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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증발][실종] 우울한 저성장 사회의 민낯 《인간 증발》

by 노지재배 2017.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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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뷰하는 책은 《인간 증발》이다.


일본의 자발적 실종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일본 사회의 특수성과 구조적 문제점을 탐사한 책이다.


유럽연합(EU)의 공식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Eurostat)에 따르면(2014년 기준) 한국의 10만 명당 자살률이 EU 전체 평균의 2.6배에 달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한국은 2003년 이후 쭉 자살률 1위를 기록 중이다. 우리나라의 인구 10만 명당 28.7명으로 총자살자 수는 1만 4천여 명에 달한다. 세계에서 자살자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2만 3천여 명이 넘는 일본이다. 일본의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19명으로 OECD 국가 중 자살률 2위다. 


그나마 일본의 자살률은 일본 정부의 재정 투입과 지원으로 꾸준하게 줄어들 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사실 인구 대비 자살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일본 정부의 통계 이면에는 자발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증발자'들에 대한 통계가 빠져 있다는 함정이 있다.


인간 증발


일본에서는 1년에 3만 3,000명, 하루 90명 정도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렇지만 더욱 놀라운 점은 매년 1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증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 8만 5,000명 정도는 스스로 사라진 사람들이라고 한다. 


인간증발
국내도서
저자 : 레나 모제(Lena Mauger) / 이주영역
출판 : 책세상 2017.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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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파산, 이혼, 실직, 낙방 같은 각종 실패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 또 일본인 특유의 '체면' 의식과 실패를 용인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를 주지 않는 일본 사회의 특징이 어우러지면서 이러한 '증발자'들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가 떠올랐다. 화차 속 여주인공 역시 일본 내 자발적 실종자였다. 물론, 실종 이후 범죄를 통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 그 희생자의 명의를 도용해 자신의 존재를 아예 지우려 했다는 시도까지 나아가면 일반적인 자발적 실종자들의 평균치와는 거리가 먼 특수한 범죄 케이스에 가깝지만 말이다.   


이 책의 내용은 프랑스 저널리스트와 사진작가 부부가 일본의 자발적 실종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접한 뒤 직접 일본으로 찾아가 이들을 추적하고, 이처럼 일본 사회에서 '증발'이라 불리는 실종이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사회 구조의 문제점을 짚어본 것이다.


특히 일본 경제의 버블 붕괴 시기에 실종자들이 대거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점, '체면'을 중시하고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일본인들의 의식 구조가 이러한 '증발'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도 우리나라보다는 사회적 안전망이 갖춰졌다고 하는 일본에서도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구조와 생존경쟁에서 스스로 낙오하는 '증발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또한,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개화한 나라 중의 하나인 일본에 여전히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같은 '불가촉천민'인 '부락민'이라는 계층이 존재한다는 점. 국가나 관공서 차원에서의 공식 차별은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특별한 서류에 관리되고 사회에서도 그들만의 집단을 형성하면서 사회적인 냉대와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책 속에는 평범한 직장인에서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되자 가족을 내버려두고 연기처럼 사라진 가장, 병든 노모를 수발하면서 악착같이 버텼지만 결국 사채 빚만 지고 모텔에 노모를 버려둔 뒤 자발적으로 사라진 아들, 국가고시에 대한 압박감에 시험날 정작 시험조차 치르지 않고 사라졌다가 자살 시도 뒤에 발견돼 울부짖는 청년 등 저자들이 뒤쫓거나 만났던 수많은 실종자들의 사연이 소개된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기업체 임직원들의 정신교육 재무장을 시킨다는 한 사설 학교의 모습이다. 비인간적이고 일종의 광신도적인 집단 교육과 이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탈출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벌칙은 곧 '해고'다. 물론, '해고'를 각오하고 이 정신병원 같은 곳을 탈출할 뿐만 아니라, 그 길로 '증발'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더불어 실종자들을 북한의 '납치'와 연관 짓는 경우도 인상 깊었다. 자발적으로 사라진 사람들이 일본에서는 북한의 '소행'으로 의심되거나 호도되고 있다는 사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북한에 의한 납치 사례자는 단 17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한 해 8만 5,000명 정도의 자발적 실종자들을 두고 '북한'을 끌어들이고 있는 일본 사회의 또다른 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독서 경험이었다. 관동대지진이 떠올랐다고 하면 너무 나간 이야긴가 싶지만.


이 밖에도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뒷처리에 이처럼 자신의 과거를 지운 사람들이 악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흥미 있었다. 과거를 지우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국 싼 급여와 숙식 제공에 위험한 방사능 물질 제거 및 오염 물질 청소에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특히, 자본주의가 시작된 서구와 달리 사회적인 안전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우리나라 국민들에 일본 사회의 '증발' 이야기는 어찌 보면 결국, 우리가 향해가고 있는 미래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우리보다 먼저 저성장 사회로 들어선 일본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들의 슬픈 모습을 보고 싶은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 저자


레나 모제, 스테판 르멜

 

레나 모제는 프랑스의 저널리스트로 신문, 잡지, 텔레비전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다가 잡지 [21세기]와 [6월]에서 기자로 근무한다. 유년 시절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아본 경험의 영향으로 역사를 전공했다. 반려자인 스테판 르멜은 이 책에서 주로 사진을 담당했다.




■ 역자


이주영


숙명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불과를 졸업했다. 현재 출판번역가의 모임인 바른번역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목차


프롤로그 9


1. 야반도주 13

2. 증발하는 사람들 23

3. 은밀한 사업 37

4. 하시의 고백, 증발 26년 47

5. 일본의 불가촉천민 57

6. 시골에 숨어들다 71

7. 산야, 지도에도 없는 도시 79

8. 마키오의 고백, 증발 65년 95

9. 지옥의 캠프 101

10. 오타쿠의 성지 115

11. 실종자를 찾는 사람들 123

12. 아야에의 고백, 증발 21년 137

13. 실패에 관대하지 않은 사회 149

14. 사라진 청년, 그리고 북한 159

15. 도요타 시, 떠나거나 병들거나 미치거나 177

16. 덴지의 고백, 증발 33년 189

17. 자살 절벽, 도진보 195

18. 증발한 사람과 야쿠자 209

19. 테루오의 고백, 2년 만에 귀가 223

20. 후쿠시마의 연기 233


에필로그 250




■ 책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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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본의 불가촉천민


"이치로 가족은 부락민이야. 말 그대로 특수부락에 사는 사람들. 인도의 불가촉천민처럼 사회 최하층 계급이지. 중세시대부터 일본의 종교, 신도가 '더럽다'고 규정한 직업군에 종사하는 계급이 있어. 백정, 갖바치, 장의사 등 지저분한 것, 피, 죽음과 관련된 직업들이지."

"요즘도 그런 게 있어?"

"공식적으로는 없어. 19세기에 신분제도가 폐지되면서 부락민들도 호적에 등록되고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권리를 누리게 되었지. 그러나 실제로는 차별이 계속되고 있어. 부락민들은 주로 빈민촌이나 동네 외곽에 살고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비공식 장부로 분류가 되어 있으니까."

"부락민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증발하는 이유라도 있어?"

"은행이 대출을 거부하기 때문에 야쿠자가 운영하는 사채 회사에 돈을 빌린 부락민들이 많아. 지긋지긋한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야쿠자 일원이 되는 부락민도 있지."

일본인들은 이러한 차별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지만 재일 한국인, 브라질계 일본인 등 소수민족들은 이런 차별을 강하게 느낀다. 문화적으로 일본은 베트남에서 한국까지 이어진 중화문명권에 속한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고립된 섬나라 일본은 독자적인 문화를 탄생시켰고 여기에 강력한 국수주의 감정을 추가했다. 친구는 일본인들이 '우리는 다른 민족과 다르다'라는 집단적인 우월감과 일본인 이외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인종차별 의식에 놀란 적이 있다고 한다. 친구는 골목에서 우연히 확성기를 단 작은 트럭들을 본 적이 있는데, 섬뜩한 슬로건이 울려 퍼졌다고 한다. "조선인을 죽여라", "조선인들은 목을 매달아라, 독을 마셔라,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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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산야, 지도에도 없는 도시


산야는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곳이다. 기는 산야를 가리켜 도시 속의 도시, 범죄자와 부랑자, 노숙자, 빈민들이 득실거리는 지저분한 소굴이라고 했다. 도쿄의 게토라고 할 수 있는 산야를 지워 내리고자 일본 정부는 '산야'라는 지명을 지도에서 없애버렸다. 하지만 산야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택시 기사들은 불길한 산야 쪽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택시 기사들에 따르면 산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없는 인간, 모두에게 잊힌 인간, 이름 없는 인간'뿐이라고 한다.

산야에 가려면 미나미 센주 지하철역에서 내려 북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그러면 지하에 휘황찬란한 도쿄 중심부만큼이나 명확한 나름의 규율이 자리 잡은 또 다른 진짜 도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승객 수천 명이 열차 쪽으로 질서 있게 줄지어 걸어간다. 도쿄의 지하철은  언제나 시간이 정확하고 깨끗하며 환하다. 이상적인 도시 지하철의 모습 그대로다. 승객은 각자 자신만의 공간 속에 자리를 잡고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아무도 열차 안에서는 통화하면 안 된다는 규칙을 절대 위반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작은 모니터를 통해 무엇을 보는 것일까?  정장 차림의 수많은 승객들이 인파 속에서 자리에 몸을 파묻은 채 입을 벌리고 잠들어 있다. 삶이 이토록 피곤할 수 있을까? 

부슬비가 내린다. 산야가 가까워오면서 현대적인 풍경은 점점 옅어진다. 도시는 어둡고 조용하다. 정신없는 간판도, 고막이 찢어질 듯한 시끄러운 소음도, 자동차도 여기에는 없다. 상상하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세계 3위의 경제 대국 수도 안에 침묵이 가득하고 사회 규범이 통하지 않는 유령 같은 세계가 있다. 에도시대에는 범죄자 처형장이었다가 훗날 도살장이 되었고 그다음은 일본에서 가장 커다란 인력시장이 되었다. 좁은 골목마다 쓰레기가 널려 있고 지린내와 술 냄새가 진동한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그림자들 외에는 인기척이 없다.



(...)



유이치가 가파른 계단을 올라 방문을 밀어서 연다. 한쪽에 이불을 개켜놓을 자리만 있을 정도로 매우 비좁은 방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간혹 여성이 있긴 하지만 여기에 묵는 투숙객들은 대부분 혼자 지내는 남성이고 좁은 방이 유일한 편의시설이라고 한다.

다른 방에 묵고 있는 마사오는 이제 갓 스무 살의 청년으로 요 위에 앉아 담배 연기를 동그랗게 내뿜는다. 요 주변에는 여행가방이 열려 있고 노트북이 켜져 있다. 산야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데 벌써 삶의 희망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입시에 실패하고 교도소에 다녀온 후 살던 도시에서 스스로 증발했다고 한다. 부모님에게 사회적으로 못난 아들로서 수치심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수치심과 증발은 모두 못할 짓이지만 마사오는 이 중에서 그나마 후자가 낫다고 생각해 그 길을 선택했다. "아마 가족은 제가 죽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제가 왜 떠났는지는 이해했겠죠. 부모도 절 찾지 않을 겁니다." 잠시 후 담배의 동그란 연기가 올라온다.       

"낯선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모텔을 관리하는 유이치는 1층에서 잠을 자고 2층의 작은 사무실에서 근무한다. 전에는 도쿄의 북쪽 지역에서 공사장 일용직으로 일하며 밥값을 벌었다. 유일한 자산인 튼튼한 두 팔은 '자유'를 안겨주었다. 또한 일용직이지만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몸져눕자 유이치가 치료비, 집세, 식비를 모두 부담하게 되었다. 한 달이 지나고 나자 그의 수중에는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혹여 나이 든 어머니와 거리로 쫓겨날까 봐 두려웠던 그는 대출을 받았고 곧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더 이상 어머니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모든 것을 주었지만 전 어머니를 돌볼 수 없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봄날 새벽, 유이치는 저렴한 모텔을 알아본 후 병든 어머니를 그곳에 버리고 그대로 달아났다. 쓰레기 채집과 막일을 전전하다가 산야의 이 작은 모텔을 관리하는 일을 맡 게 되었다. 그는 2층의 사무실과 투숙객들 사이에서 사는 현재의 삶이 편하다. 산야의 주민 중 몇 명이나 야반도주해서 왔는지, 가명을 사용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정부의 지원도 전혀 받지 못하고 자급자족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별로 관심도 없다. 여기서는 모두가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죽어갈 것이다.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은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사회를 벗어난 우리는 이미 한 번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서서히 자살해가는 셈이죠."



(...)



매일 새벽 노리히로는 가게 앞에 서서 일꾼 모집자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술, 피로, 우울함, 겨우 입에 풀칠 정도만 하는 삶, 노리히로가 이미 경험한 일이다. "산야에는 저 같은 사림들이 수천 명이나 됩니다. 갚지 못한 빚, 절망,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 싸움이 일상이죠. 그런데 자살하는 젊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노리히로는 '경찰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쓰고 있다. "이 시기만 지나면 제 원래 이름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증발해서 이곳에 숨어든 사람들은 새로운 삶이 자리를 잡으면 다시 본명을 사용하죠. 하지만 가족에게 지금의 이런 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절 보세요. 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일 죽는다 해도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마흔 살까지도 준수한 외모를 자랑하던 노리히로는 아내와 살면서도 바람까지 피우던, 한때 잘나가는 엔지니어였다.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했지만 평소와 똑같이 생활했다. 여느 때처럼 아내의 배웅을 받고 출근했다. 예전에 다니던 직장 앞에서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지도, 말하지도 않고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런 생활을 일주일 동안 했다. "더 이상은 못 하겠더군요. 저녁 7시가 넘어도 돌아갈 수 없었어요. 전에는 퇴근 후 상사나 동료들과 한잔하러 가곤 했으니까요. 길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집에 돌아갔는데 아내와 아들이 의심하는 것 같더군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가져다줄 월급 는 없었고요...."

원래 같으면 월급을 받았을 그 날, 노리히로는 말끔히 면도하고 아내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한 후에 평소에 타던 지하철을 이용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그는 그렇게 지하철을 타고 증발해버렸다. "절 찾았을 부모님을 생각면 마음이 아픕니다. 부모님이 건강히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부모님은 여전히 제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이미 돌아가셨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노리히로는 아내와 아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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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지옥의 캠프


알 수 없는 규칙, 격식, 장벽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일본 사회에서 어두운 부분들을 조사하기란 생각만큼 녹록지 않다. 일본에서는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면 배척을 받는 것 같다. 통역을 구하는 간단한 일도 신경 쓸 일이 많다. 처음 이메일을 교환할 때는 대부분 분위기가 좋다. 통역 비용(하루 기준 약 32~38만 원), 통역 가능 시간, 업무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렇다. 그러다가 인간 증발이라는 주제를 꺼내면 어김없이 모든 것이 멈춘다. 많은 일본인 통역사들이 장례식 같은 피치 못할 사정을 내세우며 거절한다. 드물지만 솔직하게 할 수 없는 사정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실패와 마주해야 하는 두려움, 주변에 이 불편한 문제를 질문해야 하는 곤란함 때문이다. 일본 체류비 지원을 새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France2 방송국에 '임직원재교육학교'를 취재하는 특파원 르포를 제안했다. 스테판과 함께 이미 며칠 전에 다녀왔는데, 학교라기보다는 정신병원에 가까운 곳이다. 이곳에서 여러 회사의 임직원들이 정신병원의 흰색 환자복을 입고 13일 동안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아이처럼 읽는 법, 쓰는 법, 말하는 법, 생각하는 법, 행동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창립 멤버들이 '지옥의 캠프'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는 임직원재교육학교는 이상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일본의 회사들의 모습을 크게 비추는 확대경 같다. 재교육의 목표는 '부족한 점이 많은 직원들을 질서와 순종이라는 바른 길로 다시 인도하는 것'이다.



(...)



학교는 세워진 지 30년이나 되었지만 규칙은 달라지지 않았다. 매일 아침 군대처럼 5시 30분에 일어나 깃발을 들고 캠프의 노래(지옥의 13일)를 부르며 회사가 내세우는 가치인 돈, 제품, 인간을 되새긴다. 그리고 야외 체조가 이어진다. 그다음에는 기본 규칙 암기 시간이다. 열 가지 생활수칙을 암기하고 하루 종일 반복해서 힘차게 복창하되 너무 큰 소리로 해서도, 너무 작은 소리로 해서도 안 된다.

"꾸물거리지 않고 시간을 정확히 지킨다." 

"단기간에 최대의 성과를 낸다."

"상사 험담을 하는 사람들에 동조하지 않는다."

"음식을 씹을 때는 양쪽으로 골고루 씹는다."

"영양을 생각해 골고루 뭐든 편식하지 않고 잘 먹는다."

"옷 입는 법,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법, 전화받는 법, 책상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법을 제대로 익힌다. 질서와 규칙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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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의 교육은 뇌 세탁에 가깝다. (...) 일본 사회는 수직적인 서열과 윗선에 대한 신뢰가 구간을 이룬다. 이 두 가지 기본에 따라 인간관계, 개인과 국가의 관계가 정해진다. 도쿠가와 막부 때부터 생겨난 것이 서열 의식과 윗선에 대한 신뢰다. 당시 지배 계층인 쇼군은 피지배 계층을 사농공상이라는 네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지배했고 사회는 집단을 단위로 움직였다. 이 같은 조직의 윈리에 따라 개개인의 정신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정신도 시간이 지나면 면도날처럼 녹스는 법. 그래서 재교육 캠프를 통해 무딘 정신을 날카롭게 갈고 실습과 규칙으로 다시 정신을 빛낸다. 

매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임원들은 상사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 오늘 하루 성공적이었던 것과 실패한 것을 상세히 적어야 하고, 특히 캠프 과정에 보내준 것에 감사하는 내용을 적어야 한다. 



(...)



여기서 반항하는 인간은 강하지 못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강한 사람은 개인의 행복보다는 의무를 앞세울 줄 알아야 한다. 캠프에서는 강한 정신력이 반항이 이니라 규칙에 대한 복종에서 나온다고 했다.



(...)



양복 차림의 임직원들이 버스에 올라타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캠프 송을 부르십시오." 교관들이 짧게 지시한다. 버스가 덜컹이고 합창이 울려 퍼진다. "이마에 띰을 흘리며 열심히 만들고 팔자. 영업맨은 끈기로 버텨야 한다." 버스는 경작지를 지나 어느 작은 도시의 버스터미널 앞에 멈춘다. 테스트의 내용은 버스터미널에서 <지옥의 13일> 노래를 다시 부르되 도로 맞은편에 있는 교관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소리로 부르는 것이다. 성대가 피곤해지는 테스트다.

자동차들이 속도를 줄인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놀라서 발걸음을 멈춘다. 이번 테스트의 취지는 이렇다. 모범생 같은 샐러리맨이 수치심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

"회사가 저희들을 이곳에 보낸 이유는 밑바닥을 경험하고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알고 싶어서죠."  통통한 임직원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말한다. 하지만 모두가 이곳 캠프의 훈련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훈련을 받는 임직원들 가운데 2퍼센트가 매년 도망친다. 맨발로 밭을 가로질러 달아나거나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친구에게 도와달라고 전화해 도망친다. 어떤 식으로 도망치든 처벌은 늘 똑같다. 해고. 행방불명이 된 사람도 있다. 재교육학교를 설립하고 <지옥의 13일> 노래를 만든 대표는 이렇게 사라진 사람들은 그저 '패배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도망친 사람들을 무척이나 경멸하고 있다. 그가 만들어내는 것은 오직 승리자들이다.

어떤 상사들은 직원들이 나아졌는지 확인하려고 캠프로 찾아오기도 한다.  흰색 상의를 입은 스즈키 신고는 경직된 모습으로 운동장에 있는 상사에게 다가가 고개 숙여 인사한다. "제가 얼마나 무능하고 오만했는지 깊이 이해했습니다. 이 깨달음을 회사를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에게는 마지막 시험이 남아 있다. 자기비판. 신고는 옷을 홀딱 벗고 자신의 잘못과 단점을 고백해야 한다. 심사위원 세 명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책상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 신고가 자기비판을 시작한다. "이번 연수를 받으면서 그동안 제가 얼마나 편협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자만했습니다." 

"더 크게!" 

신고가 목소리를 높인다. 

"좀 더 크게!" 

13일째 되는 날은 공기도, 하늘도 맑다.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은 검은색 양복을 입게 되고 통과하지 못해 3일을 더 훈련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다시 흰색 상의를 입는다. 폐회식 무대는 나무랄 데가 없다. 계속 과묵하게 있던 학교의 매니저 가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연수를 받은 사람들은 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지옥은 바깥세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강당은 순식간에 비워진다.

학교 매니저가가 홀로 남아 걱정한다. "버블처럼 큰일이 다시 터질까 봐 두렵습니다. 전에도 회사들이 직원들을 여기로 보낼 여유가 없었거든요. 홍보를 담당하는 그가 조용히 껌을 씹는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 학교를 우습게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은퇴를 대비해 벌써부터 집세라도 벌 수 있는 새로운 부업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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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오타쿠의 성지


알록달록한 고층 빌딩 아래, 메이드 복장의 소녀가 캔디 핑크 색 미리를 두 갈래로 땋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롤리타 차림의 소녀와 만난다. 아키하바라 지하철역 밖으로 나오면 고양이 귀 머리띠를 한 소녀들, 가터벨트를 한 공주 차림의 소녀들, 여느 인간들처럼 자기 할 일을 하는 로봇들, 드래곤볼 캐릭터 같은 코스프레 차림의 사람들과 쉽게 마주칠 수 있다.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들은 아키하바라를 자신들의 본부, 행성, 메카로 생각한다. 아키하바라는 그야말로 무표 입장하는 디즈니랜드 같은 곳이다. 도쿄 북쪽에 위치한 아키하바라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속 가상의 캐릭터들을 현실로 튀어나오게 해주는 의상을 파는 가게들이 밀집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쇼핑몰 가운데에 통유리 카페가 있다. 마치 어항처럼 보이는 이 카페의 이름음 '메이드 카페'.

예쁜 갈색머리에 붉은색 기모노를 입은 메이드가 자신은 판다 공원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한다. 7유로(약 9,000원) 정도 되는 레몬 민트 코디얼(과일 주스에 물˙설탕을 탄 음료를 뜻한다.)을 주문하자 메이드는 내게 감사의 뜻으로 손 하트 모양을 그리며 춤을 춘다. 메이드의 손가락이 섬세하게 접어 하트 모양을 만든다. 메이드의 목소리가 리듬을 탄다. "사랑을 담아 모시겠습니다, 주인님..." 그녀의 친구 피치 역시 '주인' 스테판에게 '사랑을 담아' 음료를 내온다. 피치는 신데렐라 차림이다. 아마도 어릴 때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신데렐라였나 보다.

메이드들은 모두 열일곱 살이라고 한다. 피터팬처럼 절대로 나이를 먹지 않는단다. 그리고 마치 요정처럼 실제 삶에 관한 질문은 교묘히 피한다. 그런데 두 명의 메이드 모두 대학생이라고 한다. "저는 꿈입니다. 꿈을 팔고 있습니다." 피치가 자리를 뜬다. 대학을 졸업한 지 오래되어 보이는 어느 남자 손님이 플라스틱과 작은 뼈로 된 장난감 강아지와 놀려고 피치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인생의 패배자이지만 메이드의 부드러운 눈빛 덕분에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는 추가 비용을 내고 피치의 사인이 들어간 사진도 사고 신데렐라에 나온 호박마차와 잃어버린 유리 구두 이야기를 하며 추억을 만든다. 외로움을 달랜다.

일본인들은 판다 차림, 신데렐라 차림, 기타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 차림으로 분장한 이들을 가리켜 '오타쿠御宅(일본어로 '집'을 의미)'라고 불렀다. 오타쿠라는 말은 1980년대 초에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취미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주로 인형 수집가, 동인지 수집가, 만화 캐릭터 팬, 게임 중독자 등이 오타쿠로 불린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신만의 취미에 몰두하며 혼자 방에 틀어박혀 생활하는 오타쿠들은 일본 옅도에 약 30만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눈에서 멀어져 텔레비전을 보고 익명으로 온라인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때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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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부터 클럽과 동호회가 만들어졌고 쏟아지는 야유에도 불구하고 가장 외향적인 오타쿠들이 모여 거리 퍼레이드를 벌였다. 회사에서 직원 교육을 담당하는 서른여섯 살의 맷은 일주일에 두 번 저녁이면 흰색의 펑퍼짐한 벤덤(미쉐린타이어 마스코트)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팝 밴드와 함께 무대에서 신나게 흔든다. 느긋하면서도 직설적인 그는 게으름 피울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로하며 건강을 해치기도 싫고 자본주의의 병사가 되기도 싫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바보 같아 보여도 재미는 있습니다." 그는 엄격한 교육, 어디서나 늘 최고가 되어야 하는 사회적 압박을 언급한다. 결혼에 대한 부모님의 압박과 직장 스트레스가 대표적이다. 맷은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일본의 속담을 인용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맷은 오타쿠들이 이런 압박 때문에 가상의 세계에 빠지고 현실과는 다른 삶을 상상하며 '사라져 간다'고 힘주어 말한다. 어디론가 떠나는 것만이 도피는 아니다. 사랑과 자유를 꿈꾸기도 하고 소소한 것, 코스프레, 노래, 춤이나 손동작에 만족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이미 많이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일본 사회는 다른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캐릭터를 통해 개성을 뽐내고 일상을 우상에게 바칩니다." 맷이 말한다. 어린 시절에 머물면서 환상 속에 사는 것, 개성 표현이 거의 허락되지 않는 일본 문화에 나름 반항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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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실종자를 찾는 사람들


성인이 스스로 증발하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족들도 대부분 아무 말 없이 체념하듯 받아들인다. 실종자 가족들은 운명이라 생각하고 말을 아낀다. "그렇죠.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이웃, 동료,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쓴다. 실종자보다 실종자를 돕는 단체가 더 많은 미국에서처럼 일본에도 실종자에게 귀를 기울이고 도움을 주는 단체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일본판 <SOS-우정> 이 있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전혀 없었다. 은퇴한 전직 경찰관들이 프랑스의 실종자 찾기 방송 〈실종Perdu de vue) 같은 텔레비전 프로 그램을 만들려고 하지만 아직은 준비 단계다. 새로 같이 일하게 된 통역사 준이 마침내 단체 한 곳을 알려준다. 2002년에 세워져 비밀리에 운영되는 단체로 '실종자가족지원협회'다. 가족을 찾는 사람들을 무료로 도와주고 싶은 탐정들이 설립한 비영리 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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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탐정은 매년 약 300건의 사건 의뢰를 받는다. 일본의 기준으로는 많지 않은 의뢰다. 이들은 매년 10만 명의 일본인이 실종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중 경찰에 신고되는 실종자가 8만5,000명이다. 일시적인 가출인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증발'이기도 하다. 사카에에 따르면, 경찰서를 찾아오는 가족들은 수치심을 이겨낸 것이다. 혹시 자살한 것은 아닐까 하며 가족들은 불안해한다. 절망에 못 이긴 사람 들은 가출하고 이삼 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많아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사카에는 그 어떤 약속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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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에는 스무 살에 증발해버린 청년 이야기도 들려준다. 회계시험을 보러 간다던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부모는 교수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중 한 명이 도쿄 남쪽에서 그를 우연히 봤다고 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일이었던 두 탐정은 목격 장소를 철저히 수색했고 사카에는 거리를 방황하던 실종자를 우연히 발견했다. 실종자는 불합격해 가족을 실망시킬까  봐 시험은 치지도 않았다고 한다. 자살을 생각했지만 어떻게 목숨을 끊어야 할지 몰라 배회하고 있었단다. 그는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사카에가 보기에 일본 열도는 '압력솥' 같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마치 약한 불 위에 올려진 압력솥 같은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러다 압력을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린다. 정말 문제는 터부시되고 있지만 연간 자살자 수 3만 3,000명, 즉 매일 집계되는 자살자 수가 90명에 이른다는 말이다. 일본 사희의 어두운 부분을 단적으로 부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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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네딕트는《국화와 칼》에서 일본인들은 과거의 관습 속에서 살아간다고 쓰고 있다. 일본인들은 넓은 의미에서 윗사람들(조상, 부모, 교수, 심지어 일왕)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진다. 이 빚을 갚는 것은 체면과 관련된 문제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에게 빚을 지지 않으려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를 당해도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질까 두려워서 소극적으로 행동한다. 빚을 지고 있다는 이 독한 감정은 의무를 요구한다. 그중 첫 번째 의무는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 의무는 너무나 강력해서 조그만 실수에도 일본인들은 크게 자책한다. 결국 예의를 지키고 타인에게 폐를 꺼지지 않기 위해 증발이나 자살을 선택한다. '일본인들은 실패, 수치심, 매정한 거절을 견디는 힘이 약하기 때눈에 자연스럽게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괴롭힌다.' 루스 베네딕트가 쓴 글이다.

금융 위기로 인해 부채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자 사람들의 증발이 대거 발생했다. 당시 두 탐정은 모두 젊은 나이였다. 증발 같은 야반도주는 늘 존재했지만 한편으로 합법적으로 빚을 없애는 방법을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암울한 신세대가 등장한다. 나이가 많아 봐야 고작 서른에 불과한 이들은 잃어버린 세대에 속한다.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1990년대에 고용시장에 나오게 된 이들 청년 세대는 더 이상 직장을 탈출구로 삼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상황은 이들 세대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었다. 백수로 지내거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이들은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어두운 상항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대학 졸업장은 아무 쓸모가 얹었고 경기 불황은 눈앞의 현실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부모의 집에 얹혀살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집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부가 부모님의 집에 들어와 사는 일도 있다. 불안한 현실과 깜깜한 미래 앞에서 이 새로운 캥거루족 세대는 탈출구를 찾고 있다.

당시 이 세대에 속하는 한 청년이 증발해 부모에게 간략한 편지를 보내왔다.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편지가 발송된 장소를 중심으로 경찰들은 실종자 수배전단지를 돌렸다. 청년은 증발한 지 10년 만에 발견되었다. 그는 본명 그대로 어느 파견업체에서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살고 있는 도시에 세금은 꼬박꼬박 냈지만 신용카드와 의료보험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빚이나 폭력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은 이름과 외모를 바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로 증발한 사람들은 자신이 발견되리라는 생각을 아예 안 합니다." 사카에 협회장의 설명이다. 증발했던 청년이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부모님을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전보다 쾌활하고 활기 넘치고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들이 무슨 이유로 증발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적극적으로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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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실패에 관대하지 않은 사회


증발한 사람은 장례식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다시 갑자기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혹은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냥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기도 한다. 증발했다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밖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거나 그냥 집 앞 계단에 앉아 있기도 한다. 혹은 양복을 입고 전에 다니던 직장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증발했다가 돌아와도 따뜻한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다. 배우자가 이사를 가거나 재혼을 했을 수도 있다. 자녀들에게는 패배자 혹은 겁쟁이 취급을 받는다. 타쿠미는 뜻밖의 결말을 맞이했던 수사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40대 남자가 시청 주차장에 세워둔 자가용 안에 신분증을 남긴 채 그대로 증발했다. 불법 사채를 이용한 후 협박에 시달리던 그는 도주했고 마침내 협회의 탐정에게 발견되었다. 탐정들은 모친에게 연락해 사라진 아들이 숨어 지내는 곳을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제안을 거절했다. 아들이 살아 있다는 소시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다쿠미는 재회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가족과 지인들은 시회에서 도망치는 것을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본 사회는 실패에 관대하지 않습니다. 실패는 개인이 사회에서 해아 할 의무와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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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난 일은 산산이 부서져버린 접시와 같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본래 상태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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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사라진 청년, 그리고 북한


도쿄만의 이곳 부두에서 미야모토 츠요시의 동생 나오리는 유람선을 타고 사라져 여태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가 사라진 때는 2002년 5월 3일. 당시 스물네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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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뒤, 우리는 미야모토 가족을 다시 만난다. 정장 차림의 가족은 어느 회의장 앞줄에 앉아 있다. 이 날 하루미는 월차를 냈다. 나오리 앞으로 부과되는 세금을 내기 위해 예순 나이에도 계속 일하고 있다. 미야모토 가족은 집중하며 바라보는데 깊은 인상을 받은 듯한 표정에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마치 군 관련 행사를 관람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검은색 휘장에 하얀색 깃발 세 개가 걸려 있다. 깃발 하나는 가로로 걸려 있고 나머지 두 개는 세로로 걸려 있는데 '가족을 집으로 보내주세요'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다. 참석자가 순서대로 단상에 올라 납북된 가족 이야기를 몇 시간 동안 들려준다. 납북자 가족들은 일본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여 있다. 미야모토 가족도 매년 이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벽돌로 된 회의장에는 몇몇 비영리 단체들의 부스가 모여서 전단지와 커피를 나눠 준다. 어느 협회의 여자 회원이 내게 네 번 접은 포스터를 내민다. 여러 실종자들의 얼굴이 담긴 포스터다. 실종자 사진 중에는 미야모토 씨네 막내아들 나오리의 사진도 있다. 미야모토 가족의 집 거실에 붙어 있던, 권투 시합장에서 찍은 나오리의 사진이다. 깡마른 남자가 방문객들에게 호소한다. "납북자 가족을 도와주십시오." 이 남자 역시 실종된 아들을 찾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김정일의 지시로 납북되었다고 공식 인정한 일본인의 수는 17명이다. 실종자 가족들이 주장하는 수천 명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북한은 아무런 설명 없이 일본인 다섯 명을 일본에 돌려보냈다. 그러나 일본과 북한의 관계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다. 미야모토 가족이 마치 의무를 다해 마음이 편한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회의장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이어서 마사에이는 3개월마다 늘 그래 왔듯이 나오리가 주민등록증을 갱신하러 오지 않았나 확인하러 시청에 갈 것이다. 미야모토 가족은 법원의 승인을 얻어 나오리 이름으로 된 특별계좌를 만 들어 매년 마사에이의 연금 일부를 입금한다. 마사에이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세월은 흐르고 우리 부부는 점점 늙어가고 있습니다. 나오리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보다 더 오랜 세월 이 일을 안고 살아야 할 큰아들은 더 힘들죠." 나오리의 어머니도 거든다. 나오리 소식만이라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오리가 원치 않으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나오리가 원치 않으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나오리가 필요하다면 돈도 보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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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도요타 시, 떠나거나 병들거나 미치거나


"결혼식날, 회사에서 허락하지 않아 동료들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퇴직한 그가 생각에 잠긴 듯 수염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예전 일을 떠올린다. 도요타에 처음 입사했을 당시 다다오는 스무 살이었다. 경험은 많지 않았으나 꿈은 컸다. 일본 북쪽의 시골에서 평범한 집 아들로 자란 그는 도요타에서 빨리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규직과 높은 연봉이 보장된다는 말에 기대가 컸다.

전후 일본에서 도요타는 미국의 경쟁사들을 최대한 빨리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창업자의 아들 도요다 기치로는 엔지니어들과 함께 헨리 포드의 책을 읽은 후 새로운 경영 모델을 구상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모델을 가리켜 '도요티즘'이라고 불렀다. 창업 당시 원래 이름은 도요다였지만 행운의 숫자인 8이 획수가 되는 가타가나를 채택하면서 도요타가 되었다. 도요다 기치로와 엔지니어는 대량생산을 기본으로 하는 미국의 헨리 포드 경영 방식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려 인건비를 줄이는 경영 방식을 도입했다.

도요다 기치로는 수요에 맞춰 회사를 운영하려 했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인력으로 주문 생산하여 재고를 없애야 한다. 이 같은 방식을 '린 생산방식'이라고 한다. 린 생산방식의 강점은 직원들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생산성을 끝없이 높이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제대로 적용하려면 특별한 장소가 필요했다.

1959년에 일본 정부는 소도시 코로모 시의 이름을 도요타 시로 바꿨다. 그로부터 6년 뒤 도요타 시에 도착한 다다오는 실망했다.

무늬만 도시지 주변은 온통 발이고 가운데에는  25년 된 낡은 공장만 하나 덩그러니 있는 것이 '커다란 시골 마을'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이 조용해서 목가적으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개구리울음소리뿐이었죠."

그로부터 20여 년 후 이상적인 자동차 도시, 도요타 시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전 세계의 정재계 지도자들이 도요타의 경영 모델을  배우기 위해 놀라울 정도로 고도화된 공장을 견학했다. 당시 사람들은 도요티즘을 마치 종교처럼 신봉했다. 일본이 그랬듯이 도요타도 전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기세를 몰아 도요타는 모방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2008년 드디어 미국의 제너럴모터스를 제치고 세계 제일의 자동차 브랜드가 되었다. 도요타 시에서만 수출용 자동차 900만 대 중 절반이 생산되었다. 도요타가 눈부신 성장을 하는 동안 다다오는 혼자서 '혁명'을 추진했다. 2006년, 도요타 시에 속하지 않는 유일한 독립 노조 '전도요타노동조합연합회'를 세웠다. 도요타의 공식 노조는 경영진과 긴 밀히 협조하는 관계였다.

4년 동안 전도요타노동조합연합회에 가입한 직원 수가 10명 정도다. 도요타 시의 총주민 42만 명 중 10명. 보기에는 얼마 안 되는 숫자지만 이 정도도 대단한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보초를 서는 것처럼 공장 앞에 선 다다오는 보행로를 가리킨다. "전단지는 여기까지만 돌릴 수 있습니다. 1미터 앞에 지하통로로 연결되는 계단이 있다. "저기서부터는 노조 전단지를 돌릴 수 없습니다. 도요타의 소유거든요. 저기서 전단지를 돌리면 확성기에서 도요타 직원들에게 전단지를 받지 말라는 지시가 큰소리로 울려 퍼집니다. 도요타 측에서 사람들을 보내 우리를 쫓아내기도 합니다." 

스테판이 공장 앞에 있는 다다오의 사진을 찍는다. 그때 경비원이 나타난다. 경비원은 팔로 X자를 표시하며 당장 사진 촬영을 중단하라는 사인을 보낸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을 보니 메시지는 분명하다. 도요타 시는 도요타의 명예를 해칠 수 있는 플래카드와 사진이 전부 필요 없다는 입장이다. 도요타의 촉수는 모든 것을 통제한다. 심지어 일부 가게들은 공장이 영업하는 시간에 맞춰 문을 열어야 한다. 우리는 다시 도요타 쪽으로 간다. 다다오가 사소해서 지나치기 쉬운 무엇인가를 짚어준다. 주변이 모두 질서정연해 보여서 미처 우리가 보지 못한 부분이다. 셔터가 내려진 가게들. 다다오가 이미 예견했던 일이고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살아남았지만 거대 기업 도요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 2년 8개월 걸리던 자동차 디자인 기간을 1년으로 단축하면 당연히 부작용이 나타난다. "물량 목표는 맞추었지만 제품의 품질과 직원들의 건강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2008년 경제 위기에 이어 2010년 수백만 대에 달하는 대규모 리콜 사태로 도요타의 판매 실적은 급감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수백 명이 정리해고를 당했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제일 먼저 타격을 입은 것은 인턴들과 한국인, 브라질인, 페루인 같은 외국인 노동자였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도요타 시의 일자리지원센터 중 한 곳인 '헬로워크Hello Work'로 향했다. 따뜻한 핑크색과 하얀색의 공간에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곳을 상상하면 된다. 구직자마다 칸막이로 막힌 작은 공간에서 컴퓨터 화면 속 구인 목록을 유심히 살펴본다. 하지만 도요타만 한 곳은 없다. 일부 직원들은 회사가 제공하는 숙소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정리해고를 당하면서 집까지 함께 잃었다. 노숙하고 무료급식소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그렇게 그들은 떠났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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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가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는 적은 인력으로 최대한 빠르게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버티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떠나거나 미쳐버리기나 병들거나 자살을 합니다. 부당하다고 할 수 있지만 어디든 마찬가지 아닐까요?" 경제 위기에 접어들자 일본 정부는 일본계 남미 노동자들에게 지원금을 주며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프레디는 페루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릴 참이다. "언젠가 경기가 다시 플리지 않을까요?" 

도쿄의 어느 기자가 전화해준 덕분에 도요타의 젊은 엔지니어와 만날 수 있었다. 그 엔지니어는 일부 직원들의 사라져 버린 숙소를 안내해주기로 되어 있다. 분수 근처에 있는 어느 광장에서 만날 약속을 집는다. 호리호리하고 훤칠한 키에 양복을 단정히 입은 스물다섯의 앤지니어가 우리와 악수를 한다. 그리고 걸음을 재촉하며 어느 중식당으로 들어가 구석진 자리에 앉는다. 도요타 본사의 글라스타워에서 근무하는 그는 서양인들과 같이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졸업하고 나서 도요타의 명성에 끌렸습니다. 이력서에 경력을 적을 때 도요타만 한 곳은 많지 않으니까요." 그는 몇 달간 도요타 연수를 받으면서 도요타의 규칙과 가치, 굳은 신념을 배웠다. "그야말로 세뇌 작업입니다."

그는 길고 낮은 회색 숙소에서 머문다. 캄캄한 밤이 되자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차를 몰며 경비원을 지나 외부 계단을 오르더니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연다. 위에는 작은 등이 달려 있다. 방 안에 들어오자 그가 한숨 돌린다. "도요타는 우리 직윈들에게 숙소를 마련해주고 교육을 시켜주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이 말이죠." 벽에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비좁은 방에는 침대, 어질러진 책상, 회사 도요타에 관한 바이블과도 같은 책 《도요타의 기적》, 《도요타 경영》, 《도요타 시스템》 등이 일렬로 꽂혀 있는 책꽂이, 미니 냉장고, 싱크대, 양복저고리가 있다. "도요타는 직원들에 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제공합니다. 회사는 사람보다는 기계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하루 월차를 내면 그는 곧바로 회사의 지배에서 벗어나 도쿄의 콘서트장과 레스토랑으로 피신해 마음껏 활기를 누린다. 매력 없는 도요타 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소소한 행복이다. 미래가 창창한 직원이지만 경제 성장기가 돌아오면 바로 사표를 낼 생각이다. 그렇다. 다른 많은 직원들도 달아났다. 가족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도 그렇게 듣기만 했을 뿐 더 이상 자세히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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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타에서 은퇴한 반항적인 성격의 와카츠키 다다오는 (이렇게 말했다.) "도요타는 일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도요타의 잘못된 경영철학을 고발하는 것이 제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압력은 많지 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장의 조립 라인이 내는 지옥 같은 소리에 미쳐버린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 과로로 죽어가는 사람들, 피로와 절망감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는 '도요티즘'이 일본은 물론, 프랑스에서도 노동자들을 죽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본사와 지사 모두, '좋은 직원은 사장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세뇌시켜놓고 필요 없으면 다 쓴 휴지처럼 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도요타를 본받으려는 사람들은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그는 당당히 할 말을 다 한다. 어느 직원이 도요 타 공장 앞에서 그가 나눠주는 전단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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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증발한 사람과 야쿠자 


도쿄에 산야가 있다면 오사카에는 가마가사키釜ヶ崎가 있다(사람들은 줄여서 '가마'라고 부른다.). 과거와 단절한 사람들, 망가질 대로 망가져 이름마저 없어진 사람들의 은신처. (...) 보기와 달리 가마는 판자촌도, 범죄의 소굴도, 빈민굴도 아니다. 다만 광장에는 임시 막사가 가득하고 기둥에는 텔레비전이 매달려 있고 야외 화덕이 놓여 있다. 철길 주변에 위치한 이 동네에는 작은 집들이 죽 늘어서 있다. 분명 다른 곳보다 가난해 보이는 집들이다. 그 아래에 있는 쓰레기들을 보니 위생관리는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것 같다. 더럽고 냄새가 나서 비참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의 무기력한 눈빛, 말라비틀어지고 축 쳐진 몸, 절망감이 전해져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낮이었지만 우리 앞을 방황하는 사람들은 처참하게 버림받아 외로움에 사무친 사람들이며 간혹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도 있다. 이들은 가장 밑바닥에 버려진 사람들이다. 용감하고 수단이 좋은 부랑자들은 공사장에서 열심히 일한다. 경제 위기지만 아직은 일이 있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면 이들이 잠이 덜 깬 눈으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작업 바지를 입은 채 낡은 커다란 창고 아래에 모여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새벽 다섯 시도 안 된 시간, 녹슨 덧문이 열리고 트럭들이 주차한다. 트럭의 앞 유리창에는 작업 종류와 일당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재빠른 구인자들은 구직자들의 이름을 불러 일용직 노동자 수백 명을 선발해 트럭으로 실어 나른다. 1970년대에는 일용직 노동자가 수천, 수만 명에 이르렀을 때도 있었다. 산야와 마찬가지로 더러움과 죽음으로 얼룩져 있지만 가마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일본 경제의 지표가 될 정도다. 

노예시장이었던 이곳 인력시장은 오줌과 술로 미끄러운 계단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계단에는 술병을 들고 고꾸라져 있는 사람이 몇 명 있다. 이들은 누더기 차림에 눈빛이 공허하다. 일용직 파견회사의 관리자가 책상에 꼿꼿이 앉아 자신의 회사가 오사카의 재건 공사, 공항 건설, 1970년 만국박람회, 고베 건설에 필요한 인력을 제공했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고베는 1995년 지진으로 크게 파괴된 적이 있다. 그리고 이후 석유 파동에 이어 버블이 터지고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나면서 일자리가 고갈되어버렸다. 현재 일을 구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가 되어 빈 캔과 슈퍼마켓의 유통기한 지난 식품을 모아 되팔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



공무원에 따르면 가마에 있는 증발자 수천 명 중 30퍼센트가 어느 날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가족에게 다시 연락한다고 한다.

준이 우리의 마주치는 사람들과 자발적으로 대화를 해보려 하지만 불편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나 의례적인 인사말로 끝난다. 



(...)



"아뇨, 난 안 갈 겁니다." 저녁에 국물요리를 내는 음식점에서 통역사 준이 지친 표정으로 일본의 유령 같은 얼굴들과 마주하는 것이 무척이나 괴롭다고 털어놓는다. 외국에서 생활해 일본과 떨어져 있었고 일부 문화에 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일본인들의 절망을 보니 미음이 아프고 우리가 찾아다니는 증발자들의 운명이 남의 일 같지 않아 불안하다고 한다. 가족도 없이 뿌리 뽑힌 것 같은 처지에 있는 준 역시 홀로 생을 마칠까 봐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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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후쿠시마의 연기


2011년 3월 11일, 우리는 세계와 함께 일본의 북서부 해안 쪽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의 장면을 보았다. 휴대폰으로 촬영된 동영상을 보니 어마어마한 해일이 무서운 기세로 도시를 휩쓴다.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리는 가운데 선박의 잔해, 자동차, 집, 항공 시설 등 모든 것들이 빨려 들었다.  그리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방사능이 유출된다. 몇 시간, 며칠, 몇 달 내내, 일본 정부는 통제 불가능한 엄청난 규모의 재해 앞에서 흔들린다. 시민들도 마치 천벌과도 같은 재난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한다.

구름, 비, 바람, 강과 바다는 유독한 방사능 물질을 어디까지 실어 나를까? 얼마나 많은 양의 방사능 물질이 쌀과 감자, 당근, 찻잎, 해조류, 물고기, 가축, 인간에게 스며들까? 외국의 과학자들은 후쿠시마, 미나미소마, 센다이, 도쿄까지 여러 도시의 공기와 물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었다고 즉각 알린다. 그러나 우리의 일본 친구들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일본 당국은 이미 국민 전체를 희생시키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침수된 원전을 가동했던 도쿄전력과 동요로 인한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는 정보 조작을 준비한다.



(...)



찌는 듯 무더운 저녁, 젊어 보이는 남자 세 명이 술집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 남자는 희망을 위해 건배한다. 한 남자가 이들에게 다가와 일자리를 제안했다. 적어도 두 달 동안 숙식이 제공되는 일이다. 쓸고 닦고 쓰레기를 자루에 담는 작업이다. 쓰레기의 정체는 원전 폐기물, 핵 먼지. 내일 이 세 명은 후쿠시마에서 원전 폐기물을 처리하는 일을 할 것이다. 어차피 가출한 사람들이라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누구도 찾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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