투스의 물음에 답하는 형식의 서간문으로 돼 있다. 


책은 화의 원인과 화에 대한 정의, 화가 불러온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폐해 등에 대한 고찰과 함께 백해무익한 화를 다스리거나 피하는 법 등의 조언을 담고 있다.


화에 대하여 세네카




2천 년 전의 철학자의 책이다 보니 노예 제도나 여성에 대한 편견, 절대군주의 말도 안 되는 잔학성 등 시대에 맞지 않는 내용이나 시각도 없지 않다. 그러나 흄, 루소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 등 후대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스토아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쓴 저서인 만큼 2천 년이 흐른 지금에도 번뜩이는 통찰과 명확한 논리로 파헤치는 화의 정의에 머리를 끄덕이게 된다.


이 책에서 세네카는 화가 백해무익함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복수하려는 마음가짐인 화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추악하고 혐오스럽게 만들며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게 만드는지 설파한다.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화는, 화낸 사람에게 반드시 되돌아온다."

"화의 최대 원인은, "나는 잘못한 게 없어"라는 생각이다."

"화를 내어 이기는 것은, 결국 지는 것이다."

"왜 자신의 화는 정당하다고 여기면서, 다른 사람의 화는 인정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이 나보다 많이 가졌다고, 신에게 화내지 말라."

"화를 폭발시킬 때, 그때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라. 얼마나 험악하게 변하는지."

"화를 내며 보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짧은가."



책에서는 또 대표적으로 로마 시대를 비롯해 칼리굴라 황제, 알렉산드로스 왕, 크세르크세스, 캄비세스, 플라톤 등 역사적 인물들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곁들이면서 화라는 문제를 철학의 관점으로 파헤치고 있다.


세네카는 화는 우리 인생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으며, 이성에 의지해 화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화를 다스리고 견제하는 법을 다룬 세네카의 글은 쉬우면서도 유용한 방법과 사례, 비유를 통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도움을 준다.


세네카는 인간의 격정 가운데 가장 격렬하고 무서운 격정인 화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비이성적 감정의 폭발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 화라는 감정은 우리의 의지와 이성을 통해서 다스릴 수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철학적, 심리학적으로 밝히고 있다. 


특히, 세네카는 로마 제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부터 네로 이상의 광기를 가졌다고 알려진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에 이르는 통치하에 관용을 망각하고 적의와 분노가 소용돌이치는 시대를 살아냈다. 그리고 결국, 자기 제자였던 네로 황제가 명한 죽음으로 일생을 마감하는 얄궂은 운명을 맞은 철학자다.


이 광기의 시대를 살아 낸 세네카는 마치 의사가 몸의 질병을 다스리듯이 이성이라는 무기로 우리 정신 속의 화를 다스릴 수 있다고 설파했다. 책 제목은 《화에 대하여》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화를 다스리는 법에 더욱 무게가 실려 있는 만큼 철학책이면서도 실용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스트레스로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화는 어쩌면 현대인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감정의 하나처럼 여겨진다. 더군다나 '화병火病'이라는 신종 병명을 만들어 낼 만큼 화와 관련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한국인 만큼 이 책이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하겠다.


세네카에 따르면 화는 다른 감정들에 비해 특별히 더 비천하고 광포한 것으로, 오로지 격렬한 공격성만 가득할 뿐이다. 특히, 화는 상대방을 해할 수만 있다면 다른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화를 내는 당사자 스스로의 파괴까지도 받아들이게 만드는 맹목적인 격정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감정이 화를 촉발한다는 세네카는 더불어 "나는 잘못한 게 없어"라는 오만한 생각도 화를 키우는 연료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처럼 촉발된 화는 평정심을 잃고 일그러진 표정과 붉게 상기된 얼굴, 충혈되고 한곳을 노려보는 눈, 분노로 식식거리는 숨소리 등으로 우리의 모습을 추하고 혐오스럽게 만든다고 세네카는 말한다.


더구나 화라는 감정이 한 번 불타오른 뒤에는 자신의 잘못이 발견되거나, 극적인 상황의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결국 이러한 반대 정황들을 더욱 불같은 화로 덮어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맹목적인 일마저 벌어진다고 세네카는 한탄한다.


세네카에 따르면 결국,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이 열등하다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함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화를 통해 추악해지고 혐오스러워진 우리 자신의 모습과 복수와 앙갚음을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는 맹목성으로 결국 화의 폐해는 곧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세네카는 이러한 화를 판단하고 유예하기 위해서는 이성과 이를 통한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 수많은 순간들에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이러한 화가 얼마나 하찮은 일들을 걸고넘어지고 있는지 깨닫는다면 우리 인생을 보다 소중한 것들을 위해 쓰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반갑지 않은 손님인 화가 불쑥불쑥 머리를 들 때, 한 번쯤 깊은숨을 들이마시는 것처럼 세네카의 가르침을 떠올려 본다면 우리를 추하게 만들고 파멸로 이끄는 화와 조금은 멀어질 수 있을 것이다.


화에 대한 2천 년 전의 그것도 무거운 철학적 담론이라기보다는, 복잡다단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화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거나 피할 수 있을지 쉽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실용적인 철학 또는 심리학 책이라는 느낌으로 일독을 권한다.


 




■ 저자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고대 로마의 사상가이자 정치인이며, 시인이자 비극작가. 후기 스토아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네로 황제의 스승 겸 참모로도 유명하다. 

세네카는 에스파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로마에서 자라면서 수사학과 변론술, 철학을 공부했는데 특히 스토아 철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평생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했는데 젊어서는 천식과 결핵을 앓았고, 이에 자멸적인 우울증으로 자살 시도도 여러 차례 했다. 


늦깎이로 정계에 입문하지만 황제의 질투와 노여움을 사 8년간 코르시카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한다. 다시 로마로 복귀할 때 그에게 맡겨진 직책은 어린 네로의 가정교사라는 숙명적인 자리였다. 결국 5년 동안 그의 가정교사로, 네로가 황제가 된 후에는 10년 동안 그의 보좌역을 맡았다. 

네로는 황제가 된 후 처음 5년간 선정을 베푼다.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후로 네로의 폭정이 극에 달하자 회복하기 어려운 절망을 느낀 세네카는 관직에서 물러나 오로지 학문과 집필 활동에 몰두한다. 그러나 황제 암살 계획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아 결국 네로로부터 즉각 자결하라는 명을 받는다. 결국 세네카는 제자였던 네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스스로 혈관을 끊고 독약을 마시며 생을 마감했다. 


공포와 광기가 소용돌이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부침이 많은 삶을 살아온 세네카의 이러한 경험이 바로 그의 철학적 근간을 이룬다. 키케로와 함께 로마 철학을 대표하는 세네카는 《서간집》, 《대화》 등과 〈행복한 삶에 관하여〉, 〈관용에 대하여〉 등의 에세이와 9편의 비극 작품을 남겼다. 그가 남긴 저서들은 중세 이후 널리 애독됐으며, '제2의 세네카'로 불리는 몽테뉴와, 단테, 루소, 흄,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 책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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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의 싸움에서 그에게 고통을 가하고 타인을 벌하면서 피를 보고야 말겠다는 비인간적인 욕구로 감정이 격해졌을 때, 화는 그 상대방을 해할 수만 있다면 다른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다. 화는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겨누어진 비수의 칼끝을 향해 덤벼들며 앙갚음하는 당사자인 자신마저 나락으로 떨어질지라도 철저한 복수를 갈망한다.

따라서 어떤 현자들은 화는 <순간의 광기>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화는 마치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려 땅바닥 위의 거친 돌무더기로 변해버리는 건물과도 같이 한순간에 자제심을 잃어버리고, 품위를 내동댕이치고, 인간적 유대 따위는 아랑곳없이, 스스로 시작한 일이 무엇이든 오로지 그것에만 눈이 멀어 이성과 충고에는 귀를 닫고, 하찮은 이유로 격분하면서 무엇이 옳고 참된지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분별력을 잃고 자신의 태도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 (...)

화가 난 사람은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고 부풀어 올라 역겨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 이 격정은 혐오스럽다고 해야 할지 증오스럽다고 해야 할지 분별하기가 힘들다.

다른 모든 격정은 감출 수 있고 마음에 몰래 담아둘 수 있지만, 화는 저절로 끓어 넘치고 격해질수록 더욱 뚜렷이 표정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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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가벼운 질환을 치료할 때 처음에는 간단한 식이요법부터 시작한다. 의사는 환자가 먹는 음식과 물, 그리고 운동에 약간의 규칙을 부여하면서 환자의 생활방식을 사로잡아서 몸을 튼튼히 하려고 한다. 그러고는 절제가 건강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지켜본다. 절제와 규칙으로도 차도가 없으면 의사는 환자의 식단에서 몇 가지 요소를 뺀다. 그래도 환자가 반응하지 않으면 의사는 음식을 금지하고 단식으로 몸의 부담을 더는 방법을 시도한다. 이렇게 비교적 가벼운 조치들로도 효과를 보지 못하면 의사는 이제 피를 내는 치료법을 고려하고, 만일 신체에 붙어 있는 팔다리가 질병을 퍼뜨려 환자의 건강을 위협하면 절단 수술을 시행한다. 건강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치료법은 누구도 가혹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법을 집행하고 시민사회를 이끄는 사람도 가능한 한 말로 사람들의 품성을 치유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때 그는 가급적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의 행동을 올바르게 이끌고, 명예와 공정함에 대한 갈망을 마음속에 불어넣어 사람들이 악덕을 미워하고 미덕을 소중히 여기도록 해야 한다. 그다음 단계로 그는 보다 엄격한 화법을 채택해야 하지만 그 수준은 아직 경고와 훈계에 머문다. 이 단계도 효과가 없다면 마지막으로 그는 형벌에 의존하는데, 이때의 형벌은 되도록이면 가벼워야 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물론 최악의 범죄에는 최악의 형벌을 내리되, 당사자에게조차 죽음이 차라리 나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다만 한 가지 측면에서 그는 의사와 다르다. 의사는 자신이 더 이상 생명을 연장해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출구를 제공하는 반면, 그는 사형수를 멸시와 오욕에 찌든 삶으로부터 강제로 떠나게 만든다. 이는 그가 누군가를 처벌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기쁨을 느껴서가 아니라(현명한 자에게서는 그렇게 비인간적인 잔인성을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이고, 살아 있는 동안 사회를 이롭게 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공화국이 이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앙갚음을 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화는 그 자체로 인간의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화는 앙갚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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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들은 화를 제거하는 대신 적당히 조절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과잉을 제거하고 화를 건강한 수단으로 축소시켜 적절히 유지하면 행동이 유약해지거나 마음의 활력이 약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첫째, 해로운 요인들을 받아들인 다음에 관리하고 조절하기보다는 애초에 차단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더 쉽다. 일단 해로운 요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그것은 이를 통제하고자 하는 사람보다 더 강력해져서 삭감이나 축소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이성 자체는 고삐가 주어져 있어 자유자재로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으나 이는 오직 격정과 분리되어 있는 동안에만 그러하다. 애초부터 격정을 차단하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일단 이성이 격정과 뒤섞여 오염되고 나면 격정을 통제하지 못한다. 우리의 사고는, 일단 흔들리고 자신의 발판을 잃고 나면 난폭하게 밀치고 들어오는 것에 노예가 되어 끌려다닌다.

어떤 것들은 처음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지만, 다음 단계에 들어서면 제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를 끌고 다니며 좀체 원상태로 돌아갈 기회를 주지 않는다.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독립적인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며, 하강하는 힘에 저항하거나 곤두박질하는 몸의 속도를 늦출 수가 없다. 일단 뛰어내리는 순간 숙고와 후회의 여지는 사라지고, 뛰어내리기 전이라면 자유로이 거부할 수도 있었을 냉혹한 결과를 맞게 된다. 바로 그렇게 마음이 화, 사랑, 그 밖의 격정에 굴복하고 나면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무작정 돌진하게 된다. 마음 자체의 무게 그리고 아래로 향하려는 악덕의 본성 때문에 백이면 백 마음을 깊은 나락으로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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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방법은 화가 나려 할 때 최초의 싹을 억누르고 그 최초의 충동에 굴복하지 않도록 싸우는 것이다. 일단 화가 우리를 항로 밖으로 끌고 가면 안전한 곳으로 되돌아오기가 어려워진다. 화가 마음에 들어와 우리가 그것에 주권을 내어주게 되면 이성은 한 치도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그다음부터 화는 네가 허락하든 말든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것이다.

우리는 이 적敵 나는 이 점을 강조한다.)을 최전방에서 저지해야 한다. 적이 치고 들어와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점령당한 사람의 저항은 무용지물이 된다. 사실 마음은 따로 떨어진 곳에 존재하면서 외부에 별도로 존재하는 격정을 감시하거나 그것이 더 이상 밀고 들어오는 것을 제어할 수가 없다. 그보다는 마음 자체가 그 격정으로 변한다. 이 때문에 마음은 일단 변질되고 약화되면 애초의 유용하고 건강한 활기를 되살리지 못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성과 격정은 별개의 서로 다른 장소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 좋은 상태나 더 나쁜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이 화에 굴복했울 때, 이미 악덕에 사로잡히고 압도돼버린 이성은 어떻게 부활할 수 있겠는가?

혹은 비열한 요소들의 혼합체가 지배하는 어두운 상태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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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화에는 어떠한 유익함도 없으며, 마음을 분발시켜 용맹한 행동으로 이끌지도 않는다. 미덕은 악덕의 도움을 필요로 해서는 안 되며,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 공격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있을 때면 미덕은 화를 내듯 폭발하지 않고 자연스레 솟아 나와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만 흥분하고는 이내 원래의 평정심을 되찾는다. 이는 투석기로 무기를 발사할 때 어느 정도의 힘을 가할지는 포수에게 달린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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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화에 제한을 두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화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더 이성 화가 아니다. 내가 아는 한, 화는 재갈이 물려 있지 않은 야생마와 같기 때문이다. 제한을 허용하지 않는 화는 파괴적인 것일 뿐, 유용한 수단으로 볼 수 없다. 결과적으로 화는 화가 아니거나 유용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 도움이 되는 병사는 자기편의 전략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병사일 것이므로, 격정은 병사로서든 지휘관으로서든 똑같이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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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의 노예가 된 마음은 흡사 폭군이 다스리는 영토에 머무는 것과도 같다. 미덕이 악덕의 후원에 의지한다면 부끄러운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성이 격정에 의존해야만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이성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이성은 격정의 짝이 되고 격정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성이 없는 격정이 무분별한 것이듯 격정이 없는 이성이 무력하다면, 둘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하나가 있어야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있다면 둘은 같은 수준이다. 그러나 누가 격정과 이성을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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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적과 맞닥뜨렸을 때에는 화가 필요합니다."

이때만큼 화가 불필요할 때는 없다. 적과 맞설 때는 공격적인 행동이 잘 통제되어야 하고, 명령에 따라야 하며, 자유 행동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야만인들을 보자. 그들은 신체적으로 훨씬 더 강인하고 고난을 아주 잘 견디지만, 그들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 자신의 가장 큰 적인 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검투사도 마찬가지다. 기술은 그들을 보호하지만, 화는 그들을 무방비로 만든다.

게다가 이성으로 동일한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화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사냥꾼이 짐승에 화를 느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냥꾼으로 하여금 다가오는 짐승을 잡거나 도망치는 짐승을 뒤쫓게 하는 것은 화가 아니라, 이성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전투와 전쟁에서조차 화가 유리한 수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화는 조급함을 부르고, 적을 위험에 빠뜨리고자 하는 욕망은 경솔함을 불러들여 오히려 우리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다. 가장 믿을 만한 지혜는 상황을 오랫동안 신중하게 살피고, 끝가지 자제심을 발휘하고, 정해진 목표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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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서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어머니가 강간을 당해도 분노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는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왜 분노 없이 효심만으로는 충분히 그들의 수호자가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

선한 사람은 흔들리거나 주저함 없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것이면 선한 사람으로서 합당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만일 나의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 순간이라면, 나는 그를 지킬 것이다 만일 그가 이미 살해당했다면, 나는 복수를 할 것이다. 애통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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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나 가족의 편에서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나약하다는 증거다. 부모와 자녀, 친구들, 동료 시민들을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은 충동에 휘둘리거나 격분하지 않고, 책임감을 인식하고, 심사숙고해서 신중하게, 그리고 기꺼이 앞으로 나선다. 이것이 가치 있고 고귀한 행동이다. 화는 너무나 열렬하게 복수를 원하기 에 바로 그런 이유에서 화는 복수에 적합하지 않다. 사실 모든 욕망이 다 그렇듯이 화는 너무나 성급하고 무모해서 목표를 향해 황급히 돌진하다가 스스로 방해물이 된다. 바로 그래서 화는 평화에도, 전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화는 평화를 마치 전시처럼 혼란스럽게 보이게 만들고, 전시에는 "전쟁의 신은 누구에게도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잊고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의 마수에 걸리고 만다.

더욱이 악한 행동은, 때때로 그것이 어떤 면에서 효과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용인할 만한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어떤 병은 열을 내면 낫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몸에 열이 없는 상태가 더 바람직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건강을 찾기 위해 질병의 힘을 빌려야 한다면 그것은 형편없는 치료법이다. 독약이나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 혹은 난파 사고가 뜻밖의 도움이 될 때가 있듯이 가끔은 화도 그럴 때가 있지만 이를 건강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 결과가 종종 역병으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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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 점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좋다. 정의가 좋은 것이라면 거기서 뭔가를 좀 빼면 더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용기가 좋은 것이라면 누구도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줄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화 역시 커지면 커질수록 좋아야 한다. 좋은 것이 더 커지는 것을 그 누가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화가 커지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존재 자체가 부적절한 것이다.. 작을 때는 괜찮고 커지면 악이 되는 선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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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내지 않고서는 단 한 번도 용기를 낼 수 없었을 부류를 제외하고는 화를 통해 더 용감해지는 사람은 없다. 화는 미덕을 거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미덕의 자리에 대신 들어앉는 것이다. 이 사실은 어떤가? 만일 화가 좋은 것이라면, 화는 인격이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 필수적으로 따를 것이다. 반면에 가장 화를 많이 내는 사람들은 아기들과 노인들, 그리고 환자들일 것이다. 어떤 쪽으로든 허약한 사람들이 불평을 하게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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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저지른 자는 훈계를 통해서든 강제력을 동원해서든 부드럽게 때로는 엄격하게 그 행동을 교정해주어야 한다. 남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도 우리는 그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꾸짖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치유의 대상인 환자에게 화를 내는 의사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그들에게 어떤 희망의 싹도 발견할 수가 없고 유순함이라곤 전혀 없어서 도저히 악한 행동을 고칠 수가 없다면 어떤가? 손을 대는 것마다 더 나쁘게 만들고 말겠다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의 사악함을 저지시킬 방법이 달리 없다면 그를 인간사회에서 격리시켜야겠지만, 그런 조치를 취할 때도 증오는 배제되어야 한다.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그를 그 자신으로부터 구해줌으로써 나는 그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를 내가 왜 증오해야 하는가?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팔다리를 미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애처로운 형태의 치유다. 우리는 미친개를 죽이고 걷잡을 수 없이 흉포한 소를 도살하고 가축이 병에 걸리면 남은 무리들에게 전염되는 일이 없도록 그것을 처리한다. 우리는 기형이나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기들을 질식시키거나 물에 던져 죽이기도 한다. 해로운 것을 건강한 것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화가 아니라 이성이다.

하물며 벌을 주는 자가 화를 내는 것만큼 적절하지 않은 일은 업다. 왜냐하면 오래 생각한 끝에 내려지는 징벌이 교정에 더욱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노예에게 이렇게 말한 것은 그래서이다.

"내가 지금 화가 나기 때문에 너를 매질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겠다."

그는 노예를 야단치는 일을 화가 가라앉고 이성을 되찾은 뒤로 미루었지만 막상 그때가 되면 외려 자신을 돌이켜보고 책망했다. 소크라테스조차 자신을 화에 내맡길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누가 자유자재로 자신의 격정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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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길로 빗나가고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감금할 때, 교정을 담당한 자가 화를 낼 필요는 없다. 화는 마음의 잘못이므로, 마음의 잘못을 저지르는 자가 남의 잘못을 교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강도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까? 남을 독살한 자에게도 화를 내지 말아야 합니까?"

그렇다. 사혈요법(몸속의 어혈을 뽑아내어 병을 고치는 치료법)을 위해 내 몸에 피를 낼 때 나 자신에게 화를 내지는 않는다. 어떤 종류의 징벌이든 나는 그것을 오로지 치유를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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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경험 많은 의사로서 군대의 병원이나 부유한 자의 집에 가게 되었다면 다양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처방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치유하라는 명을 받아 그곳에 온 나는 그들의 마음에 온갖 악덕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본다. 질환이 다 다르므로 치료법도 그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어느 환자는 약간의 절제를 통해, 어느 환자는 일정 기간 타지에 머물게 함으로써, 어느 환자는 고통을 통해서, 또 다른 환자는 박탈을 통해 가난을 안겨줌으로써, 그리고 어느 환자는 검으로써 치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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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이란 화가 아니라 흔들림 없는 단호함이다. 만일 악행에 대해 선한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이 옳다면 악인들의 행운에 대해서는 시기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사실, 일부 부도덕한 자들이 그들에게 상응하는 어떤 불운도 겪지 않고 오히려 승승장구한다면 이보다 분노할 만한 일이 또 있겠는가? 하지만 선한 사람은 그들이 누리는 이익을 시기하지 않고 담담히 바라보듯, 그들의 범죄에 대해서도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훌륭한 재판관은 잘못된 행동에 유죄판결을 내릴 뿐 그를 증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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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납게 휘몰아치며 맹공을 퍼붓던 바람은 얼마 못 가서 기세가 꺾이고, 잔인한 징벌 외에는 아무것도 안중에 없던 화는 막상 형이 집행되어야 할 때는 이미 한풀 꺾여 누그러진다.

격정은 쉽게 희미해지지만, 이성은 균형을 잘 유지한다. 하지만 가끔은 화가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을 때라도 죽어 마땅한 자들이 너무나도 많다면 두서너 명의 피를 보고는 형의 집행을 멈추기도 한다. 원래 최초의 타격이 날카롭다. 동면을 끝내고 구멍에서 처음 기어 나오는 뱀의 독은 치명적이지만, 잦은 공격으로 독을 다 쓰고 나면 독사의 이빨도 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같은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똑같은 벌을 받지 않고, 보다 작은 죄를 범한 자가 더 큰 벌을 받게 되는 것은 그가 불운하게도 최초의 화 앞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화는 무엇보다 불공정하다. 화는 어느 때는 필요 이상 내달리고, 어느 때는 가야 할 곳보다 미리 멈춘다. 그것은 충동에 휘둘리고 변덕스러우며 증거 따위엔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변호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며, 설사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 할지라도 절대 권한을 놓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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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양쪽에 모두 말할 시간을 주고, 스스로의 판단에도 유예의 시간을 가지면서 진실을 밝혀내고자 한다. 하지만 화는 정신없이 서두른다. 이성은 판결이 공정하기를 원하지만, 화는 단지 그것이 공정해 <보이기>를 바란다.

이성은 오로지 문제가 되는 그 사건만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만, 화는 문제와는 상관없는 하찮은 것에도 흔들린다. (...) 종종 변호인을 향한 악감정 때문에 애꿎은 피고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도 한다. 설사 진실이 그 얼굴을 드러내도 사람들은 오히려 잘못을 더 옹호하고 지지한다. 그것은 자신이 반박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시작이 잘못되었더라도 재고하기보다는 그대로 밀고 나가는 거이 더 명예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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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는-내가 강조하건대-이와 같은 사악한 특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통제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은 만일 진실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 같으면 진실 자체에 점점 더 분노하게 된다. 그것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고함을 지르고 욕설과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자기가 희생시키려고 작정한 사람을 끝까지 쫓아간다.

이성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이성은 말없이 조용히 일족의 뿌리를 뽑으며 나라에 해악을 끼친 자의 처자까지 모두 멸족시킨다. 이성은 그들의 저택을 허물어뜨리며 평지로 만들고 적들의 이름조차 지워버린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를 악물거나 고개를 홱 쳐들거나 하는 등의 재판관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없다. 특히 중대한 판결을 내릴 때 재판관은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하고 고요한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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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현상들은 우리가 제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찬물을 끼얹었을 때 덜덜 떨리는 것, 싫은 것을 만질 때 손을 움찔하게 되는 것, 끔찍한 소식을 들었을 때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것, 외설적인 말을 들었을 때 얼굴이 붉게 상기되는 것, 낭떠러지에서 밑을 내려다볼 때 얼굴이 붉게 상기되는 것, 낭떠러지에서 밑을 내려다볼 때의 아찔한 현기증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런 반응들은 우리의 권한 밖에 있으며 이성으로는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러나 화는 이와 반대로, 우리의 명령으로 패주시킬 수가 있다. 화는 우리의 의지에 좌우되는 마음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숙명적으로 겪게 되어 있어 제아무리 최고의 현자일지라도 피할 수 없는 그런 일이 아니다.

우리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믿을 때, 우리를 뒤흔드는 최초의 정신적 충격은 이성과는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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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에 찾아오는 움찔하는 느낌은 이성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다.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너의 눈을 찌르려 하면 저절로 눈을 감게 되고 다른 사람이 하품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따라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성으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 물론 우리가 거기에 점차 익숙해지고 조심하려고 계속 신경을 쓴다면 그 강도가 약해질 수는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움직임은 숙고에 의해 생겨나고 숙고에 의해 제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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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의 이음매들이 사방으로 느슨해진 틈이 벌어져서 배 안으로 물이 많이 들어올 때 선장이 선원들에게, 혹은 배 자체에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보다는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가 더 이상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바닥에 괸 물을 파래박으로 퍼내고, 보이는 틈은 최대한 틀어막고, 배 밑바닥에 물이 스며들게 하는 보이지 않는 틈에 대해서도 대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퍼내도 퍼내도 물이 줄지 않고 자꾸만 더 들어온다고 해서 그가 하던 일을 내팽개치지는 않을 것이다. 없어지지 않고 자꾸 생겨나는 악에 맞서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악을 근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위를 차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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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의 화가 남에게 위협이 될 만큼 강력하다면 그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면서,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증오의 대상이 된다. 무시당하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더 위험하다. 반면에 우리의 화가 별로 힘이 없다면 오히려 남들에게 경멸을 당하고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아무 소득도 없이 식식거리며 화를 내는 것만큼 한심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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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지우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지 말라. 우리를 아프게 만드는 질병은 치유가 가능하며, 우리는 고결한 존재로 태어났기에 자신의 결함을 바로잡겠다고 스스로 마음만 먹으면 자연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줄 것이다. 그 미덕에 이르는 길이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가파르거나 험준한 것도 아니다. 그 길은 의외로 평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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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절대 화에게 출입 허가를 내줘서는 안 된다. 하지만 가끔 누군가의 해이해진 마음에 자극을 줄 필요가 있을 때는 짐짓 화가 난 척할 수도 있다. 마치 말이 전속력으로 달리려 하지 않을 때 박차를 가하고 횃불로 자극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


몸으로 싸우는 격투 선수들조차 자신을 때리는 상대방의 힘을 소진시키려고 고통스러운 타격을 참아낸다. 그가 마침내 주먹을 날리는 때는 화가 날 때가 아니라 기회가 왔을 때다.

체육관에서 선수들을 훈련시키는 최고의 레슬링 감독인 피로스는 선수들에게 절대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수시로 일렀다고 한다. 화는 기술을 흔들리게 하고 오로지 상대를 해칠 생각에만 몰두하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성은 인내를 권하지만, 화는 복수를 재촉한다. 애초에 제거할 수 있었던 고통의 원인을 그냥 놔두면 우리는 결국 더 큰 불행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단 한마디 모욕의 말을 참지 못해서 추방을 당했다. 사소한 모욕의 말을 조용히 참아낼 마음이 없었기에 더 무거운 불행에 휘말린 것이었다. 자신이 누리던 최대한의 자유가 어떤 식으로든 침해된 데 분개한 나머지 그들은 제 목에 스스로 예속의 굴레를 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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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가들은 때로 화가 났을 때 더 변론을 잘합니다."

아니, 그는 짐짓 화난 척하는 것뿐이다. 이는 배우들이 연기를 할 때 실제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화난 연기를 해서 관객을 감동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재판관들 앞에서나 군중 앞에서나 어디서건 자기 의지대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할 때 우리는 때로는 분노를, 때로는 공포심을, 때로는 연민을 직접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들의 마음에 똑같은 감정을 불어넣고자 한다. 종종 진짜 격정이 못 해낼 일을 오히려 위장된 격정이 이뤄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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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격정의 근본 원인과 맞서 싸워야 한다. 화의 원인은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쉽게 믿어버려서는 안 된다. 아무리 명백하고 확실해 보이는 것도 그 자리에서 바로 승인을 해서는 안 된다. 더러는 거짓이 진실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판단에 앞서 반드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 진실은 자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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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말을 쉽사리 믿는 것만큼 큰 해약은 없다. 어떤 무제에 대해서는 불신하고 의혹을 품는 것보다 속아 넘어가는 편이 차라리 낫기에 네가 아예 귀담아듣지 말아야 할 것들도 있다. 너는 의심과 억측을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버려야 한다. 이것들만큼 맹랑하게 너의 화를 부추기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하면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는 어떻게든 찾아질 것이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담백함과 너그러운 판단이다. 우리 눈앞에서 너무나도 명백하게 벌어진 일이나 현행범으로 잡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믿지 말라. 그리고 우리의 의심이 근거 없는 것이었다고 밝혀질 때마다 스스로를 책망하라. 자신에 대한 이런 꾸짖음은 남의 말을 쉽사리 믿지 않는 습관을 들이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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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짜증을 내서는 안 된다. 하인의 행동이 굼뜨다든지, 식탁을 아무렇게나 차렸다든지 등 이런 일에 화를 내는 것은 미친 짓이다. (...)

의자를 바닥에 

끄는 끽끽 소리가 거슬려 화를 내는 사람이 공적인 삶에서 오는 갈등을 어떻게 견디며, 민회나 원로원에서 자신을 향해 빗발치는 험한 말들을 어찌 견뎌낼 수 있는가? 눈을 녹이는 노예의 일솜씨가 틀려먹었다고 화를 내는 사람이 하절기 전투의 배고픔과 갈증을 참고 견딜 수 있는가? 참을성 없고 절제할 줄 모르는 호사스러움만큼 화를 부추기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마음을 강하게 단련시키면 아주 심각한 타격이 아닌 웬만한 것은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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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영혼이 없는 물건에게 화를 내는 것은 말 못 하는 짐승에게 화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병자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동물에겐 의지가 없기에 우리에게 부당한 행동을 할 수도 없다. 모든 부당한 대우는 의도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검이나 돌멩이가 우리에게 피해를 줄 수는 있지만 부당한 대우를 할 수는 없다. (...)

동물에게 화를 내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듯, 아이들에게 혹은 분별력에서 아이보다 나을 것 없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다. 공정한 심판관의 눈으로 보면, 그런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은 무지함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무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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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고 혜택을 주기도 하는 이런 자연현상들은 특별히 우리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 여름과 겨울이 순환하는 것 또한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는 아니다. 여름과 겨울이 순환하는 것 또한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는 아니다. 그런 것은 자신의 법칙대로 움직일 뿐이며, 그것을 통해서 신의 의지가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런 엄청난 일들을 불러일으킬 만큼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이 모든 현상들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이런 일들은 우리의 행복에 이바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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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벌이 내려졌다고 가정해보라. 우리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만 생각할 게 아니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에게 솔직해진다면, 우리는 사실 받아 마땅한 것보다 훨씬 가벼운 질책을 받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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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너를 험담하더라는 얘기가 들린다고 가정해보라. 그렇다면 네가 먼저 그를 나쁘게 말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얼마나 자주 악의에 찬 말을 했던가를 생각해보라.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는 거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행한 것을 돌려받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자. 어떤 이들은 우리를 위한답시고, 어떤 이들은 협박에 못 이겨서, 또 다른 이들은 모르고 했을 수도 있다. 설사 일부러 알고 그랬다 하더라도 오로지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려는 목적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농담을 하려다가 실수로 말이 헛나올 수도 있다. 혹은 일부러 우리를 괴롭히려고 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밀어젖히지 않으면 자기 목적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때로는 우리 마음에 들려고 했던 지나친 찬사가 우리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도 공연히 의심을 받은 적이 얼마나 많았고, 적절하게 행동했는데 운수가 사나워서 잘못된 행동처럼 보일 때는 또 얼마나 많았으며, 우리가 처음에는 미워했으나 결국 좋아하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보면 즉각적으로 화를 내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누군가가 우리 기분을 상하게 할 때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 역시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있지." (...)

우리는 남들의 악덕은 바로 눈앞에 두고 자신의 악덕은 등 뒤로 숨긴다. 아들이 공들인 연회에 대해서는 사치스럽다고 책망하는 아버지가 자신은 한술 더 뜨고, 맛있는 음식이라면 무엇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누리는 호사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다. 폭군이 살인자를 향해 격노하고 불경한 신전 약탈자가 좀도둑을 벌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악행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않고 악행을 저지를 사람에게 화를 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신을 돌아본다면 훨씬 더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도 이런 잘못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 나도 저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저런 행동을 비난하는 것이 나한테 과연 도움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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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에 대한 최고의 대책은 그것을 늦추는 것이다. 처음부터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사숙고하기 위해 화의 유예를 요구하라. 화가 처음에 맹렬한 기세로 습격할 때는 타격이 크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뒤로 물러선다. 한꺼번에 화의 뿌리를 뽑으려고 애쓰지 마라. 하나씩 하나씩 조금씩 뽑아서 버리면 언젠가는 화를 전부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성나게 하는 것 중에 일부는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말이고, 일부는 우리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이다. 남들이 우리에게 해주는 말을 너무 쉽게 믿어버려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이거나 혹은 자기 자신도 속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누군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마치 그 일로 인해 자신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가까운 친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악의를 가진 부류도 있다. 두 친구 사이에 몰래 함정을 파놓고는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안전거리에서 지켜보면서 쾌재를 부르는 부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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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아버지인가? 지금까지 그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혜가 너무나 크다면 우리는 설사 그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용서할 의무가 있고, 혹은 그가 우리를 이롭게 하려다가 피해를 주었을 수도 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여자인가? 여자들은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그 일을 한 것인가?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에 대해 어떻게 화를 내겠는가? 전에 그가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면? 네가 예전에 한 행동으로 인해 이번에 네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 그가 재판관이라면? 너는 자신의 말보다 그의 판단을 더 신뢰해야 한다. 그가 왕이라면? 만일 네가 죄가 있어 그가 너를 벌한다면 정의에 따르라. 만일 네가 무고한데도 그가 너를 벌한다면, 운명에 맡겨라.

잘못을 저지른 자가 말 못 하는 동물이거나 그와 다를 바 없는 존재인가? 그를 대상으로 화를 낸다면 너도 전혀 나을 게 없는 사람이다. 네게 부당한 일을 한 것이 질병이나 불운인가? 만일 네가 잘 참아낸다면 그것은 조금은 가볍게 너를 지나갈 것이다. 만일 신이라면? 신에게 화를 내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선한 사람인가? 그렇다면 믿지 마라. 그가 악인인가? 놀랄 것도 없다. 그는 네게 받은 벌을 다른 사람에게 또 갚아줄 것이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된 것으로 그는 이미 자신을 벌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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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일으키는 조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위해를 당했다는 느낌이다. (...) 나머지 한 가지는 자신이 부당하게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이고 이것이 지금부터 다루고자 하는 주제이다.

우리가 어떤 사안에 대해 <부당하다>고 할 때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되었다는 것이 기준이 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예상치 못했던 사건인지 아닌지가 기준이 된다. 우리는 대개 예상하지 않은 사건을 적절치 않다고 여기며, 우리의 바람과 기대에 반해서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매우 언짢아진다. 우리가 가정에서는 아주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짜증을 내게 되고 친구의 무신경을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래서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적들이 저지르는 악행에 대해 흥분을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행동을 정확히 예상하지 못했거나 혹은 그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자존심 때문이다. 자신은 심지어 적에게 조차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제왕은, 자신은 완벽한 행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바라고 자신이 그 자유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따라서, 우리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무지와 오만함이다. 악인이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이 어떻게 이상한 일인가? 적이 우리를 해치고, 친구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자식이 실수를 하고, 노예가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 무어 새로울 게 있는가? 파비우스는 "나는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라는 말은 지휘관으로서 가장 부끄러운 변명이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 말이 인간으로서 가장 부끄러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든 일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하고 매사에 마음을 놓지 않고 경계해야 한다. 아주 좋은 성격에도 뭔가 고르지 않은 면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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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조국을 해롭게 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잘못된 행동이다. 같은 시민에게 해를 끼치는 것 역시 더없는 악행이다. 그는 우리 조국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전체를 경외할 가치가 있다면 그 일부도 신성한 것이다. 따라서 한 인간을 해롭게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너와 같은 로마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손이 발을 해하려 하거나 눈이 손을 해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의 팔과 다리가 서로 긴밀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각 부분들이 모두 온전하게 지켜지는 것이 전체의 이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개개의 사람들을 모두 아껴주어야 하는 것은 우리 인간 역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각 부분을 모두 사랑하지 않고서는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은 그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앞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처벌은 절대로 과거의 생각에 적용되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화가 아니라 경고의 의미를 갖는다. 만일 비뚤어지고 못된 성격을 가진 사람을 하나하나 모두 벌주어야 한다면 거기서 자유롭게 헤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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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입은 은혜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보답을 하는 거시 좋지만, 잘못을 잘못으로 되갚아주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니다. 선의의 경우는 지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만, 악의는 이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복수는 비록 그것이 정의로운 일로 받아들여진다고는 할지라도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복수하는 사람은 애초에 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과 별다를 게 없다. 단지 누가 먼저 상대에게 고통을 주었느냐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나븐 행동을 한 데 대해 좀 더 쉽게 용서받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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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종의 해결책을 찾는다면 화를 배제해야 하고, 보복이 즐거워서가 아니라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 하지만 보복을 하기보단 모른 체하는 편이 더 나을 때가 종종 있다. 우리보다 힘센 자가 우리에게 부당한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저 묵묵히 참는 것이 아니라 웃는 얼굴로 참아내야 한다. 한 번 자신들의 악행이 성공했다고 믿으면 그 짓을 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행운으로 정신이 오만해지면 사람들은 최악의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들은 자신이 악행을 저질러온 대상들을 증오하기까지 한다.

왕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나이를 먹은 한 노인이 했던 말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궁에서 장수長壽를 한다는 것이 참 드문 일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부당한 일을 당해도 묵묵히 받아들이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부당함에 대해 복수하는 것이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종종 자신이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도움이 안 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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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화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 화를 자극하는 상대가 동료든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마찬가지다. 동료와 싸우면 이런저런 식으로 갈등이 생긴다. 윗사람과의 싸움은 미친 짓이고, 부하라면 창피한 일이다. 자신을 문 상대를 뒤에서 달려들어 똑같이 물려는 사람은 형편없는 사람이다. 생쥐와 개미는 네가 손가락을 들이대면 문다. 약한 것들은 누군가가 자기에게 손만 대도 해를 입히려는 것으로 여긴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람이 과거에 우리에게 좋은 일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화가 누그러질 것이다. 그의 공적으로 잘못을 상쇄하라. 또한 우리가 보여준 관용이 알려져서 우리에 대한 남들의 평가가 얼마나 올라갈지, 그리고 용서를 통해서 유익한 친구들을 얼마나 많이 갖게 될지도 생각하라. 

자신의 화가 개인적인 적, 혹은 공적인 적들의 아들에게로 향하지 않도록 하라. (...) 아버지에게로 향했던 증오를 아들이 상속받는 것만큼 부당한 것은 또 없다.

용서해주기가 싫다고 느껴질 때마다 만일 모든 이들이 절대 용서할 줄 모른다면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용서를 거부했던 자가 반대로 요서를 구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신이 거칠게 밀쳐냈던 자의 발밑에 엎드려 비굴하게 굽실거려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분노를 우정으로 바꾸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이 또 있겠는가. 로마 사람들에게 한때 가장 불굴의 적이었던 사람들보다 더 충실한 동맹국이 또 있을까? (...)

누군가가 네게 화를 낸다고 가정해보라. 이때 너는 반대로 친절함으로 그에게 맞서야 한다. 갈등은, 어느 한쪽에서 그것을 벗어버리면 즉각 진정이 된다. 상대가 없으면 싸움이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서로 화를 내면 언쟁을 하게 되고 갈등이 생긴다. 먼저 물러나는 자가 더 나은 사람이다. 승리한 자가 진 것이다. 누군가가 너를 쳤다고 가정해보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서라. 같이 맞받아치는 것은 더 잦은 주먹질의 기회와 구실이 될 뿐이고, 물러나고 싶을 때 물러날 수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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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너무 세차게 찌를 바람에 자기 손까지 상처에 깊숙이 박혀서 뺄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은 분명 아무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화란 바로 그런 무기다. 철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무기, 크기가 적당하고 다루기 쉬운 검을 찾는다. 그렇다면 격렬하고, 무거워서 다루기도 힘들고, 돌이킬 수도 없는 마음의 공격을 우리는 피해야 하지 않을까?

명령을 받으면 가던 길을 멈출 수 있고, 원래 목적했던 지점보다 제멋대로 더 나아가지 않을 수 있고, 달리기에서 걷기로 언제든 속도를 늦출 수만 있다면 괜찮다. 만일 우리의 근육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인다면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여서 자기는 걷고자 하는데 뛰는 사람은 나이 많은 노인이거나 몸이 쇠약한 사람이다. 마음이 가장 건강하고 건전하게 움직일 때는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우리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먼저 화의 추악함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다음으로 화의 위험성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보다 화를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또 있을까? 어떤 격정도 화만큼 그 모습이 혼란스럽지는 않다. 화는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추하게 만들고, 가장 평온한 것을 거칠게 만든다. 화가 난 사람은 예절이나 단정함 따위는 잊어버린다. 설사 그들이 품위 있게 옷을 차려입었어도 그 옷을 마구 찢으며 자기 모습이 어떻게 보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의 머리 모양이 원래 아름답든 손질을 해서 우아하게 되었든 간에 머리카락도 마음만큼이나 빳빳하게 곤두선다. 그들의 혈관은 부풀어 오르고, 가슴은 심장박동이 빨라져 심하게 쿵쿵거리고, 목울대는 광포한 소리가 부어져 나오며 잔뜩 경직된다. 또한 그들의 관절 마디마디가 떨리고 손은 불안하게 움직이며 몸은 마치 파도를 치듯 전신이 요동친다.

겉모습이 이렇게 사납다면 마음의 모양은 어떨 거라고 상상하는가? 호흡은 더 거칠고 공격에만 완전히 집중되어 있고, 화를 터뜨리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가슴속 마음의 형상은 얼마나 더 끔찍한 모습일까!

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잇는 혹은 살육에 열을 올리는 적들이나 사나운 짐승과 같은, 독사들을 몸에 휘감고 입에서 불을 뿜는 지하세계의 괴물과 같은, 전쟁을 일으키려고 지옥에서 나와서 나라들 사이에 분쟁을 퍼뜨리고 평화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가장 포악한 신들과 같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화의 모습이다. (...)

모든 사람들, 모든 상황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로 괴로워하고, 증오하고 동시에 증오의 대상이 되면서, 달리 해칠 길이 없다면 그것은 땅과 바다와 하늘까지 전복시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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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티우스가 말했듯이, 어떤 사람들은 화가 날 때 화난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것만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데에 충격을 받았다. 말하자면, 화가 폭발되는 바로 그 순간의 자신의 모습을 그들은 알아보지 못한다. 사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실제의 추악함에 비해 얼마나 미미한 부분만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있는가!

만약에 화를 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눈에 보인다면, 그것이 형태를 갖추고 빛을 발한다면 시커멓고, 얼룩덜룩하고, 부글부글 끓고, 비뚤어지고 퉁퉁 부은 그 모습에 보는 사람마다 기절초풍을 할 것이다. 현재는, 뼈와 살과 그 밖의 많은 장애 물들을 헤치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데도 그 추악함은 엄청나다. 그러니 위에 덮여 있는 것이 없다면 어떻겠는가?

분명 너는 고작 거울 때문에 화를 멀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거울 앞에 다가서는 사람이라면 거울 없이도 진즉 달라졌을 테니까. 화난 사람에게 사납고 냉혹한 모습보다 더 걸맞은 모습은 없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가 보이고 싶은 모습이다.

우리는 화가 혼자 힘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쳐왔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혈관이 파열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다가 목에서 피가 났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격렬하게 울어서 시야가 흐려지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아예 병석에 눕게 되기도 했다.

화보다 빨리 우리를 광기로 이끄는 길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화의 발작을 수습하지 못하고 한 번 놓아버린 정신을 다시는 되찾지 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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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는 성공을 거두면 의기양양해하고 좌절되면 미쳐버린다. 격퇴되었을 때조차 화는 "이 정도면 충분하니 이제 그만두자."고 말하지 않는다. 적이 운이 좋아서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면 화는 제 살을 물어뜯는다. 화에게는 자신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어디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가장 사소한 것에서 출발해서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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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어떤 때에는, 혹은 어떤 장소에서는 가금 유용할 때도 있을 거라고 사람들이 믿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걷잡을 수 없고 미치광이 같은 화의 실체는 명확히 설명되어야 하고, 그에 어울리는 것들은 화에 귀속되어야 한다. 화에 속하는 것들은 이를 테면 이런 것들이다. 고문대, 고문 기구, 밧줄, 감옥, 산사람을 반쯤 땅에 묻고 그 주위에 불을 놓는 것, 시신을 질질 끌고 가는 데 필요한 갈고리, 각종 포박 기구, 온갖 형벌들, 찢어진 사지, 이마에 찍힌 낙인, 맹수들을 가둔 우리. 그 비명이 너를 전율케 할 것이다. 모든 광란의 도구들보다 더 악독하고 혐오스러운 화는 이들 사이 어딘가에 적절한 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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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 다른 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격정도 이렇게까지 추악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거칠고, 사납고, 핏기가 싹 사라졌을 때는 백지장처럼 창백하고, 온몸의 피와 기운이 얼굴로 쏠릴 때는 마치 출혈을 한 듯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얼굴, 부풀어 오르는 혈관, 이리저리 미친 듯 날뛰다가 한 곳을 뚫어져라 쏘아보는 시선.

여기에 더해서, 자신들의 무기인 엄니를 날카롭게 가는 멧돼지를 흉내 내기라도 하듯 이를 부득부득 가는 소리, 비틀린 손의 관절에서 나는 우두둑 소리, 몇 번이고 두들겨대는 가슴팍, 헐떡이는 숨소리, 폐부에서 나오는 절규, 현기증, 느닷없이 지르는 뜻 모를 고함, 앙 다물었다가 이제는 부르르 떨리는 입술에서 나오는 혐오스러운 식식거림. (...)

자신이 먼저 남에게 악한 일을 한 데서 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누구라도 화를 내기 전에 그것을 거두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너는 내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하기를 바라지 않느냐? 최고의 권력의 자리에서 화를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복수가 자신의 힘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최고의 행운이 가져다준 엄청난 특권 중 하나로 손꼽는 자들에게, 화의 포로가 되는 사람은 결코 힘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없으며 심지어 자유의 몸이라 부를 수도 없다는 것을.

또한 너는 내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하기를 원하지 않느냐? 그래서 사람들이 저마다 앞뒤를 잘 돌아보고 조금 더 신중해지도록, 또한 우리 마음의 다른 악덕은 가장 형편없는 인간들에게나 해당되지만, 화는 교양 있는 사람들, 다른 면에서는 흠이 없고 올바른 사람들에게도 몰래 스며든다는 것을. 사실 어떤 사람들은 화를 잘 내는 성격을 솔직함의 발로라고까지 생각하고, 심지어 세간에서는 화를 가장 잘 내는 사람이 가장 소탈하고 스스럼없는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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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묻는다. "그렇다면 요점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자신을 화로부터 안전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화는 천성이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에게조차 야만적인 폭력을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체격이 좋고 세심하게 건강을 관리해온 사람도 역병에는 당할 수가 없듯이(역병은 강인한 자와 허약한 자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므로), 화는 침착하지 못한 성격에게나 차분하고 편안한 성격에게나 똑같이 위험하다. 아니 오히려 평소의 모습에 비해 변화의 정도가 심한 후자에게 더 꼴사납고 더 파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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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보다 열등하며, 정신이 고매하고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복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창을 던졌을 때 단단한 표면이나 물체에 맞으면 튕겨 나오면서 오히려 던진 사람에게 타격을 준다. 그렇듯이, 부당함은 위대한 정신에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 그것이 목표한 상대보다 자신이 훤씬 무르기 때문이다. 어떤 창으로도 관통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모욕과 부당함을 일축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멋진가! 복수를 한다느 것은 고통을 인정하는 것이다. 위대한 정신은 악행에 고개 숙이지 않는다. 너에게 부당한 대우를 한 사람이 너보다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다. 만일 그가 너보다 약하다면 한시름 놓게 하라. 만일 그가 너보다 강하다면 너 자신이 한시름 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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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에도 자극받지 않는 것은 위대함의 가장 확실한 증거다. 별들과 보다 가깝게, 보다 질서 정연하게 존재하는 우주의 상층은 응집해서 구름을 만들지도 않고 태풍을 형성하지도 않으며 회오리바람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아래 지역은 번개가 쳐서 초토화되어도 위쪽은 모든 소동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렇듯이 숭고한 정신은 조용한 정박지에 단단히 닻을 메고 화의 모든 요소들을 진압하면서 항상 자제력을 잃지 않고 평화롭고 질서 정연한 모습이다. 화를 내는 사람에게서는 이들 중 무엇 하나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먼저 자제심을 내팽개치지 않고서는 비통함과 격노에 굴복할 수가 없다. 화의 광풍에 휩쓸려 타인을 거칠게 공격하는 자는 우선 자신이 가진 존경받을 만한 자질들을 모두 내버린 자가 아니던가? 흥분한 상태에서 누가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겠는가? 누가 입을 조심하겠는가? 누가 자기 몸의 한 부분이라도 제어할 수 있겠는가? 한 번 고삐를 놓아버리면 그 누가 자신을 제어할 수 있겠는가? (...)

사람들이 북적대는 도시의 거리를 황급히 걸어가다 보면 이 사람 저 사람과 부딪치고, 여기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저기서 가로막히고, 또 어딘가에서 물벼락을 맞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지시도 없고 뒤죽박죽 산만한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게 되며 따라서 숱한 불만이 생기게 마련이다. (...)

인생을 살면서 수만은 시도를 할 때 항상 예외 없이 운이 따라줄 만큼 운명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계획이 좌절되면 사람이나 일에 대해 인내심을 보이지 못하고 별것 아닌 이유로 화를 내고 사람에게, 자기 직업에, 때로는 장소에, 때로는 운명에, 때로는 자신에게 화를 내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을 고요히 다스리기 위해서는 앞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너무 많은 일, 너무 중차대한 일로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지치게 해서는 안 된다. 가벼운 짐을 어깨에 얹어놓은 짐을 지탱하는 것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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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스스로 생각할 때 자기가 화를 잘 내는 성격이라면,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를 읽을 줄 아는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물론 그런 친구 때문에 오히려 버릇이 더 나빠져서 자기 뜻에 어긋나는 말은 아예 듣지 않으려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친구의 무던한 성격 덕에 우리의 화에도 조용한 휴식시간이 생긴다는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성격이 본래 까다롭고 격한 사람도 옆에서 달콤한 말을 해주는 사람에게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끝가지 거칠고 난폭하게 구는 동물은 없다.

토론이 너무 길어지거나 입씨름으로 번지려고 할 때는 더 이상 격해지지 않도록 항상 첫 단계에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언쟁은 그냥 놔두면 저절로 커지며 한 번 거기에 바진 사람을 붙들고 더욱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러니 싸움의 한복판에서 뒤로 빠지기보다 처음부터 싸움을 삼가는 것이 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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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사람은 싸울 거리를 찾아다닌다는 옛말이 있다.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뭔가 심통거리가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도. 상처가 있으면 누가 스치기만 해도, 아니 스친다는 생각만 해도 아프듯이 마음이 약해지면 사소한 일에도 상처를 받는다. 그 결과 인사나 편지, 말투, 질문 등이 빌미가 되어 싸움이 일어난다. 아픈 부위가 어디든 환부를 만지면 비명이 나오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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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처음에 화라는 이 나쁜 질병의 조짐이 있을 때 스스로 의사가 되어 치료하는 것, 입에서 나오는 말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잡고 공격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미리 막는 것이 상책이다.

격정은 맨 처음에 그것이 들끓어져 일어나는 순간에 진단하는 것이 쉽다. 병이 발병하기 전에는 반드시 전조증상이 나타난다. 폭풍이 오기 전에도 항상 그 조짐이 있듯이, 우리 마음을 뒤흔드는 화와 사랑, 그 밖에 모든 돌풍과도 같은 격정들이 찾아올 때는 그것을 미리 알리는 전조증상이 반드시 있다. 

만성적인 간질 발작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사지에서 온기가 빠져나가면서 온몸이 뻣뻣해지고 현기증으로 눈앞이 빙빙 돌고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고 기억이 아득해지고 목이 흔들리면 곧 발작이 시작될 것임을 안다. 그러면 그들은 평소 해왔던 대로 간질 발작에 대비한다. (...)

이처럼 자신의 질병이 퍼지기 전에 미리 알고 그 경중을 가늠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우리는 무엇이 자신을 가장 초조하게 하고 성나게 만드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모욕적인 말에 흥분하는 사람이 있고 모욕적인 행동을 도저히 못 참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높은 지위가 그에 합당한 존경을 받느냐에 민감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빼어난 외모가 인정받느냐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남들이 자신을 교양 있는 신사로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고, 학식이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받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오만을 못 참고, 어떤 사람은 남이 자기에게 반항하는 것을 못 참는다. 저 사람은 노예들에겐 화를 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 사람은 집에서는 사나운 야수지만 밖에 나가면 순한 양이다. 누군가는 남에게 선처를 부탁받으면 부당한 일을 당한 것처럼 생각하는 반면, 자신에게 선처를 호소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기분 나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 똑같은 것에 충격을 느끼는 것은 아니기에, 자신의 약점이 어디인지 알고 있어야 그곳을 특별히 보호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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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보고 듣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설혹 자신이 좀 손해를 본 것처럼 느껴져도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자. 대부분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간다면 그만큼 고통도 없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는 게 싫은가? 그렇다면 매사에 시시콜콜 파고들지 말라.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뭐라고들 하는지, 어떤 고약한 소문이 떠도는지, 게다가 비밀스럽게 묻어둔 것까지 굳이 들춰내는 사람은 자기감정을 선동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해석하기에 따라 부당한 피해처럼 보일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더러는 그냥 무시하고 더러는 웃어넘기고, 그래도 남는 것들에 대해서는 용서하는 것이다.

화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대부분의 것들을 그냥 농담으로 듣고 넘겨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주먹으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았을 때(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렇다.) 그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다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이 언제 투구를 쓰고 집을 나서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 참 딱한 노릇이군."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 부당한 피래를 입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참아냈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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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에 대한 최고의 치유책은 유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처음에 끓어오르던 기세는 누그러지고 마음을 뒤덮었던 어둠은 걷히거나 최소한 더 짙어지지 않게 된다. 하루 아니, 한 시간도 안 되어 너를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게 만든 것들이 어느 정도 진정될 것이고 어떤 것들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설사 화를 유예시킴으로써 네가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적어도 그것은 이제 화의 모양새가 아니라 심판의 형태를 취할 수 있게 된다. 네가 어떤 일의 성격을 알고자 할 때는 언제나 그 일에 시간을 주어라. 일렁이는 물결 위에서는 아무것도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다.

플라톤이 노예에게 화가 났을 때 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노예에게 윗옷을 벗고 돌아서라고 명했다. 자기 손으로 직접 채찍질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손을 위로 치켜든 순간, 그는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팔을 공중에 쳐든 채로 한동안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우연히 그 광경을 보고 뭐하는 거냐고 물었다 플라톤은 이렇게 대답했다.

"화를 내고 있는 한 사내를 벌주고 있는 거라네." (...)

그렇게 함으로써 플라톤은 다른 이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자기 또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화가 났다. 그러니 필요 이상 심하게, 즐거이 남을 벌주고자 할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노예를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된다."

플라톤조차 스스로의 권한을 내려놓았을진대, 누가 화난 사람에게 복수를 맞기고 싶어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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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화가 밖으로 표출되는 것을 허락하면 그다음부터는 그것이 우리의 주인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가슴에 담고 견뎌야 하고 휩쓸려 가서는 안 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화의 모든 증상들을 정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표정은 최대한 부드럽게 하고 목소리는 온화하게 하며, 걸음걸이를 늦추면서 화의 신호들을 누그러뜨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점차 우리의 내면이 겉모습에 순응해가면서 편안해질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는 화가 나면 목소리가 낮아지고 말수가 적어졌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과 싸우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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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직 제정신이고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자기 좋을 대로 하려는 이 강력한 악덕에 맞설 수 있도록 조력을 요청해야 한다.

자신이 술을 이기지 못하고 만취해서 꼴사나운 주정을 부리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를 술자리에서 데리고 나와 달라고 친구들에게 부탁한다. 병중에 자제심을 잃어버리는 것을 경험했던 사람은 자신이 상태가 안 좋을 때 하는 말은 들어주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당부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악덕을 가로막을 장애물을 찾아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마음을 늘 차분한 상태로 유지하여 갑자기 마음이 동요하는 심각한 사태에 부딪히더라도 화를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혹은 예상보다 큰 화가 나려 할 때 그 화를 가슴 깊이 넣어두고 고통을 내색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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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는 누군가를 섬기는 입장일 경우 특히 위험하다. 화는 자학의 형태를 취하며, 우리가 명령에 반항하는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명령이 더 견딜 수 없게 느껴진다. 잡혀온 야생동물이 날뛰면 날뛸수록 올가미만 바짝 조여질 뿐이다. 새들도 깃털에 묻은 끈끈이를 털어내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온몸을 끈끈이로 칠갑하게 된다. 완강하게 반항할 때보다 유순하게 순종할 때 멍에가 주는 고통이 한결 줄어든다. 엄청난 재앙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것을 견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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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가 큰소리로 말대답을 하고 불만스러운 눈매로 쳐다보고 조그만 소리로 불렀을 때 바로 달려오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왜 그들을 채찍이나 족쇄로 다스려야 하는가? 내가 누구이기에, 내 귀를 좀 시끄럽게 하는 것이 죄란 말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국의 적들도 용서했다. 좀 게으르고 조심성이 없고 수다스러운 사람들을 내가 왜 용서하지 못할까?

어린아이는 나이 때문에 용서되어야 하고, 여성은 여성이어서 용서되어야 하며, 낯선 이는 그가 자유인이어서, 너의 식솔은 너와 가까운 사람이어서 용서해주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다면 그가 네 마음에 들었던 세월을 생각하라. 저 친구는 전에도 몇 번이나 잘못을 했었다. 오래 참아왔는데 더는 못 참겠는가? 그는 친구다. 알고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그는 적이다. 그에게서 뭘 기대하는가!

그가 평소 지각 있는 자라면 그를 믿어주고, 그가 평소 어리석은 자라면 그를 용서해주자. 그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자. 

"가장 현명한 자라도 실수를 할 때가 있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도 이따금 주의를 소홀히 할 때가 있고, 아무리 경험이 풍부한 사람도 갑자기 위엄을 잃고 과격하게 행동하는 수가 있으며,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늘 두려워하며 조심하는 사람도 어쩌다 실수로 남을 불쾌하게 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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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자신을 자극하고 화나게 하려는 자를 무시해버리는 사람은 누구든 군중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당당하고 꿋꿋하게 견뎌낸다. 맞아도 타격을 받지 않는 것은 진정한 위대함의 특징이다. 이는 마치 몸집이 큰 맹수가 개 짖는 소리에 무심한 것과 같고, 바다의 커다란 바위가 높은 파도가 밀려와 부딪쳐도 끄떡없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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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부당하게 입은 피해를 치유하는 것이 그것에 대해 복수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좋은 일인가! 복수는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다. 네가 한 가지의 부당한 피해에 대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동안 너는 더 많은 잘못에 스스로를 내어준다. 우리는 누구나 상처받아 아파하는 시간보다 화를 내며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만약에 우리가 그 역방향을 취해서 하나의 잘못을 다른 잘못으로 더 악화시키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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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일을 할 능력이 없는 것과 할 생각이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먼저 화부터 내지 말고 가만히 판단을 해보면 많은 이들이 너의 화로부터 놓여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는 최초에 마음이 시키는 대로 버럭 화를 냈다가 그럴 만한 이유도 없는데 공연히 화를 낸 걸로 보이지 않으려고 계속 밀고 나간다. 무엇보다 공정하지 못한 것은 우리의 화가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더 고집스러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심각하게 화가 난 것이 그 화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인 양, 그 화를 붙잡고 자꾸만 더 크게 키운다.


(...)


우리보다 다른 누군가가 더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이 가진 것을 기뻐해야 한다. 자기보다 더 행복한 사람들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 행복할 수가 없다. 내가 기대보다 적게 받았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내가 너무 많이 바랐던 것이다. 우리는 다른 것보다 이 부분에서 생겨나는 화를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파괴적이고, 우리가 무엇보다 신성하게 가슴에 품어오던 모든 것들을 공격하려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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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가진 것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자신의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앞서 있다고 해서 신들에게도 화를 낸다. 그는 부러움으로 자신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소수의 사람들을 시기한다. 인간들이란 얼마나 경우가 없는지, 자기가 아무리 많이 받았어도 더 받을 수 있었는데 못 받은 것을 부당하다고 여긴다. (...)

그보다 이미 네가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기다리고, 아직 네가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갖지 못했음을 기뻐하라. 뭔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인생의 즐거움 중에 하나다. (...) 너의 최대 결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너의 계산법은 틀렸다. 너는 자신이 준 것은 크게 생각하고 받은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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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믿어라. 우리가 정색을 하고 화를 내는 그 일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며, 아이들을 치고받고 싸우게 만드는 그런 일들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수행하고 있는 일들 중에 심각하거나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다. 이는 화가 광기의 한 형태이며, 네가 하찮은 일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좁은 길에서는 통행자들 간에 충돌을 피할 수 없지만 넓게 트인 대로에서는 모든 시민이 다 나온대도 그럴 일이 없다. 네가 탐하는 것이 하찮은 것이기에, 남에게서 빼앗지 못하면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네가 추구하는 것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내분과 증오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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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노예가, 해방노예가, 네 아내가, 혹은 부하가 말대답을 하는 것에 분개한다. 너는 집 안에서 식구들이 자유롭게 말도 못 하게 하면서 공동체가 자신의 자유를 박탈했다고 비난하고 불평한다. 반대로, 네가 묻는 말에 노예가 묵묵부답이면 너는 반항하는 거냐고 화를 낸다. 

말을 해도 탈이고 안 해도 탈이다. 심지어 웃는 것도 잘못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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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에서 어떤 사람이 짓궂은 농담을 하고 네게 상처를 주려고 함부로 던진 말이 네 화를 돋운다. 천박한 무리들은 피하는 것이 상책임을 잊지 말라. 그들은 맨 정신일 때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기에 술이 들어가면 허용 한계에 대한 개념이 더 허물어진다.

법관이나 부자의 집에서 대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그 집에 들어가려는 네 친구를 밀치는 것을 보면 너 자신이 친구의 편에 서서 화를 내게 된다. 그렇다면 너는 쇠줄로 목이 묶인 개에게도 화를 낼 것인가? 개는 아무리 시끄럽게 짖어도 먹을 것을 던져주면 조용해진다.

조금 뒤로 물러나서 껄껄 웃어라! 소송을 하려고 밀려드는 사람들로 쇄도하는 문간을 지키면서 그 문지기는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군다. 운이 대단히 좋아 그 집 안에 누워 있는 자는, 사람들이 쉽게 들어설 수 없는 대문이 곧 자신의 부와 권력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문은 감옥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네가 참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겨울에 추운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은가? 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면 멀미가 나고, 붐비는 길을 가면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각오가 되어 있는 일은 담대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가 있다. 네가 초대를 받은 곳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하여 동료 손님들에게, 초대한 주인에게, 너보다 상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공연히 심통이 나기 시작한다. 딱한 자여, 긴 의자의 어느 부분에 너의 엉덩이를 걸쳤는가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다면 네가 베고 자는 베개가 너를 영예롭게 만들기도 하고 수치스럽게 만들기도 하는가?

어떤 사람이 너의 재능을 나쁘게 말했다고 해서 너는 그를 곱지 않은 눈길로 노려보았다. 이것이 너의 행동 원칙인가? 그렇다면 너는 엔니우스의 시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는 너를 증오했어야 하고, 호르텐시우스는 네가 그의 연설을 칭찬하지 않으면 적대감을 드러낼 것이며, 키케로도 자신의 시를 비웃은 너를 적으로 여겨야 마땅할 것이다. 너는 사람들의 평가를 받기를 기다리는 후보자로서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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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처음에 끓어오르는 순간에는 남의 말이 들리지도 않고 마음도 정상이 아니기에 그때 섣불리 말로써 화를 진정시키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럴 때는 시간을 좀 주자. 화가 조금은 누그러져야 치료법이 통한다. 우리는 눈이 잔뜩 부어올랐을 때 비비거나 만지지 않는다. 공연히 손을 대거나 만지는 것은 환부를 더 성나게 하기 때문이다. 다른 부위에 염증이 생겼을 때도 마찬가지다. 병의 초기 단계에는 안정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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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짧은 인생을 소중히 여기고 너 자신과 타인을 위해 삶을 평화로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어떻겠는가? 사는 동안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죽어서는 그들이 그리워하도록 만드는 것이 어떻겠는가? 어째서 너는 고압적으로 너를 대하는 저 사람을 끌어내리고 싶어 하는가? 왜 너를 향해 짖어대는 사람-천하고 비열하지만 윗사람을 화나게 만들고 짜증 나게 하는-을 손봐주는 데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려고 하는가? 너의 노예에게, 주인에게, 황제에게, 너의 부하에게 왜 화를 내는가? 조금만 기다려라-그리고 보라-죽음이 너희를 모두 똑같게 만들리니!


(...)


승리한 자와 패배한 자에게 똑같은 결말이 닥쳐온다. 시간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시간을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내야 한다. 숨이 끊어진 우리의 시체를 어느 누구도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지 않게 하라.

이웃에서 "불이야!" 하고 터져 나온 고함이 종종 열띤 말싸움을 중단시키기도 한다. 느닷없이 등장한 사나운 짐승이 나그네와 도적을 떼어놓는다. 더 위협적인 두려움이 다가오면 우리는 시시한 적들과 붙어 싸울 겨를이 없다. 왜 싸움과 음모에 관여하는가? 너는 자신이 화를 내는 상대에게 죽음 이상의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네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그는 죽을 것이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을 일부러 야기하려 애쓴다면 헛된 노력이다.


(...)


자,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덕목들을 소중히 여기자. 그 누구도 두렵게 하거나 위험하게 만들지 말자. 우리는 손해와 부당한 일, 모욕과 경멸 따위로부터 높이 초월해 있음을 보여주자. 잠깐의 불편함은 넓은 마음으로 참아보자. 

우리가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어느새 죽음이 지척에 와 있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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