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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소설][사회] 묵직한 사회·회사 소설, 《누운 배》

by 노지재배 2017.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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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하는 책은 묵직한 사회, 회사 소설인 《누운 배》다.


저자인 이혁진 작가는 이 작품으로 2016년 제21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


《누운 배》를 읽으며 든 느낌은 오랜만에 묵직한 주제를 굵직한 서사 속에, 그리고 디테일의 정확함과 정교함이 살아 있는 리얼리즘으로 다루고 있는 소설을 만났다는 생각이었다.


누운 배 한겨레문학상




《누운 배》는 중국의 한국 조선소에서 진수식이 끝난 배가 갑자기 쓰러지는 일로 시작된다. 쓰러진 배는 자동차와 트럭 6700대를 싣고 대양을 오가는 커다란 배다. 그리고 이 쓰러진 배는 소설 속에서 줄곧 우리 사회의 불합리함, 부조리를 드러내는 중요 모티프로 작용한다.


소설의 전반부에서는 '누운 배'를 놓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회사의 불합리함과, 회사의 과오를 덮고 장부와 기록을 날조하면서 쓰러진 배의 원인을 자연재해로 몰아가는 부조리를 다룬다. 이 과정에는 누운 배를 만든 회사의 장부 날조나 불합리뿐만 아니라, 보험회사와 같은 금융자본의 불합리, 중국 기상청과 같은 정부 부처의 부패 등이 함께 기록됐다. 


중반부에는 새로 부임한 황 사장이라는 인물이 그동안의 구호만 떠들썩했던 '혁신'이 아니라, 진정한 헌신과 노력으로 회사를 바꾸어 나가는 과정이 담긴다. 소설의 화자인 문 대리도 우직한 황소처럼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황 사장의 행보에 기대를 걸기도 한다. 


그러나 황 사장의 이러한 새로운 노력과 변화의 기운으로 바뀌어 가던 회사는 '누운 배'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회장의 선언을 기점으로 다시 휘청이게 된다. 회장은 새롭게 일어서던 회사에서 자금을 빼돌려 다른 사업을 벌이기 바빴다. 임원들은 다시 회장 밑으로 줄을 서거나 딴 주머니를 차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입지를 좁히고 그동안의 안일과 특권을 박차고 노력을 경주할 것을 요구하는 황 사장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황 사장은 결국 회장의 지시대로 '누운 배'를 일으켜 세우지만, 2년 동안 누워 있던 배는 황 사장의 말마따나 처참하게 썩어 있었고, 회장의 공언과는 다르게 재건조 역시 불가능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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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형수 탱크로 이어지는 아래쪽 철판은 새카맸다. 따개비들일까? 고무보트가 선체 가까이 붙자 분명히 보였다. 따개비가 아니었다. 구멍이었다. 배 전체에서 가장 두꺼운 철판에 난 구멍이었다. 수십 센티미터 넘는 철판조차 녹이고 파먹은 녹 구멍이 따개비처럼 빽빽한 것이었고 2년 동안 빛 한 번 보지 못한 평형수 탱크의 암흑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썩었다. 싸그리 다 썩었어." 황 사장이 씹어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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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동안 누워서 썩을 대로 썩은 배가 다시 일으켜 세워진 뒤, 회사를 바꿔보려던 황 사장의 노력도 황 사장의 쓸쓸한 퇴장과 함께 물거품이 된다. 쓰러진 배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던 회장은 조선소의 정상화라는 가면 아래 자신의 신사업으로 자금을 빼돌리기 바빴다. 회장에게 줄 서기 바쁜 임원들은 회사는 여전히 건재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공언하며, 인재가 빠져나가고 회사를 올바르게 바꿔보려던 노력이 점차 사라지는 사태는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거나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썩은 배가 다시 일어선 현실은 여전히 암담하고, 부조리하다. 절대 쓰러지지 않을 절벽 같았던 그 거대한 배가 쓰러졌던 소설 초반부처럼. 화자인 문 대리는 결국 부조리와 불합리함에 회사를 떠난 다른 사람들과 같은 길을 택하게 된다.


소설 속에서 잠시나마 회사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었던 황 사장과 같이 묵직한 주제를 고랑을 푹푹 밟고 다시 쑥쑥 뽑으며 소를 재촉하는 기운 찬 농부의 걸음처럼 뚜벅뚜벅 굵직한 서사로, 그리고 디테일의 정확함과 정교함이 살아 있는 리얼리즘으로 우직하게 그려낸 작가의 재능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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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걸음걸이가 눈에 띄었다. 땅을 디디는 발뒤꿈치는 괭이가 흙을 찍듯 단단하고 힘찼다. 땅을 미는 발끝은 물 주름을 남길 것처럼 가벼웠다. 느리지도 조급하지도 않았다. 절도가 있었다. 옆에서 걷는 회장의 걸음걸이, 영지를 둘러보는 영주처럼 크고 호방한 걸음걸이와 달랐고 회사 안 그 연배의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이전 사장을 비롯해 부사장, 임원들의 걸음걸이는 모두 느리거나 조급했고 흐느적거리거나 삐거덕거렸다. 금방 멈출 것 같고 어서 앉아 쉬고 싶어 하는 걸음걸이였다. 자신의 걸음걸이라기보다 몰고 가는 소의 걸음걸이 같았다. 남자의 걸음걸이는 고랑을 푹푹 밟고 다시 쑥쑥 뽑으며 소를 재촉하는 기운찬 농부의 걸음걸이 같았다. 내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고작 걸음걸이일 뿐이었다. 나는 문을 밀고 나섰다. 몇 걸음 걸었고, 멈춰 섰다. 나는 어떻게 걸었지?

그 남자가 사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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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이혁진 


1980년에 태어났다. 경북 안동에서 자랐다. 서강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2016년 장편소설 《누운 배》로 제21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 

 



■ 목차



1부

2부

작가의 말

추천의 말





■ 책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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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쓰러지니 어서 회사로 들어오라는 팀장의 전화를 받았다. 듣고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2002호가 쓰러진다니, 진수까지 끝내고 의장부두에 멀쩡히 서 있던 배가 왜 쓰러진다는 말인가? 작은 배도 아니었다. 자동차와 트럭 6700대를 싣고 대양을 오가는 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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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조금 기우뚱 서 있었다. 쓰러진다는 얘기만 듣지 않았다면 그런 채로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선체는 총길이 200미터, 높이 34미터에 폭 32미터였다. 그만한 크기의 거대하고 흰 절벽 같았고 그 절벽이 넘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 같았다. 선수 쪽에서 물거품이 부글부글 끌고 있었다. 사장은 그곳을 손가락질하며 길길이 날뛰고 소리쳤고 생산 부서 임원들은 둘러서서 고개를 숙인 채 사장의 진노와 욕설을 받고 있었다. 

탕! 장력을 이기지 못한 홋줄 하나가 터지듯 끊어졌다. 곧이어 쇠가 쇠를 치고 긁는 소리가 거대한 선체 전체를 나팔처럼 울렸다. 배 안의 장비와 공구들이 배가 기우는 방향으로 쏠리면서 선체를 치고 찧는 소리였다. 배는 쓰러지고 있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지만, 그랬다. 탕! 다시 한번 홋줄이 혼돈을 채찍질하듯 끊어졌다. 배에 홋줄이 얼마나 걸려 있는지, 또 끊어진 홋줄이 몇 번째인지 나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모래시계처럼 시간을 헤아릴 터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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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공정 회의에 참석한 회장은 최종 보고서 내용을 직접 발표하며 양 이사의 공이 컸다고 크게 칭찬했다. 양 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에게 공을 돌리며 이제 더욱 구조 업무에 집중해 배를 일으켜 세우자고 말했다. 열띤 박수 소리가 회의실을 채웠다.


(...)


결국 이런 꼴을 보려고 그렇게 많은 밤을 야근하고 낙심하고 그래도 할 수 있다고 서로 북돋워가면서 일해온 걸까? 없는 자료를 만들면서, 날조하고 조작하고 온갖 인맥과 지연을 동원하고 회사의 부주의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폐기하는 위험까지 무릅쓰면서 해온 일이 결국 팀장의 진급 누락을 위한 것, 그간 이룬 성과를 고스란히 기획조정실의 양 이사에게 갖다 바치기 위한 것밖에 되지 않았다. 우스웠다. 정말 우스운 꼬락서니였다.

최종 보고서라는 것 역시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쓰러졌다. 거짓 같은 참이었다. 그 배는 천재지변으로 쓰러진 것이다. 참 같은 거짓이다. 결국 모든 사람이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고 전손 처리로 가닥이 잡혔다. 거짓 같은 참이다. 천재지변으로 일어난 사고라는 중간 보고서가 나왔다. 참 같은 거짓이다. 이제 그것에 다라 발생한 피해액과 배분이 최종 보고서로 나왔다. 이 모든 참 같은 거짓, 거짓 같은 참이 모조리 참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으로 자리 잡았고 곧 진짜 보상금이 회사 계좌에 찍힐 터였다. 문서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문서란 엉성하고 허술한 현실에서 부스스 떨어져 내린 각질에 불과했다. 하지만 누가 문서를 우습게 보는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문서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현실을, 회사를, 정부나 국가를, 종교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누운 배 한 척이 그렇게 됐듯 사실이라는 것은, 참이나 거짓이라는 것은 힘으로 쥐고 흔들 수 있었다. 세상은 성기고 흐릿한 실체였다. 그것을 움켜쥔 힘만이 억세고 선명했다. 힘은 우스운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우스운 것도 우습지 않게 만드는 것이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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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공채로 젊은 사람을 더 뽑으면 될 일이었다. 대기업 사람을 데리고 온다고 회사가 대기업처럼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직공들은 모두 중국인이고 설비는 한국에 비하면 설비라고 할 것조차 아니었다. 당장 일손을 더하고 곱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임원, 부장, 차장이 늘었으니 회사의 모리는 크고 많았다. 과장, 대리, 기사 들이 줄었으니 회사의 손발은 오그라들었다. 크고 많은 머리와 오그라들고 개수가 부족한 손발. 그 꼴이 무엇일까? 괴물이었다. 회사는 괴물이 돼가고 있었다. 나가는 사람들 중에 옥석을 가려 붙잡지 않고, 산적한 문제를 풀지 않은 채 자신들의 직위와 힘과 세력에 집착하는 임원들 역시 매한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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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기사는 조 상무처럼 말했다. 그건 아니지 않나고, 회사가 군대처럼 짬밥 찼다고 자기 마음대로 옷 벗고 다니는 건 그른 거고 틀린 거지. 한국이고 중국이라서 다른 건 아니지 않으냐고 따져보고 싶었지만, 내가 김 기사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나나 김 기사가 옳고 그른 것을 아무리 갈라 세워도 아무 소용없었다. 팀장이나 조 상무가 작업화 발로 깔아뭉개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매일 똑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요령을 익혀나갔다. 일이 쌓여도 쌓인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요령, 잽싸게 해치워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분리하는 요령, 금방 해도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요령, 일도 아닌 일을 일처럼 보이게 하는 요령, 그리고 적당히 틈만 보이면 혁신이라는 단어를 붙여 넣는 요령. 요령을 익히니 일은 편해지고 회사 생활은 평화로웠다. 퇴근하면 술 마시고 여자를 주무르다 집으로 갔고, 잤다. 불편하고 불쾌한 것들, 틀렸지만 틀렸다고 말할 수도, 고치거나 치울 수도 없는 것들은 적응하거나 아예 잊어야 했다. 기쁘고 즐거운 것, 보상을 찾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똑같은 날들이 똑똑 흘렀다. 2002호는 구조 업체 실사가 끝난 지 한참이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꼼짝없이, 관처럼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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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사장은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봤다. "며칠간 중국 직원 식당에서 아침, 점심을 먹어봤습니다. 더럽고 맛없기는 말할 것도 없고 의자는 고장 난 것 투성이에 직원들은 20분, 30분씩 기다려서 고작 5분, 10분 만에 먹고 나갔습니다. 이걸 알고 개선하려고 한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생각들 해보시십시오. 여러분 식당에서 저런 밥이 나온다면 여러분은 그걸 먹고 일할 수 있겠습니까? 이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나겠습니까? 생산에 집중할 수 있겠습니까?" 외련 담당 홍 상무가 끼어들었다. "중국 회사 어느 곳을 가나 급식 수준은 한국인이 보기에 불량합니다. 아무래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 상무는 한 번이라도 중국 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어보고 하는 말씀입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굳이 먹어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먹어본 다음에나 말씀하세요. 중국이니까 어떻다, 그런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 먹고 싶은 음식이 나오느냐, 우리 회사가 우리 직원에게 그런 밥을 먹이고 일을 시킬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건 다른 게 아니라 맞냐, 틀리냐 문젭니다. 알아듣습니까? 곽 상무, 지금 중국 직원 인당 급식비가 얼마입니까? 곽 상무는 대답하지 못했다.

황 사장이 대신 말했다. "중국 돈으로 인당 3위안입니다. 한국 직원은 인당 10위안입니다. 하지만 중국 식당에 가면 도저히 한국 식당 3분의 1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요. 뭐가 똑바로 안 굴러가고 있단 말입니다. 업체 불러들여서 원가 분석시키십시오. 직원들 취식 환경도 개선하세요. 만족도 설문 조사하고 지금처럼 멀쩡한 음식이 나와도 식중독 걸릴 것 같은 환경을 바꾸란 말입니다." 곽 상무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음 주부터 중국 직원 식당에서 아침, 점심 드세요. 본인이 드시기 싫다면 관리자급으로 내려보내 먹게 하세요. 그리고 아까 말한 대로 임원 식당 폐쇄하세요. 임원들은 모두 일반 식당에 가서 밥 먹고 한국 직원, 중국 직원 할 것 없이; 현 수준에서 급양 질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안을 내놓기 바랍니다. 임원 식당은 선주선급사 전용으로 돌리고 양식 준비시키세요." 다시 한번 당황한 기색이 임원들의 얼굴에 살얼음처럼 잡혔다. 임원 식당에서 아침과 점심을 전채부터 후식까지 모두 갖춰 먹는 것은 임원들의 특권이고 복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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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사장은 매일 오전, 오후 현장에 나갔다. 안전모에 안전띠까지 착용하고 신발은 현장 직공들 것과 똑같은 안전화를 신었다. 6층 로비를 특유의 걸음걸이로 가로지르는 황 사장 뒤를 새로 채용한 중국인 비서가 뒤쫓았다. 대학교를 갓 졸업했다는 비서는 황 사장처럼 완벽한 작업복 차림으로 어깨에는 기다란 작업용 전등을 비껴 걸고 손에는 커다란 회사 수첩을 든 채 황 사장의 빠르고 정확한 걸음걸이를 쫓느라 허둥지둥했다.

회의 시간은 더욱 격렬해졌다. 황 사장은 자신이 직접 관찰한 현상과 확인한 사실을 회의 자료와 대조했고 그 괴리를 해당 임원에게 물었다. 임원들은 나름대로 해명하고 탄원하고 하소연했지만, 소용없었다. 황 사장은 왕성하고 강력한 어조로, 그 걸걸하고 들끓는 힘이 있는 목소리로 끝장을 볼 때까지 임원들을 추궁했다. "아는 걸 말하세요. 아는 걸 아는 만큼만 말씀하시란 말입니다!" "아녜요, 아녜요, 그 얘기가 아니잖습니까. 왜 엉뚱한 얘기로 논지를 흐트러뜨립니까? 분명히 말하세요!" "이전 회사에 다닐 때도 똑같이 하셨다, 이 말씀입니까?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조건 달지 마세요.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지 말고 지금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확실히 알고들 말씀하시란 말입니다. 흐리멍덩하게 얘기하면 누가 알아듣습니까? 보여지기는 뭐가 보여집니까? 보는 거고 듣는 거고 생각하는 겁니다. 보여지고 들려지고 생각되어지고 그딴 말 집어치우세요.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게 확실한데 왜 꼬리를 말아 말합니까?" "아니 딴소리 말고 주체를 말씀하란 말입니다. 관리 주체, 주무 부서가 누굽니까? 자꾸 타 부서나 협력 부서라고 에두르지 말란 말입니다. 조립 2팀이면 조립 2팀, 선장설계면 선장설계, 왜 말을 똑바로 못 합니까?" "그래서 지금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결론이 뭐냔 말입니다. 자기가 한 일이면 자기 의견이 있을 거 아닙니까!" "지금 내가 다른 부서를 헐뜯으라고 하는 겁니까? 부족했다느니, 미흡했다느니 하는 소리로 덮어놓고 자기 부서 잘못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각자 자기가 한 것, 하지 못한 것, 다른 곳에 해야 할 것, 하지 않은 것을 적시해 말하란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세요, 구체적으로! 지금 상황을 사실대로 똑똑히 말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걸 바꾸려면 어느 부서가 어떻게 나서고 도와야 할지 찍어서 말하란 말입니다. 왜 어영부영하는 것과 예의를 착각들 하는 겁니까?" 황 사장은 쇳내 풍기는 목소리로 포화를 퍼부었다. 그 포화 속에서 무능한 임원들의 해명은 변명이 됐고 변명은 핑계가 됐으며 핑계는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무관심과 무책임은 이해력과 관찰력 부족, 관리 태만, 책임 회피, 분별력과 판단력 결여로 낱낱이 까발려졌다. 황 사장은 거침없었다. 알아야 하지만 모르는 것, 잘못됐지만 바로잡지 않은 것, 간과하고 누락해온 것, 관습대로 해온 것들을 걸려드는 대로 일일이 끄집어내고 누더기가 될 때까지, 모든 것이 명확해질 때까지 질문과 문책으로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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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사장은 정 이사를 쳐다봤다. "진수가 한 달이 밀리면 인도는 얼마나 밀릴 것 같습니까?" "인도일 기준 최소 두 달가량 밀릴 것 같습니다." "두 달이면 장담할 수 있습니까? 책임질 수 있습니까?" 정 이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을 바꾸세요!" 황 사장이 말했다. "하루하루가 벼랑 끝입니다. 지금은 미룰 날짜를 셀 것이 아니라 만회할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란 말입니다. 두 달은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 일정까지 포함해 직공들은 밥을 먹어야 하고 월급을 받아가야 합니다. 가스와 전기는 돈을 줘서 사 써야 하고 장비와 설비는 소모해야 합니다. 선주들 역시 가만히 앉아 기다리지 않습니다. 벌금은 벌금대로 내고 신용은 신용대로 잃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고스란히 다음 호선, 다음 계약에 반영될 것이고 회사 전체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걸 몰라서들 하는 소립니까? 아무것도 공짜가 아닌데, 왜 알 만한 사람들이 그걸 모른 척하고 있습니까?" 황 사장은 자신의 책상 양옆으로 앉아 있는 임원들을 봤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회사의 모든 사람이 그 고통을 나눠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나누는 게 책임을 나눠 진다는 건 아닙니다. 회사가 어려워진다면 잘못은 내게 있고 또 각자 자기 분야에서 최고참이자 전문가인 임원들, 우리 경영진에 잘못이 있습니다. 책임 역시 내 책임이고 우리 경영진의 책임입니다. 수십 년 일해온 우리가 각자 자신이 맡은 일조차 장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뒤집어 말해 돌발 상황과 변수를 통제하지 못하고 다른 부서가 일하는 것에 자기 일을 맞춰나가겠다고 하는 이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내 일의 주도권을 남에게, 외부 요인에 내줬다는 게 명백한데도 그걸 되찾을 거라고, 되찾아야 한다고 어떻게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실패와 지연에 적응하고 익숙해질 수 있습니까?" 회의실 안은 적막했다.

황 사장이 말했다. "진수일은 계획대로 갖고 갑니다. 지금부터 실무자들은 그 날짜까지 작업을 마치려면 필요한 것을 나한테 직접 말씀하세요." 임원들 뒷자리에 앉은 팀장들부터 술렁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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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사장은 호선별 담당자를 모두 알았다. 저녁마다 올라오는 일일보고 메일을 꼼꼼히 읽고 있다는 증거였고 그것이 팀장들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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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호선 공정 담당자들과 일일이 사안을 확인하고 정리한 뒤 황 사장은 말했다. "한 번 더 말합니다. 일에 끌려간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우리가 일을 끌고 나가는 겁니다. 처음 회의 시간에 나온 말대로 한 달을 연기해 그 한 달을 장담할 수 있다면, 나는 한 달을 연기하고 직접 회장님과 선주에게 양해를 구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한 달을 장담하지 못했습니다. 장담할 수 없는 한 달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일에 질질 끌려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가 손에 일을 잡고 있는 게 아니라 일이 우리 목덜미를 틀어쥐고 있는데 어떻게 장담하고 책임지겠습니까? 우리가 일을 하는 거고 우리가 일을 휘어잡고 있어야 합니다. 각자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일을 반드시 시간 안에 해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인력, 자재, 장비, 설비 원인을 확실히 알아낸 뒤 그것을 담당 임원들에게 요청하고 또 내게 요청하세요. 당신들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그 일을 잘해낼 수 있게 이끌고 도와주는 게 나와 임원들의 역할입니다. 알았습니까?"

다음 날부터 황 사장은 오전, 오후 한 번씩 1002호 진수 회의를 주관했다. 팀장들이 작업 관리에 시간을 뺏기지 않게 아침밥을 먹은 직후, 저녁밥을 먹기 직전으로 시간을 맞췄다. 업무 시간에는 직접 현장에 나가서 부서들이 지시한 사항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확인했고 새로 발생한 문제들을 현장에서 즉시 보고받았다. 문제를 보고하지 않거나 놓친 팀장들을 호되게 나무랐고 임원들에게 현장을 다니면서 애로 사항을 청취하고 상관 부서들에 즉각 업무 협조를 요청하라고 시켰다. 그렇게 하면서도 심야까지. 새벽부터 팀장들에게 업무 지시 메일을 보냈다.

황 사장은 선상지원팀을 신설했다. 공무, 선거, 안전 관리 부서들에서 인력을 차출하고 신입 직원들을 보강한 팀으로, 생산에 필요한 지원 설비인 '조통통자발', 즉 조명, 통로, 통풍, 자재, 발판 다섯 가지를 전담으로 설치, 준비하는 부서였다. 이전에는 조명 설치, 통로 확보, 발판 설치 모두 제각각이었고 그것을 생산 부서 기사들이 일일이 직접 챙겨야 했다. 황 사장은 각 생산 부서에서 전날 작업 계획서를 퇴근 전까지 보내면 선상지원팀 인원이 정한 시각에 찾아가 미리 작업환경을 조성하라고 지시했다.

팀을 신설했다고 처음부터 황 사장의 뜻대로 일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어느 팀장과 친하면 먼저 해주거나 또 기사, 대리가 연락하면 무시하다가 임원이 연락하면 들어주는 일들이 일어났다. 황 사장은 대로했다. 회의 시간에 관련자를 모두 일으켜 세워 문책했고 부서 역할을 부서장의 힘이나 친소 관계, 이해관계로 환원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각 팀의 역할은 그야말로 각 팀의 역할이며 의무와 책임, 권한입니다. 임원이나 팀장 한두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이 같은 상황을 반복할 시 해당 관리자는 반드시 징계하겠습니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원칙을 지키세요. 지원팀은 요청 순서에 따라 지원하고 동시 지원이 불가능하거나 선지원이 반드시 필요할 경우, 관련 당사자들끼리 먼저 협의시켜 지원 순서나 규모를 지원팀에 다시 알리라고 요청하십시오. 생산팀은 생산팀, 지원팀은 지원팀입니다. 지원팀에서 생산팀의 시급 여부를 지레짐작해서 어느 쪽을 먼저 지원하거나 뒤늦게 지원하는 일이 없도록, 또 생산팀에서 지원팀에 사람이 없다고 손 놓고 기다리는 일이 없도록 엄히 단속하겠습니다.

이어 황 사장은 공무팀 팀장에게 지시해 1002호 관련 작업자들이 한 채널을 사용하도록 조치시켰다. 사장실에도 무전기를 비치해 1002호 주파수에 맞춰두고 라디오처럼 일과 내내 틀어놨다. 수시로 무전기를 들어 지시했고 실무자들 간 소모적 언쟁이 오가면 즉각 중단시킨 다음 조치를 결정해 하달했다. 현장에 없는 시간에도 현장에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황 사장은 막대한 정보를 받아들였고 그만큼 막대한 양의 일을 해치워나갔다.

1002호는 사장이 공고한, 선표상 진수 예정일보다 일주일 늦게 진수했다. 늦기는 했지만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던 그 한 달을 3주나 앞당긴 것이었다. 진수는 1박 2일에 걸쳐 무사히 끝났다. 그것 역시 이전 2박 3일에서 크게 당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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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했다. 진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배는 참혹하다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선체 외판은 염산을 부은 듯 녹아내려 있었다. 배의 내부가, 자동차를 싣는 갑판과 골조들이 개복한 환자의 갈빗대처럼 훤히 보였다. 균등한 높이로 층층이 올라가 있어야 할 갑판들은 포탄을 맞은 것처럼 허물어지고 으스러져 있었고 갑판을 받친 쇠기둥들은 죄 녹슨 채 휘고 기울고 반 토막 나 있었다. 배는 유령선 같았다.

중국인 잠수부가 선미 쪽으로 고무보트를 몰았다. 거대한 극장 화면에 비친 것처럼 배의 참담한 절반이 시야를 완전히 채웠다. 황 사장과 권 전무 모두 눈을 떼지 못했다.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얇은 선실 부위는 태풍이 휩쓸고 간 듯 형해조차 불분명했다. 간신히 붉은 철판들이 이곳저곳에서 고장 난 시계추처럼 덜렁거렸고 난간과 장비가 모두 쓸려나간 갑판 상부는 곪아 터진 환부처럼 짓뭉개져 있었다. 수밀 작업이 성과를 낼 수 없던 것은 당연했다. 중외벽, 하외벽 할 것 없이 모두 긁히고 찢긴 상처투성이였다. 평형수 탱크로 이어지는 아래쪽 철판은 새카맸다. 따개비들일까? 고무보트가 선체 가까이 붙자 분명히 보였다. 따개비가 아니었다. 구멍이었다. 배 전체에서 가장 두꺼운 철판에 난 구멍이었다. 수십 센티미터 넘는 철판조차 녹이고 파먹은 녹 구멍이 따개비처럼 빽빽한 것이었고 2년 동안 빛 한 번 보지 못한 평형수 탱크의 암흑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썩었다. 싸그리 다 썩었어." 황 사장이 씹어 뱉었다. 권 전무는 말이 없었다.

고무보트가 선미에 이르자 중국인 잠수부는 다시 한번 배를 둘러볼 것인지 물었다. 황 사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더 볼 것도 없다." 고무보트가 다시 임시 선착장으로 돌아갔다. 부두 위로 올라서자 눈이 퀭한 사람들이 다가왔다. 황 사장은 내뱉었다. "썩었다. 마카 다 썩었다." 날이 개고 안개가 걷혔다. 고무보트를 타지 않아도 배의 반쪽이 훤히 보였고 사람들은 황 사장의 말을 실감했다. 괴물이 씹다 뱉어낸 듯 배 반대쪽은 완전히 삭아 있었다. 저걸 재건조하겠다고? 어림없는 소리였다.

회장은 점심 전에 들어왔다. 간밤에 샴페인이라도 터뜨렸는지 얼굴이 부스스했다.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오자마자 배 상태부터 살폈다. 믿기지 않는 듯 굳이 고무보트를 타고 가까이 가서 참상의 세부를 확인했다. 뭍으로 돌아온 회장은 곧장 황 사장을 불렀다. "재건조할 수 있겠습니까?" 황 사장은 잠시 막막한 듯했지만, 대답했다. "불가합니다." 회장은 돌아갔다. 함께 온 임원들이 뒤따랐다. 황 사장은 서 있었다.


(...)


연휴가 끝나고 나는 정시에 출근했다.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출근 버스에서 사람들은 일어선 배 얘기로 부산스러웠다. 이미 출근한 중국 직공들은 통제 중인 현장을 에워싼 채 일어선 배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침 회의는 길었다. 황 사장은 임원들에게 재건조 가능성부터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불필요한 지시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회장은 보고서로, 각 부서 임원들이 내놓은 의견을 정제하고 정리한 문건으로 배의 재건조 가능 여부를 알고 싶어 했다. 그 보고서에서 재건조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그것을 근거로 황 사장을 다그칠까? 그 보고서 한 묶음이 썩은 배를 재건조하기라도 한다는 듯. 어쩌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보고서를 결재하지 않고 물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임 상무가 한 농담처럼 배가 회장을 알아보고 벌떡 일어나 주면 얼마나 좋을까? 여자들이 새 원피스를 입듯 배가 깨끗하고 말끔한 새 강판으로 갈아입어 준다면, 정말 그래 준다면.

황 사장은 회장의 지시가 회장의 지시대로 이루어지도록 내버려 둔 채 자신의 일을 했다. 


(...)


자금 상황은 더 나빠졌다. 채권단이 자금 지원 규모를 줄인 것은 아니었다. 구조가 끝나자 이전부터 돈줄이 죄어 있던 이유가 드러났다. 회사 돈이 필리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조선업이 당분간 살아나갈 가망이 없자 회장은 그쪽으로 승부를 걸었고 채권단에서 운전자금 명목으로 들어온 돈도 빼돌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빼돌린 것이었다. 더 있었다. 양 이사가 딴 주머니를 찼다는 얘기가 들렸다. 이전 구매팀이 결제 지연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대거 한국으로 빠져나간 뒤 새로 들어온 구매팀에서 나온 얘기였다. 견적과 협상가, 실구입가가 제각각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부청은 그저 모르는 얘기라고만 말했다. 중요하지 않았다. 배만 썩은 것이 아니었다. 회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썩은 배를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듯 황 사장은 자신의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썩은 배를 어찌할 수 없듯, 썩은 회사도 어찌할 수 없을 터였다. 이런 것이 회사였다. 이런 회사들이 돌아가는 곳이 세상이었다.

어리석은 사람은 저 사람들이 아니라 황 사장일지도 말랐다. 나는 결국 모든 것이 썩었고 썩은 것은 썩어 문드러지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냉소와 비관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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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바빠 부득이 문 대리를 청했습니다." 황 사장은 이전 인터뷰 때와 다름없이 환하고 따뜻하게 나를 맞아줬지만 목소리는 쉰 듯 꺼끌거리기만 했다. 이전 같은 왕성한 원기를 느낄 수 없었다. 회의에 안 들어간 지 한참이라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넓은 이마의 머리숱은 눈에 띄게 줄어 있었고 볼은 홀쭉해져 있었다. 귓가의 흰머리는 더 늘어 재를 묻힌 것 같았다. 그새 많이 늙어 있었다. 나는 이전의 황 사장을 떠올렸다. 쇳내 풍기던, 들끓는 힘이 있던 목소리와 흐벅진 흙을 푹푹 밟으며 걷는 기운찬 농부 같던 걸음걸이를, 또 혁신에 관해, 일과 젊음, 올바른 순환에 관해 말하면서 불꽃을 튀길 듯 나를 바라보던 눈빛을. 아주 옛날 일 같았다. 나도 해를 넘기면 서른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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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 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 늙어간다. 가능성과 원기를 잃는 것이다. 존재가 가난해진다. 젊음이 인생의 금화라던 황 사장의 말 역시 수사가 아니다. 이대로 10년, 20년 또 어느 회사에서 삶을 보내든 그 회사가 모두 이렇다면 내 인생의 금화는 결국 몇 푼 월급으로, 지폐로 바뀌어 녹아버릴 테고 나는 그저 노인이 돼 있을 터였다. 그다음은 끔찍하다. 명예퇴직, 권고퇴직, 그런 말 아닌 말로 수십 년 회사 일에만 길들고 늙은 사람인 채 양계장에서 풀어준 노계처럼 세상에 나올 것이다. 남는 것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잘해야, 그것도 아주 잘해야 조 상무나 곽 상무 같은 사람이 될 터였다. 그 사람들은 그 방면에서 운과 능력이 모두 탁월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 나이가 되도록 그 지위와 권세로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황 사장은 어떤가? 불굴의 투사, 불요의 혁신가는? 결국 싸움에서, 이 끝없는 전쟁에서 내쫓기고 내쫓겨 패배하고 실패한 것이 황 사장의 종말이었다. 그래도 어떤 사람이 된다면, 황 사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렇게 쫓기든, 저렇게 쫓기든 다 그만 아닌가? 모두 늙고 쭈그러든다. 희미하게 옅어지고 사라진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모든 것이 허무할 따름이고 그 허무야말로 모든 것을 축축하게 짓누르고 있는 현실의 중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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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이 든 사람은 젊은 사람에게 뭘 주지 않는 걸까요? 사람이란 다 자기 앞에 선 사람에게서 꿈이나 이상 같은 걸 배우는 거잖아요. 하다못해 애들조차도 록 스타 사진을 보면서 처음 기타를 쥐기 마련이잖아요." 헤어지기 전 담배 한 개비씩을 피울 때 나는 물었다. 최 부장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사직서를 내고 보름 뒤, 최 부장은 마지막으로 출근했다. 정 이사가 회식하자고 했지만 최 부장이 원치 않았다. 퇴근 직전 최 부장의 고별인사가 있었다. 최 부장은 정 이사를 비롯한 팀장들에게 먼저 감사와 인사의 말을 한 뒤 나를 비롯한 대리, 기사들을 봤다. "내가 항상 우리 부서 교육 시간에 하던 말이 있습니다. 배운다는 걸 똑같이 따라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따라 하는 건 배우는 방법이다. 따라 하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더 잘하려고, 가르치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배우는 거다. 여러분 모두 아직 젊고 많은 일을 배워나갈 때니 이 말을 기억해줬으면 싶습니다. 우리가, 또 어떤 사람도 여러분보다 더 나은 인간이기 때문에 여러분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먼저 태어났고 먼저 배웠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어떤 것을 가르칠 뿐입니다. 그것이 선생, 먼저 난 사람이라는 말뜻입니다. 배우고 익히되 우리처럼 되지는 마십시오. 부디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최 부장은 잠시 말을 멈췄고 다시 이었다. "그동안 여러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덕분에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또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깨닫고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앞에 우리가 살고 해온 것보다 더 좋은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최 부장은 고개를 숙여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주 기사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통역하자 여직원 두엇이 훌쩍거렸다. (...)

최 부장의 마지막 말은 그날 밤 내가 한 질문에 대한 답 같았다. 앞서간 사람들은 각자 이정표였다. 그만큼 갔다는 것일 뿐 그곳이 끝이라는 뜻도, 그 길로만 갈 수 있다는 뜻도 아니었다. 


(...)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회사를 떠났다. 회사의 퇴행은 명백했다. 하지만 정 이사는 회사가 더 나아지고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회식 자리에서, 황 사장이 물러났으니 한국에서 인력 수급도 원활해질 것이고 임원들은 각자 최선의 노력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사장의 공백을 메우는 중이며 양 이사는 홍콩계 투자회사 쪽으로 새 자금줄을 틔웠고 회장 역시 유능하면서도 인덕 있는 새 사장감을 물색 중이라고 말했다. 정 이사도, 다른 임원들도, 또 회장조차도 퇴행을 퇴행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는 듯했다. 누워서 썩어가던 배를 멀쩡한 배라고, 구조해서 재건조할 수 있는 배라고 여겼듯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은 채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대로만 봤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아직도, 나중에도 자신들에게 있을 것이라는 듯. 채권단도, 어쩌면 돈을 댄다는 그 홍콩계 투자회사도 다를 것 없을 터였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몰락이었다. 내부에서 무너져 내리고 스스로 부스러지고 짜부라지는 몰락,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썩은 배처럼 참혹하고 돌이킬 수 없는 몰락. 어느 것도 어느 것을 기다리지 않으며 중간도, 보류도 없다. 황 사장의 말대로 모든 것은 좋아지거나 나빠질 뿐이다. 시간은 각자 흐르고, 썩을 것들은 썩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썩어간다. 배는 썩었다. 배도 썩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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