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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시][은유] 시를 시답게 만드는 『은유의 힘』

by 노지재배 2017.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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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하는 책은 장석주 시인의 『은유의 힘』이다. 출판사는 《다산책방》이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은유'에 관한 책이지만, 책 내용 전체가 은유에만 천착하지는 않는다. 월간 《시와 표현》에 연재했던 ‘권두시론’ 24편을 다듬어 묶은 책이기 때문이다. 


제목을 보고 '은유'에 관한 목마름으로 책을 집어 든 독자들은 일편 안타깝기도 하고, 일편 다행스럽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석주 은유의 힘




가장 다행스러운 점은 '은유'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우리가 흔히 보는 시 개설서나 수사학 개설서처럼 은유의 뼈와 힘줄과 핏줄을 극한으로 나눠 결국 은유의 아름다움을 더욱 모호하게 한다든지, 직유와 은유, 환유와 인유, 제유, 풍유 등 은유의 수정부터 시작해 세포 분열이나 일란성, 이란성쌍둥이라고 할 법할 수사법의 계보나 개설만을 읊다가 끝나는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불어 '은유'에만 치우치지 않고 장석주 시인이 생각하는 시와 시인에 대한 천착을 읽어나가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시를 가르치는 모든 교과서들은 한결같이 은유에 대해 말하는데, 그만큼 은유의 비중이 큰 까닭이다. 시는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에서 끝난다."고 책은 말한다. 


그래서 책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윌리엄 블레이크, 파블로 네루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틸라 요제프, 울라브 하우게 같은 외국 시인들과 김소월, 이상, 서정주, 윤동주, 백석, 김수영, 고은, 박제천, 정현종, 황인숙, 강정, 김언희, 오은 등 우리 시인들의 시를 골고루 담아 이들이 사용하는 은유의 깊이와 결을 살핀다. 그리고 각 시인들의 시와 그 시가 드러낸 사유의 깊이를 통해 시와 철학은 왜 만날 수밖에 없는지 역설한다. 

  

"좋은 시인들은 시대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철학자들이고, 거꾸로 훌륭한 철학자들은 영감의 노를 저어 의미와 분석의 길로 들어선 시인들"이라고 장석주는 말한다.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결국, 대상과 은유 사이에는 엄연하게 벌어진 틈이 생기는데 대상과 은유 사이가 벌어질수록 은유의 효과는 커진다. 바로 이러한 틈이 생긴다는 것은 항상적 불일치, 혹은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불러온다. 장석주 시인은 "은유를 만드는 자들은 은유를 전유하면서 이 틈의 이격(離隔) 효과를 손아귀에 넣는다. 이 틈이야말로 의미가 말없이 깃드는 장소"라고 강조한다. 바로 좋은 은유가 왜 새로운 깨달음이 되고, 독자에게 사물이나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만들어 주는지를 '낯설게 하기'라는 익숙한 문학용어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사라지고 시가 사라지는 시대에도 시인연하는 사람들은 더욱 넘쳐나고 있다. 도대체 사람과 노동을 소외시키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장석주 시인은 "시는 작기 때문에 시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라고 말한다. 


"시를 위대한 예술 장르라고 떠받드는 사람은 실망하겠지만 시는 큰일을 못 한다. 시는 잠과 고독을 지켜주지도 사랑하는 이의 병을 낫게 하지도, 죽은 아이에게 소생의 숨결을 불어넣지도, 통한의 아픔을 삼키는 이의 눈물을 씻어주지도, 배고픈 아이의 주린 배를 채워주지도 못한다. 시는 심심한 마음에 약간의 기쁨을 주거나 상처받은 마음에 미지근한 위로의 빛을 비춰주는 정도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시는 사람이 겪는 모든 고통과 난경(難境)들에 대해 아무런 해결책도 주지 않으며 그토록이나 무력하다. 그러니까 시는 개도 물어가지 않을 물건이다."


연약하고 작은 그릇에 불과한 시가 담을 수 있는 것은 장석주 시인의 말마따나 작은 위로에 불과한지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계속해서 말한다. 


"정말 좋은 시인은 "진실의 전부"가 아니라 사막의 전갈이나 거미의 먹이사냥같이 진실의 작고 구체적인 조각만을 갈망한다. 왜냐하면 "진실의 전부"는 너무나 커서 시의 그릇에 담는 게 불가능한 탓이다. 시는 진실의 작은 부분들, 세상을 뒤덮은 소음과 혼잡도 꺼트릴 수 없는 작은 촛불의 숨결, 악취 속에서 홀연한 노란 장미의 향기 한 점으로 충분하다. 시가 머금은 진실의 조각들은 아무리 작아도 그것이 세계를 향해 발신하는 신호는 미약하지 않다."


"당장 목마른 사람에게 바다를 줄 필요는 없다. 그에겐 차가운 물 한 잔이면 족하다. 어둠 속 길을 가는 이에게는 태양이 아니라 단지 한 줄기 빛이 필요한 것이다. 빛으로 차고 넘치는 하늘 전부는 필요 없다. 진실은 빛 한 조각, 이슬 한 모금, 티끌 하나같이 아주 작은 조각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목욕 마친 새에 매달린 물방울"이나 "바람에 묻어가는 소금 한 알"은 작지만 진실의 표상으로 얼마나 눈부시고 그 존재감이 강력한가!"


정말 작은 그릇. 티끌 같이 아주 작은 조각, 이슬 한 모금에 불과한 시.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작아도 진실의 작은 부분을 담고 있기에 세계를 향해 발신하는 시의 신호는 미약하지 않다.



화살이 과녁을 맞추려면

이리저리 둘러갈 순 없다. 하지만 좋은 궁수는

거리와 바람을 수락한다.

그러니 네가 과녁일 때 나는 조금 위를 겨눈다.


-울라브 하우게, 「조금 위를 겨눈다」 전문






책 속의 말처럼 뛰어난 궁수는 과녁을 맞추기 위해 과녁보다 조금 위를 겨누거나 조금 옆을 겨누는 오조준을 한다. 과녁을 조준할 때 "거리와 바람이라는 변수"를 계산에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과녁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서는 과녁보다 조금 위나 옆을 겨누어야만 한다. 이처럼 거리와 바람, 그리고 과녁까지 도달하기 위한 화살의 궤적과 활을 당기는 힘을 조절하는 노련한 궁수의 머릿속이 바로 시인이 시를 담는 머리와 같다고 장석주 시인은 말한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시인이라는 궁수가 과녁을 맞추기 위해 하는 고도의 오조준을, 우리는 거꾸로 시를 읽을 때 하게 된다. 'A는 A', '1+1=2'라는 명징한 과학의 세계를 벗어나면서도 과학에 버금가는 투명한 '진실'을 길어 올리는 것이 곧 우리가 시를 읽는 행위다.


끝으로 책은 말한다.

 

"시는 의미화에의 의지가 아니라 존재에의 의지에 의해 더 강한 탄력을 얻는다. 의미 과잉의 태도는 종종 시를 망친다. 좋은 시인들은 제 시에서 의미의 영역을 덜어내고 그것을 한사코 줄이려고 한다. 시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태도와 시선의 영역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 과잉의 태도는 종종 시를 망친다. 좋은 시인들은 제 시에서 의미의 영역을 덜어내고 그것을 한사코 줄이려고 한다."는 말은 곧 과녁이라는 대상에 닿기 위해 과녁을 곧바로 겨누지 않는 오조준과 같은 의미다. 이처럼 '진실'에 닿기 위해 대상과의 거리, 그 사이의 바람, 나의 힘과 능력을 전체적으로 가늠해보는 사유의 과정 속에서 독자는 결국 시를 쓴 시인의 태도와 시선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


장석주 시인의 시에 빠져들었던 사람이라면 장석주 시인의 시와 은유에 대한 사유를 닮은 이 책에도 만족감을 느끼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시와 은유를 해부하고 난도질하는 개설서나, 문학참고서, 그저 그런 시에 대한 감상을 수집한 듯한 가벼운 책에 지친 독자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 저자


장석주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와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스무살에 시인으로 등단해 서른 해쯤 시인, 소설가, 문학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출판기획자, 방송진행자, 대학교수, 북 칼럼니스트로도 활약했다. 그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읽는 속도가 빠르지 않은데 읽은 책 목록이 긴 것은 책 읽는 일에 꾸준하고 부지런한 까닭이고, 아울러 앎과 슬기를 향한 욕심이 큰 까닭이라고 한다. 서른 해를 쉬지 않고 읽고 쓰며 걸어온 사람이다. 노자·장자·주역과 작은 것들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담긴 책들을 즐겨 찾아 읽고, 제주도·대숲·바람·여름·도서관·자전거·고전음악·하이쿠·참선·홍차를 좋아하며, 가끔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점을 친다고 한다. 2000년 여름, 서울 살림을 접고 경기도 안성의 한 호숫가에 ‘수졸재’라는 집을 지어 살면서, 늘 머리맡에 『노자』와 『장자』를 두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2013년 영랑시문학상, 2010년 질마재문학상, 2003년 애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졸재’와 서울 서교동 작업실을 오가며 읽고, 쓰고, 사유하는 삶을 꾸려가고 있다. 시집 『오랫동안』과 산문집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와 『고독의 권유』등이 있다. 




■ 목차


서문_은유의 빛을 따라가라!


그림자들의 노래

은유의 깊이, 은유의 광휘

시인, 다양성의 중재자

우주가 열리는 파동!

거울의 시, 거울의 제국

‘소녀’라는 문화적 코드

최후의 인간들이 부르는 노래들

말은 감각들의 통역관

물의 노래

‘이름들’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

“처남들과 처제들”의 슬하에서

동물의 시간, 인간의 시간

예언자 없는 시대의 시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은유들의 보석상자

지금 누군가 울고 있다

목소리들은 먼 곳에서 온다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여봐

시가 “망치질”이 되는 방식

시의 육체, 육체의 시

시는 어디서 오는가?

검정의 노래

시인은 견자(見者)다

얼굴-가면의 시


수록 작품

참고문헌




■ 책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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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들의 노래


시는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꺼내는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몸! "시는 몸에서 바로 꺼내야 해요. 시를 쓸 때 생각에 의지하면 항상 늦어요.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가도록 하세요. 머리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빨리 쓰세요. 시에서 리듬이 강해지면 의미가 희박해져요. 그건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갔다는 증거예요." 진정한 시는 머리보다 몸에서 먼저 나온다. 몸은 세계와 자아의 매개물, 자아가 세계와 만나는 최전선, 존재의 물리적 기반이다. 시람은 몸으로 태어나서 몸으로 살다가 죽는 존재인 것이다. 몸은 먹어야만 살 수 있다. 먹는 것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생태적인 행위"**다. 몸은 먹는-기계다. 몸, 밥 먹고 숨 쉬는 것, 혹은 우리 경험치가 쌓여있는 장소, 아울러 "영혼은 몸의 형태이고, 고로 몸 그 자제(확장된 프시케))이다. 그러나 정신은 몸이 스스로를 투신하는 구멍의 비-형태 또는 형 너머이나 몸은 영혼 안에서 도래하고, 정신 속에서 스스로를 제거한다."*** "많은 시인들이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시를 쓴다. 시는 무의식의 노래 '주술' 방언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몸이라는 절벽에서 나오는 말들. 모호함에 형태를 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에 이미지를 주는 것. 시의 전망이란 머리가 개입하기 이전에 몸을 뚫고 나오는 광적인 주의력이고 직관이며, 몸속에서 소용돌이치다가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욕망이나 공포 따위다. 그러므로 머리로 쓴 시가 아니라 오직 몸으로 쓴 시만 신뢰하라!


(...)


발이 마르는 동안

당신의 뒤통수는 책

발이 마르는 동안

우리가 나누는 말은 바람

발이 마르는 동안

우리는 두 그루

발이 마르는 동안

어둠이 톡!

발이 마르는 동안

당신의 등은 무지개

발이 마르는 동안

우리가 나눈 말은 햇빛

발이 마르는 동안

우리는 두 마리

발이 마르는 동안

우리는 안녕


-신영배, 「누워 있는 네 개의 발」 전문



이 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시가 무의식의 말이라는 것은 시의 해독할 수 없음에서 잘 나타난다. 어느 곳엔가 '나'와 '당신'이 있다. 어쩐 일인지 두 사람의 발은 젖어 있다. 빗속을 걸어왔는지 강을 건너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발이 젖어 있고, 그래서 "발이 마르는 동안"을 함께한다. '나'는 당신의 뒤통수를 보고, 등을 바라본다. 그럴 때 "당신의 뒤통수는 책"이고, "당신의 등은 무지개다. 두 사람의 정체성은 "두 그루"였다가 "두 마리"로, 즉 식물성에서 동물성으로 이동한다. 두 사람이 "발이 마르는 동안" 나눈 말은 바람이고, 햇빛이다. 그뿐이다. 이 시는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것은 꿈속에서 부르는 사랑의 노래인가? "누워 있는 네 개의 발" 이미지는 모호함에 감싸여 있고, 그 선언은 불확실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호한 그대로의 이미지이지 의미의 맥락이 아니다. 


(...)


"머리는 의식적이고 사회학적이지만 손은 욕망과 무의식에 가까워요. 시는 머리를 뚫고 나오는 손가락 같은 거예요. 걸으면 벌어지고 멈추면 닫히는 치파오라는 중국 치마 같은 거지요."**** 머리로 쓰는 시는 가공된 기억들을 갖다 쓰고, 그 언어적 현실태는 외침, 주장, 선동이다. 반면 몸의 시는 욕망과 무의식의 시다. 무의식의 시는 무의식의 기억을 뚫고 나오는 손가락의 시다.


(...)


시는 은유들의 보석상자다. 자, 무의식에서 뻗쳐 나온 손가락이 쓴 시 한 편을 더 읽어보자.



바닥은 벽은 죽음의 뒷모습일 텐데 그림자들은 등이 얼마나 아플까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무용수들이 허공으로 껑충껑충 뛰어오를 때 홀로 남겨지는 고독으로 오그라드는 그림자들의 힘줄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한 시내가 또는 한 아이가 난간에서 몸을 던질 때 미처 뛰어오르지 못한 그림자의 심정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몸은 허공 너머로 사라졌는데 아직 지상에 남은 그림자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이완 「그림자들」 전문



그림자들이란 무엇인가? 그림자들은 리듬을 타고 나아가는 말의 물결이다. 시인은 몸과 분리된 채 따로 노는 "그림자들의 힘줄", "그림자의 심정"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림자들은 실체의 허상, 피와 땀으로 얼룩진 현실의 덧없음이 빚어낸 환상이다. 그것은 실상에서 뻗어 나왔으되 실상은 아닌 이상야릇한 부캐이자 잉여다. 실상과 그림자의 관계는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시킨다. 장자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신의 꿈을 꾸는지 분별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 무분별의 세계에서 실상과 환상에는 경계가 없다. 시인은 그 허상이나 환상에게 피와 숨결을 주고, 힘줄과 심정을 덧붙여준다. 무용수들이 허공으로 도약할 때, 사내나 아이가 난간에서 몸을 던질 때, 몸은 허공 너머로 사라지지만 그림자는 그러지를 못한다. 그림자는 실상과 분리되어 "홀로 남겨지는 고독으로 오그라드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실체의 삶을 살려고 하나 많은 경우 그림자의 삶을 살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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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복, 『무한화서』, 문학과지성사, 2015, 18쪽.

** 미셀 퓌에슈, 『나는, 오늘도5: 먹다』, 심영아 옮김, 이봄, 2013, 97쪽.

*** 장 뢱 낭시, 『코르푸스一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김예령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76쪽.

**** 이성복, 『무한화서』, 문학과지성사, 201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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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깊이, 은유의 광휘


시를 가르치는 모든 교과서들은 한결같이 은유에 대해 말하는데, 그만큼 은유의 비중이 큰 까닭이다. 시는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에서 끝난다.


(...)


"세상의 모든 펄럭이는 것들은 사실은 혀일지도 모른다"나 "사루비아가 붉은 혀를 내밀어/무수히 지나는 발자국에 대해 지껄이기 시작했다"(임승유, 「수화(手話)」), "아직도 나는 밤의 설교자들이 끌고 다니는 낙타의 바닥이다"(홍일표「구두」), "당신은 태양의 흑점/겨울은 폭약을 달고 날아가는 새"(함기식「오렌지 행성」), "계단을 펼쳤다 접으며 아코디언을 켜고/계단은 사람들의 귓속으로 밀려들어왔다가 밀려나가고"(강성은,「아름다운 계단」),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오, 저렇게도 순하고 둥그런 감옥이여."(김기택,「소」), "저 연못은/눈까풀이 없는 눈동자”(채호기, 「연못1」), "땅의 푸른 뿔인 풀잎들"(최승호,「가죽 뒤로 펼쳐지는 것」) 따위가 다 멋진 은유다. 은유는 시에서 가장 흔한 수사법 중의 하나고 따라서 시는 은유들의 보석상자라 할 만하다."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대상을 삼켜서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은유는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이고, 신체의 현전이 아니라 언어의 현전이다. 그것은 차라리 텅 빈 신체다. 이것은 항상 없는 것, 이질적인 것, 낯선 것을 새 현전으로 뒤집어쓰고 새로 태어남이다. 살로 채워진 것으로서의 신체와 텅 빈 신체의 관계가 그렇듯, 대상과 은유 사이에는 엄연하게 벌어진 틈이 있다. 대상과 은유 사이가 벌어질수록 은유의 효과는 커진다. 틈이 생긴다는 것은 항상적 불일치, 혹은 낯설게 함을 전제로 삼는다. 은유를 만드는 자들은 은유를 전유하면서 이 틈의 이격(離隔) 효과를 손아귀에 넣는다. 이 틈이야말로 의미가 말없이 깃드는 장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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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이자 철학자인 김재인은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느티나무책방, 2016)에서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가 공저한 『천 개의 고원』을 가리켜 "개념들의 보석상자"라고 말한다. "은유들의 보석상자"라는 표현은 그것을 차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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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열리는 파동!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은 「순간의 꽃」



삶은 발견 속에서 경이로 바뀐다. 차라리 그 발견의 순간이 꽃이다, 내려갈 때 보았던 꽃은 실은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바로 그 꽃이다. 이 엇갈림의 순간에 꽃이 있는데, 한 번은 못 보고 다른 한 번은 본다. 꽃을 본 것은 홀연한 각성의 찰나였을 테다. 꽃의 개화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꽃의 개화는 우주 만물이 기운을 다하여 역의 변화를 보여줄 때 나타난다. 꽃이 피어 있다고 누구나 다 유심히 보지는 않는다. 꽃은 사건들의 흐름과 연쇄 속에 있는 것이어서 기어코 그것을 만날 처지에 있는 사람만 본다. 이 우주의 개화에 맞취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꽃을 보고도 무심히 지나친다. 꽃에 마음이 가야만 꽃을 보지 마음이 딴 데 가 있다면 꽃을 못 보는 것이다. 꽃을 본다는 것은 꽃이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모아 모아 피어나는 순간과 마찬가지로 놀라운 찰나의 마주침이다. 이때 꽃은 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궁극의 무엇이다. 꽃은 숭고하고 영원한 찰나의 것, 즉 시와 예(禮), 명예와 존엄의 표상이다. 꽃이 거기 있다는 건 꽃이 그 장소의 중심임을 함축한다. 장소의 확보는 실존의 존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장소를 갖지 못한 자들은 거점 공간을 갖지 못한 채 변두리를 떠돈다. 장소는 집, 거점, 실존의 근거다. 노숙자들과 난민들과 철거민들은 그것을 갖지 못한 처지이기에 환대받을 권리도 환대할 권리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실존에의 의지는 장소들을 갖기 위한 뜨거운 투쟁으로 번진다.


『순간의 꽃』에 수록된 고은의 이 시는 순수한 환대의 시다. 주인[시선의 주체]과 손님[꽃]이 대립을 넘어서서 서로를 기쁨으로 맞고 받아들이는 환대 말이다. 환대는 두 존재의 마주침이면서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 동시에 손님을 맞기 위해 나를 개방하고, 관용의 문턱을 넘어서서 다가가는 것을 뜻한다. 환대는 나를 손님에게 조건 없이 증여하는 일이다. '꽃'을 환대하는 일은 곧 '사람'을 환대하는 일이다. "환대란 타자를 도덕적 공동체로 초대하는 행위이다. 환대에 의하여 타자는 비로소 도덕적인 것 안으로 들어오며, 도덕적인 언어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꽃으로 손님을 맞고 환대하는 일은 정치적 올바름의 시작점이자 윤리의 바탕이다. 그 환대의 첫 번째 조건은 거기 꽃이 있다는 걸 봐야 한다는 점이다. 보지 못한 것을 환대할 수는 없다. 너, 거기 피어 있구나! 그 발견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손님의 거기 있음을 받아들이고 손님의 자리/장소를 인정해야 한다. 이 세계가 환대가 일어나는 사회적 공간으로 바뀔 때 평범한 삶들도 빛나는 가치의 삶으로 변할 수 있다.


(...)


시인은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윌리엄 블레이크,「순수의 전조」)고 했다. 시인들은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특이한 시력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시인들은 안 보이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보고도 놓친 것을 용케도 찾아낸다.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


소실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산 넘어 바다는

보름사리 때


소금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서정주, 「영산홍」 전문



(...)


그 누구도 섭생과 안녕을 챙기지 않는 이의 낮잠은 쓸쓸하리라. 무위에 빠진 자가 할 수 있는 건 기약 없는 긴 기다림, 그리고 무료함에 지쳐 빠져드는 낮잠일 것이다. 낮잠은 소실댁의 소외된 처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툇마루에/놓인 놋요강"은 소외의 맥락에서 소실댁의 처지를 암시하는 도구적 상징이다. 누가 놋요강을 끼고 살겠는가? 놋요강은 필요가 생길 때 반짝 관심의 대상이 되겠지만 그 밖의 경우 한쪽에 방치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영산홍 핀 봄날의 "낮잠"에 이어 "놋요강"은 다시 한 번 소실댁의 처지를 또렷하게 비춘다. 마지막 연의 "소금 발이 쓰려서/우는 갈매기"는 절묘하게 이 소외된 것들이 김당하는 삶의 쓰라림을 형상화한다. 나는 소금발이 얼마나 쓰라린지 알지 못하지만, 그럼 에도 이 구절은 독자에게 날카로운 감각적 통증을 전달한다.


'꽃'은 실재가 아니라 그것을 가리키는 기호다. 무에서 솟아나 홀연히 빛나는 꽃이라는 언어! "언어의 한복판에서는 병영(兵營) 없는 내전이 벌어진다.*** 시인들은 총칼 없이 내전을 치르면서 이 움트고 피어나는 기호에서 열반을 보고, 텅 빈 충만을 읽어낸다. 아무리 넘겨짚어도 꽃이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피어나는 것은 아닐 테다. 꽃의 피어남은 저의 스스로 그러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은 타고난바 본성적인 것, 그 내밀함의 발현이다. 꽃들은 피어나서 고갈과 소진을 무찌르고 세상에 널린 환멸과 권태를 지우며 신생의 기쁨으로 채운다, 그러나 세상에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어도 그걸 봐주는 '눈'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어여쁜 것! 여기 피어 있네! 꽃도 예쁘게 봐주는 눈이 있어야 비로소 예쁘다. 예쁘게 봐주는 것, 그게 환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꽃인 듯 환대하고 기쁜 마음으로 예쁘게 봐줘야 예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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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242쪽.

** 뤽 브노아, 『기회·상징·신화』, 박지구 옮김, 경 북대학교출판부, 2006, 68~69쪽.

***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김은중, 김홍근 옮김, 솔, 1998,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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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인간들이 부르는 노래들


한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부분



시인은 견자(見者)다. '본다'는 것은 지각의 시작점이나, 사물과 세계를 본다는 것은 앎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이해하면서 관조하는 행위이다. '본다'는 것은 지각의 단초가 되는 행동이다. 사물이 지각되는 바대로 존재한다면, 시인은 그 지각의 특이성과 확장성으로 주목받는다. 시인이 드러내는 지가의 특이성은 항시 다르게 보기, 낯설게 보기의 결과로 나타난다. 시인은 "새 보는 곡예사(曲藝師)"(정현종, 「세상 초록빛을 다해」)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본다. 비를 "움직이는 비애"(김수영, 「비」)로, 수박을 "물의 보석상자, 과일가게의 냉정한 여왕, 심오함의 창고, 땅 위의 달!"(파블로 네루다, 「수박을 기리는 노래」)로 보는 게 시인이다. 시인은 모래알 따위의 가장 작은 것을 우주적 크기로, 가장 짧은 시간을 우주적 시간으로 바꾼다. 보라, 한

시인에 따르면, 한 알의 모래는 하나의 '세계'이고, 한  송이 들꽃은 하나의 '천국'이다. 또한 한 점은 '무한'이고 찰나는 '영원'을 품는다.

바로 그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아채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시인은 본다.


시인은 한 사람의 생애를 살되 한 사람으로 살지 않는다. 한 시인은 여러 사람으로 여러 겹의 생을 살아낸다.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기 안의 자기와 대면한다. 보통은 자기 안의 자기는 한 사람이지만 시인의 경우 그 '자기'가 여럿이다. 삶이라는 수수께끼 앞에서 시인들은 여러 사람으로 그것에 대처한다. (...) 시인이 최후의 인간인 것은 오래 살기 때문이 아니다. 시인은 단명한다. 시인들은 단명의 운명을 태어나고 그 운명을 낭비하지만 그럼에도 시인들은 오래 살아남는다. 시인은 혼자가 아니라 여럿으로 살기 때문이다.


(...)


시는 씌어지면서 지워진다. 이것이 시가 품은 비밀스러운 내면성의 원리이다. 정작 시에서 씌어진 것들, 언표된 표면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겨우 문자나 깨친 무지몽매한 이류 비평가들은 씌어진 표면에서만 시를 읽는다. 시들의 표면은 심층을 갖지 않는 한에서 명료하고 무의식의 외침 같은 다양한 선을 머금은 심층을 갖는 한에서 모호해진다. 시력이 나쁜 비평가들은 그 난해와 모호함이 만드는 강렬함을 견디지 못한다. 눈은 흐릿하고 의식은 물렁물렁하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은 자주 시들 읽는다고 하면서 시를 고갈시킨다. 비평가들은 시를 읽으면서 의미의 고갈, 행복의 고갈에 이를 뿐만 아니라 더 자주 과잉의 의미부여로 시들을 질식에 빠뜨린다.


(...)


좋은 시는 젊다. 그것은 감각의 쇄신을 이루고, 세계의 쇄신을 의미의 샅[肉]로 드러낸다. 시들은 저를 둘러싼 모르는 세계라는 외부성에 의해서만 성립되고 의미를 품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그 세계와 부딪칠 때 동심원을 그리며 펼쳐진다. 그런 까닭에 좋은 시를 읽는 것은 세계의 확장이자 의미 영역의 확장이다. 시인들은 끊임

없이 묻는다. 그들은 우리를 대신하여 장미가 무엇이고, 먼지가 무엇이고, 비가 무엇이고, 애탄 근심이 무엇이고, 시간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제 우리 차례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아직도 시가 가능한가를 물어야 한다. "서로 다른 사랑을 하고/서로 다른 가을을 보내고/서로 다른 아프리카를 생각했다/우리는 여러 세계에서//드디어 외로운 노후를 맞고/드디어 이유 없이 가난해지고/드디어 사소한 운명을 수긍했다"(이장욱,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사소한 운명을 노래하는 시, 외롭고 달콤한 사랑을 노래하는 시, 서로 다른 황혼이 되어 다른 계절을 맞는 시가 아직도 가능한가?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모여들고 각자 다른 계절에서 돌아오지만 시인들은 여전히 상상력의 천재로 군림하고, 이들의 상상력은 창의성의 원천이지만 시인들이 최후를 향하여 다가가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여러 곳에서 시가 사멸하고, 시인이 사라지는 징후들을 감지한다. 시는 이미 수없이 많은 곳에서 살해되고, 매장되었으며, 더러는 화석이 되었다. 시는 교과서, 수험참고서, 수험생의 필답고사 시험지, 고서박물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시인은 멸종될 위기의 생물종으로 대접받는다. 시인이 멸종되면 시는 사라진다. 지금 읽는 시들은 불

가능성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멸종 위기에 직면한 시인이라는 종족이 제출하는 최후의 서정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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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감각들의 통역관


시인들은 말을 모으는 자들이 아니다. 시는 말을 채집하고 그것을 쌓아두는 일이 아니라 말을 비워서 의미의 부재에 이르게 한다. 말의 바닥에 닿으려고 말을 지우고 빈자리를 만든다. 말의 빈자리에 시가 들어선다. 말의 제의(祭儀)로서의 시, 그 제의를 주재하는 집정관으로서의 시인. 좋은 시들은 가장 나쁜 세상에서 우리를 살아남음으로 이끈다. 환멸과 지리멸렬 속에서도 자진(自盡)하지 않고, 기어코 살도록 돕는다. 시인들이 항상 세계의 의미화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더 자주 세계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볼링에 행운이 뒤따랐는가?/담배는 승리만큼이나 중독적 이었는가?/파업 은 마침내 성공했는가?"(오은, 「럭키 스트라이크」)라는 질문들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가? 볼링, 흡연, 파업이 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가벼운 질문들은 아무 의미도 머금지 못한 채 지리멸렬하다. 질문이 지리멸렬한 것은 이 세계가 지리멸렬하기 때문이다. 이제 남겨진 것은/쥐 뜯어먹은 것 같은 세상."(오은, 「래트맨(Ratman)」) '쥐들'은 어디에서나 갉아먹고 뜯어먹는다. 우리는 '쥐들'인가, 아닌가? 이 탐욕스러운 무리에게 이 세계는 "창문을 열기 위해 창문을 닫은 사람/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창문을 여는 사람/소문이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창문을 닫아버리는 사람"(오은, 「인과율」)들의 집합체다. 차라리 이 무의미한 질문들은 무의미로써 세계의 무의미에 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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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없는 시대의 시


시인은 욕망하는 자고, 시는 욕망 그 자체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이렇게 말한다. "시가 다스리는 영토는 '제발 했으면...'이다. 시인은 '욕망하는 자'이다. 결과적으로 시는 욕망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가능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며, 사실인 듯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지는 '그럴듯한 불가능이 아니다. 즉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욕망이 아니다. 시는 실재에 대한 배고픔이다."* 왜 아니겠는가? 시인은 세계의 가난을 산다. 그들은 항상 열등한 형제, 패배한 자들, 굶주린 자들의 벗이다. 이렇듯 곤경에 빠진 자들을 벗 삼음으로써 시인들은 세계의 가난을 산다. 이들은 열등하고 패배하며 곤경에 빠진 자들을 대신해 욕망하고, 그런 까닭에 존재의 한가운데는 항상 결핍으로 움푹 파여 있다. 


(...)


옥타 비오파스는 쓴다. "이미지의 의미는 이미지 자체이지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미지의 의미는 그 자체로만 설명된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이미지가 말하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의미와 이미지는 동일하다"** 시에서 이미지는 유사성의 원리에 따라 상반되는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고 조형해내는 기술로 나타난다. 이미지는 다른 의미를 표상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고 의미다. 의미를 머금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미지는 언어와 차별성을 드러낸다. 이미지는 현실을 의미하지 않고 현실을 보여준다.


1930년대의 김광균은 이미지를 빚어내는 데 유독 뛰어난 시인인데 그의 시는 이미지의 다채로운 활용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펼친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김기립은 김광균을 가리켜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시인이라고 평했다.***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다"라는「외인촌」의 한 구절을 보자. "소녀들의 웃음"은 청각적인 성분을 품은 이미지인데, 시인은 이것을 "시들은 꽃다발"과 같이 아무 소리도 없는, 오직 시각적인 성분만을 품은 이미지와 병치한다. 이 병치된 두 이미지는 "흩어지다"라는 통사에서 교묘하게 교차한다.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만든 청각적 여운이 맞물리는 가운데 어느덧 시들은 꽃다발이라는 소리가 소거된 시각적인 이미지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기교는 시의 말미에서 다시 한 번 발휘된다. "퇴색한 성교당의 언덕 위에선/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는 구절에서 "종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에서 소리를 지우고 "분수"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변용되는 것이다. 분수는 물을 뿜어 공중으로 흩뿌리는데, 공중에서 흩어지는 물방울은 그 무게를 잃고 가볍게 상승하는 이미지다. 공중에 울려 퍼지는 성당의 종소리와 공중에서 흩뿌려지는 분수의 물방울들이 이미지가 중첩되는 것이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을 하나로 중첩해내는 시인의 솜씨는 놀랍다.

다시 옥타비오 파스는 덧붙인다. 이미지는 욕망이 인간과 실재 사이에 걸쳐놓은 다리이다. '제발 ......했으면'의 세계는 유사함의 비교에 의한 이미지의 세계이며 그것의 기본적인 매개체는 '같은'이라는 단어-이것과 저것은 같다-이다. 그러나 '같은'을 지워버리고 말하는 다른 은유-이것은 저것이다-가 있다."**** 라고 이미지

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욕망'과 '실재' 사이에서 부재를 품고 자라난다. 이것으로도 저것으로도 환원하지 않는 이미지는 실재의 텅 빈 구멍 속에서 부재를 파먹으며 몸피를 키우고 증식한다. 실재 없는 실재, 죽음 뒤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끝 뒤에 새로 오는 끝들, 향락 뒤의 향락, 이미지는 부재하는 것들의 춤, 향락의 잉여다. 시의 세계에서 직유는 늘 눈총을 받는 친덕꾸러기다. 직유는 아무리 좋더라도 은유의 나쁜 친척이다. 오직 나쁜 시인들만 직유를 남발한다. 좋은 시인들은 '이것과 저것은 같다'라고 쓰지 않고, '이것은 저것이다'라고 쓴다. 좋은 시집은 빼어난 이미지들의 '집'이다! 좋은 시집들은 대개 좋은 이미지의 백과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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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김은중, 김홍근 옮김, 솔, 1998, 83쪽.

**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김은중, 김홍근 옮김, 솔, 1998, 144쪽.

*** 이어령, 『언어로 세운 집』, 아르테, 2015, 344쪽에서 재인용.

****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김은중, 김홍근 옮김, 솔, 1998,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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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시는 작은 그릇이다. 작기 때문에 시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시를 위대한 예술 장르라고 떠받드는 사람은 실망하겠지만 시는 큰일을 못 한다. 시는 잠과 고독을 지켜주지도 사랑하는 이의 병을 낫게 하지도, 죽은 아이에게 소생의 숨결을 불어넣지도, 통한의 아픔을 삼키는 이의 눈물을 씻어주지도, 배고픈 아이의 주린 배를 채워주지도 못한다. 시는 심심한 마음에 약간의 기쁨을 주거나 상처받은 마음에 미지근한 위로의 빛을 비춰주는 정도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시는 사람이 겪는 모든 고통과 난경(難境)들에 대해 아무런 해결책도 주지 않으며 그토록이나 무력하다. 그러니까 시는 개도 물어가지 않을 물건이다.


시는 햇빛을 튕기는 영롱한 아침 이슬이거나 폭설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벚꽃의 낙화-"꽃가루의 눈썹이 열린"(파블로 네루다) 봄날 외딴 길에 저 혼자 청초한 제비꽃 한 송이이거나 새벽 연못 위에서 홀연 우아한 자태로 솟은 수련꽃, 저녁 강물 위에서 타오르는 석양빛이거나 숫눈 내려 하얗고 고즈넉한 길, 이 모든 때와 장소를 스쳐가는 아름다움에 반향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화창(和唱)이거나 세계의 여리고 착한 것들을 경멸하고 학대하는 온갖 종류의 악들과 빛을 누르는 악의(惡意)를 향한 노호(怒號)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는 꽃의 피고 짐. 열매의 맷고 떨어짐. 세계의 모든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발효와 정액의 일들, 그리고 비밀의 분출이 일으킨 기적들에 기대어 도취와 신명의 파장을 만들어낸다. 시는 그 모든 일들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니 마음을 보살피는 일쯤은 되겠다.


정말 좋은 시인은 "진실의 전부"가 아니라 사막의 전갈이나 거미의 먹이사냥같이 진실의 작고 구체적인 조각만을 갈망한다. 왜냐하면 "진실의 전부"는 너무나 커서 시의 그릇에 담는 게 불가능한 탓이다. 시는 진실의 작은 부분들, 세상을 뒤덮은 소음과 혼잡도 꺼트릴 수 없는 작은 촛불의 숨결, 악취 속에서 홀연한 노란 장미의 향기 한 점으로 충분하다. 시가 머금은 진실의 조각들은 아무리 작아도 그것이 세계를 향해 발신하는 신호는 미약하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라고 노래할 수 있다. 당장 목마른 사람에게 바다를 줄 필요는 없다. 그에겐 차가운 물 한 잔이면 족하다. 어둠 속 길을 가는 이에게는 태양이 아니라 단지 한 줄기 빛이 필요한 것이다. 빛으로 차고 넘치는 하늘 전부는 필요 없다. 진실은 빛 한 조각, 이슬 한 모금, 티끌 하나같이 아주 작은 조각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목욕 마친 새에 매달린 물방울"이나 "바람에 묻어가는 소금 한 알"은 작지만 진실의 표상으로 얼마나 눈부시고 그 존재감이 강력한가!



내게 진실의 진부를 주지 마세요.

나의 갈증에 바다를 주지 마세요.

빛을 청할 때 하늘을 주지 마세요.

다만 빛 한 조각, 이슬 한 모금, 티끌 하나를,

목욕 마친 새에 매달린 물방울같이.

바람에 묻어가는 소금 한 알같이.


-울라브 하우게,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전문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데는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는 찰나를 목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시는 그토록 작은 진실만을 머금기 때문이다.


(...)


화살이 과녁을 맞추려면

이리저리 둘러갈 순 없다. 하지만 좋은 궁수는

거리와 바람을 수락한다.

그러니 네가 과녁일 때 나는 조금 위를 겨눈다.


-울라브 하우게, 「조금 위를 겨눈다」 전문



뛰어난 궁수는 과녁을 맞추기 위해 오조준을 한다. 과녁을 조준할 때 "거리와 바람이라는 변수"를 계산에 넣는다. 과녁보다 조금 위를 겨누어야만 과녁의 중심에 꽂히는 것이다. 하우게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좋은 시인들은 과학에 버금가는 투명한 진실을 담고자 한다. 하우게의 시구들은 곧추세운 창날의 끝인 듯 날카롭게 벼려져서 어느 한 군데 거짓이 깃들 여지가 없다. 하우게는 "거기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고 한다. 언덕 꼭대기에서 외치는 말들은 너무 옳다. 그 말들이 너무 옳다면 이미 그 말들은 화석화한 도덕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높은 곳에 서서 옳은 말들을 외치는 대신 "언덕으로 들어가,/거기 대장간을 지어라,/거기 풀무를 만들고,/거기 쇠를 달구고,/망치질하고 노래하라!"(「언덕 꼭대기에서 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라고 권면한다. 말들은 자의적 성질이 강

해서 쉽게 변질되는 탓에 항상적 진실을 담보하지 못한다. 그래서 옳은 말[큰 진실]보다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노래하는 것[작은 진실]들의 울림이 더 큰 경우가 자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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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누군가 울고 있다


우리 시대의 대다수는 생산과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사물을 수량화하고, 돈이나 교환의 잣대로만 그 가치를 따진다. 천박한 실용주의에 매몰되어 부와 특권들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작 삶의 숭고한 미덕들을 놓친다. 누스바움은『시적 정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식 가능한 세계의 질적인 풍성함,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그들의 내면적 깊이, 그리고 희망, 사랑, 두려움 따위는 보지 못한다. 또한 인간으로서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등을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신비하고도 지극히 복잡한 어떤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복잡함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언어들과 사유의 능력을 통해 접근해야만 한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오직 돈과 물질의 위력만이 안녕과 행복을 지켜준다고 믿는 이들은 어디에서나 살아 있고 잘 지낸다. 그들은 모험을 두려워하고 안전 자산만을 선호한다. 자신의 삶이 반쯤 죽은 채 흘러가고 있음을 까마득히 모른다. 돈이 모든 가치에 우선 한다는 생각에 갇히면, 침묵과 관용의 가치, 키스와 포옹의 기쁨과 보람들, 사월의 비, 봄마다 돋는 작약의 움들, 공중에 흩뿌려지는 종달새의 명랑한 노래, 산소와 피톤치드와 향기로 가득 찬 울울창창한 숲, 개별성의 존귀함을 지닌 인간의 숭고함, 연인들이 나누는 교감의 신비와 복잡성 따위를 다 놓친다.

그들은 "혼자만의, 혹은 부산한 거리에서의, 들판이나 언덕배기에서의 즐거움,/건강의 느낌...... 한낮의 떨림...... 침대에서 일어나 태양을 만날 때"**의 벅찬 환희 따위는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지와 태양이 만드는 이득 따위는 돈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코웃음 치고 지나쳐버린다.



지금 어디선가 울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데

그 사람은 나 때문에 울고 있다.


지금 어디선가 웃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까닭 없이 웃고 있는데

그 사람은 나 때문에 웃고 있다.


지금 어디선가 걷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정처 없이 걷고 있는데

그 사람은 나에게로 오고 있다.


지금 어디선가 죽어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까닭 없이 죽고 있는데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엄숙한 시간」 전문



시인만큼 모순에 찬 존재는 찾아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시인들은 늙으면서 젊고, 지혜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보스럽다.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없는 척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늘 과도한 관심을 퍼붓는다.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때 묻은 어른이고 동시에 천진한 아이다.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크고, 가장 무능하면서도 가장 유능하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거부한다. 사물들의 작은 변화에 깜짝 놀라면서도 항상 태연하다. "나는 육체의 시인이다,/또 나는 영혼의 시인이다./천국의 기쁨이 나와 함께하며,/지옥의 고통이 나와 함께한다,/나는 최초의 것을 나 자신에게 접목

시키고 점점 더 증가시키고...... 이후의 것을 새로운 언어로 번역한다.*** 시인들은 분열과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분열과 모순으로 대응하며 그것을 태연하게 수용하고 견딘다. 한 위대한 선각의 통찰에 따르면, 이들 창조하는 자의 뛰어남은 타인의 고통과 비참에

대한 비범한 공감 능력에서 비롯한다. 시인은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나 때문에 울고 있다,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나 때문에 웃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시인들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하며 가장 늦게까지 울고, 세상의 고통과 비참의 원인에 자신이 연루되었다고 믿으며, 그것에 대한 통렬한 윤리적 책임감을 뼛속까지 새기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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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박용준 옮김, 궁리, 2013, 73쪽.

** 월트 휘트먼, 『풀잎』, 허현숙 옮김, 열린책들, 2011, 44-45쪽.

*** 월트 휘트먼, 『풀잎』, 허현숙 옮김, 열린책들, 2011,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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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는 부조리한 세계가 펼치는 기억과 윤리의 위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좋은 시는 기억이 아니라반(反)-기억, 혹은 망각에 더 기댄다. 기억에 기댄 시들은 평범하다. 기억은 빛이 희미해진 미약한 삶이다. 반면 망각은 알 수 없는 모호하고 신비한 빛에 감싸인다. 비범한 시인들은 가증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삶의 파편들이 뒤죽박죽 섞인 채 방치된 망각과 무의식에서 시를 길어낸다. 시는 의미화에의 의지가 아니라 존재에의 의지에 의해 더 강한 탄력을 얻는다. 의미 과잉의 태도는 종종 시를 망친다. 좋은 시인들은 제 시에서 의미의 영역을 덜어내고 그것을 한사코 줄이려고 한다. 시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태도와 시선의 영역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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