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글쓰기][르포] 글쓰기를 대하는 자세, 『글쓰기의 최전선』

by 노지재배 2017. 12. 13.
반응형


오늘 리뷰하는 책은 『글쓰기의 최전선』이다. 출판사는 메멘토다. 


은유라는 저자는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R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며, 성폭력 피해 여성들, 마을공동체 청년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을 위한 글쓰기 수업도 진행하고 있다. 


글쓰기 수업과 관련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저자가 글을 쓰는 삶을 선택하고 그 과정에서 강좌를 열게 된 계기, 글쓰기 강좌에서 접했던 수강생(책에서는 이들을 학인이라 부른다.)들의 심리적 상처나 글쓰기 두려움을 극복한 사례 등을 담고 있다. 


글쓰기의 최전선




곧 이 책은 글쓰기의 기술적 차원의 조언이나 접근법보다는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삶을 바꾸어 나간 수강생들의 사례, 지은이가 진행한 글쓰기 강좌의 수업 과정 및 관련 교재 등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크게 보면 책의 구성은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관점과 정의를 밝히는 PART 1 삶의 옹호로서의 글쓰기, 책과 글쓰기의 관계 등을 다룬 PART 2 감응하는 신체 만들기, 항상 물음을 잃지 않고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라는 충고를 담은 PART 3 사유 연마하기, 실제적인 글쓰기 과정에서의 조언을 담은 PART 4 추상에서 구체로, 저자가 주로 쓰는 글인 로포와 인터뷰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PART 5 르포와 인터뷰 기사 쓰기 등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PART 6 부록에서는 저자의 글쓰기 강좌를 들었던 수강생들의 작품 3개와 저자가 글쓰기 강좌에서 다뤘던 교재인 여러 책들에 대한 짤막한 소개가 이어진다.


열다섯부터 글 쓰면서 일하는 삶을 꿈꾸었던 저자는 증권사 직원으로, 주부로 살다가 삼십 대 중반에 글 쓰는 일로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이후 저자는 사보나 사외보 등의 자유기고가를 거치면서 글쓰기 경력을 쌓았다. 그런데 저자는 거대 기업을 알리거나 거대 기업의 사회공헌을 포장하는 사외보 기자일을 하면서 부조리한 노동 현실을 외면하고 노동자들을 탄압한 채 자신들의 홍보에만 많은 돈을 쓰고 있는 거대 기업의 위선 때문에 자신의 일에 회의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 하나의 가족'을 부르짖으면서 자기 호사의 젊은 노동자들의 죽음과 그 가족의 아픔은 외면하는 거대기업.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


세상을 바꿔야 할 이유가 없는 자들의 언어로는 이 세상의 모순과 불행을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생각을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깨달았다. 나는 이미 어떤 가치 체계에 휘말려 있었고, 그것은 내 삶을 배려하지 않았음을.

나만의 언어 발명하기. 이것이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까닭이다. 


"



이미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R에서 활동하고 있던 저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시민사회단체 및 마을공동체,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만나고 이들에 대한 글을 쓰고 이들을 위한 글쓰기 강좌를 여는 일로 글쓰기의 활동 반경을 넓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통해 나온 책이 바로 『글쓰기의 최전선』이다.


이처럼 책은 글쓰기의 기술적인 내용이나 가르침보다는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글쓰기의 가치, 그리고 삶과 글쓰기의 관계 설정을 통해 어떻게 우리의 삶을, 그리고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을지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글쓰기는 일기가 아닌 공적 글쓰기라고 강조한다. 바로 이 글쓰기를 통해 자기 상처와 사회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 불편하고 불쾌하지만 끊임없이 질문하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


정희진의 말대로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 그래서 니체는 "추락할 것이 두려워 경직된 듯 서 있을 게 아니라 도덕을 넘어 떠다니며 유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저자는 또 "좋은 글은 질문한다. 선량한 시민, 좋은 엄마, 착한 학생이 되라고 말하기 전에 그 정의를 묻는다. 좋은 엄마는 누가 결정하는가 누구의 입장에서 좋음인가, 가족의 화평인가, 한 여성의 행복인가."라고 묻는다.


이어 작가는 "내가 쓴 글이 숨 막히는 세상에 청량한 바람 한 줄기 위안이 되는 것도 좋지만, 사막을 옥토로 만들 물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질문하는 글은 생성하는 삶으로 이어진다."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글쓰기가 "재테크나 피부 관리에 관심이 없고 자식 명문대 보내기를 삶의 주된 동기로 삼지 않는", "가방에 학원 전단지 파일을 넣고 다니고 휴대전화에 유명 강사의 연락처가 저장된 목동 엄마들과 달리, 등단한 '여류 작가'도 아니면서 감히 읽고 쓰는", "아이들 사교육비보다 내 책값과 내 공부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작가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을까.


작가는 말한다. "나는 그냥 한마디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느끼고 꿈꾸고 회의하는 감수성 주체로 살아가는 여자 인간은 있어도 없는 존재이자 이 시대에 사라지는 종족이었다."라고. 그리고 작가는 물었다.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은 걸까. 정말 나는 나쁜 엄마인가." 글쓰기를 통해 묻고 또 물었다. 


결국, 작가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나를 설명할 말들을 찾고 싶었다. 나를 이해할 언어를 갖고 싶었다. 뒤척임으로 썼다. 쓸 때라야 나로 살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언어를 갖는 일이며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기억했다."라고.


논픽션이나 르포, 수필 등 생활 속의 글쓰기와 글쓰기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 일독을 권한다.


 


■ 저자


은유 


글 쓰는 사람. 2011년부터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R에서 글쓰기 강좌를 시작해 현재 학습 공동체 '말과활 아카데미'와 글쓰기 모임 '메타포라'에서 정기적으로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 마을공동체 청년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을 위한 글쓰기 수업도 열었다. 자기 경험에 근거해 읽고 쓰고 말하면서 자기 언어를 만들고 자기 삶을 재구성하는 작업에 뜻을 두고 있다. 평소 니체와 시(詩)를 읽으면서 질문과 언어를 구한다. 『글쓰기의 최전선』, 『올드걸의 시집』과 인터뷰집 『도시기획자들』 등을 펴냈다. 




■ 목차


나는 왜 쓰는가 

들어가며 : 글쓰기의 최전선으로


PART 1 삶의 옹호로서의 글쓰기

삶의 옹호자 되기

다른 삶의 이력과 마주하는 시간 

‘나’와 ‘삶’의 한계를 흔드는 일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고통 쓰기, 혼란과 초과의 자리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자는 누구나 약자다 

말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하기 

내 몸이 여러 사람의 삶을 통과할 때 


PART 2 감응하는 신체 만들기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말들의 풍경 즐기기 

쓸모-없음의 시적 체험 

느낌의 침몰을 막기 위해 

호기심, 나로부터 벗어나는 일 

합평, 역지사지의 신체 변용 


PART 3 사유 연마하기

자명한 것에 물음 던지기 

자기 입장 드러내기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자 

사건이 지나간 자리 관찰하기 

여럿이 읽어야 하는 책, 니체 


PART 4 추상에서 구체로

짧은 문장이 무조건 좋을까 : 단문 쓰기 

글 쓰는 신체로 : 베껴 쓰기 

마음에 걸리는 일 쓰기 : 모티브 찾기 

추상에서 구체로 : 글의 내용 

내 글이 누구에게 도움을 줄까 : 글의 위치성 

별자리적 글쓰기 : 글의 구성 

더 잘 쓸 수도, 더 못 쓸 수도 없다 : 힘 빼기 

글은 삶의 거울이다 : 끝맺기


PART 5 르포와 인터뷰 기사 쓰기

노동 르포: 조지 오웰, 그 혹독한 내려감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 인터뷰 

인터뷰는 사려 깊은 대화다

나만의 민중 자서전 프로젝트 

시시하고 사소한 것들의 중요성 

말을 잃은 백 세 할머니 인터뷰하기 


PART 6 부록

노동 르포 : 효주 씨의 밤일

맥도널드 아르바이트 석 달의 기록(강효주) 

인터뷰 1 : “침대에 누워 대소변 받아내도 살아 있어 괜찮았어”

공주병 울 엄마 희순 씨의 우울증 극복기(박선미) 

인터뷰 2 : “장수 씨, 이제 그만 짐을 덜어요”

가족등록부에만 존재하는 그와 나(사은) 


참고도서 : 글쓰기 수업 시간에 읽은 책들 

나오며 : 슬픔이 슬픔을 구원한다





■ 책 속으로



"


나는 왜 쓰는가


내가 사외보에 글을 쓰는 기업은 '또 하나의 가족'을 내세우면서도 자사 공장에서 일하던 젊은 여성 노종자 가족 수십 명의 죽음은 외면했다. 거기서 일하던 변호사가 쓴 책에 나오는 기업의 실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는 갑이 하청을 준 을에 고용된 병의 신세였지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쓰는 원고가 (악덕) 기업의 대외 이미지 개선을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고 있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갖지 않는 간행물의 작은 지면이라고 해도 찜찜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곳의 사외보 일을 그만둔다고 하자 내게 일을 주었던 을의 대표는 한마디 건넸다. "그럼 다른 기업 일은 왜 하느냐. 그것도 그만두어라." 친구들도 만류했다. "독립운동 하니? 먹고는 살아야지." 물론이다. 나는 그곳이 아니라도 먹고살기 위한 최소한의 일은 마련한 상태에서 아는 대로 살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을 택한 것이다.

인터넷 포털 화면을 켜면 쏟아지는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 동향과 지하철 광고판의 현란한 문구들과 TV에서 무작위로 유포하는 자막들은 유혹한다. 그것은 하나같이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삶, 경쟁과 출세와 소비를 촉구하고 재생산하는 집요한 언어였다. 삶의 가치라는 고귀한 물음을 봉쇄하고 주변에 있는 타인의 삶에 등 돌리게 하는 쓸쓸한 말들이 있다.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에 대한 통념과 상식은 남들이 만들어낸 언어로 구성되었다. 오직 권력 유지와 화폐 증식이 목적인 사장님과 학원장과 목사님과 의원님이 지어내고 발언하고 유포시킨 언어로는, 나같이 고용이 불안정한 프리랜서나 애 둘 키우는 엄마의 삶을 솔직하게 담아낼 수 없다. 성적 기계가 아닌 본성을 꽃피우는 내 아이의 인생을 설계할 수도 없다. 토건 자본의 논리는 살던 곳에서 계속 살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멀쩡한 사람을 철거민으로, 빨갱이로 만들지 않나. 그러니까 세상을 바꿔야 할 이유가 없는 자들의 언어로는 이 세상의 모순과 불행을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생각을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깨달았다. 나는 이미 어떤 가치 체계에 휘말려 있었고, 그것은 내 삶을 배려하지 않았음을.

나만의 언어 발명하기. 이것이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까닭이다. 모든 경험은 언어에 의해 규정된다. 그런데 재테크나 피부 관리에 관심이 없고 자식 명문대 보내기를 삶의 주된 동기로 삼지 않는 나는, 가방에 학원 전단지 파일을 넣고 다니고 휴대전화에 유명 강사의 연락처가 저장된 목동 엄마들과 달리, 등단한 '여류 작가'도 아니면서 감히 읽고 쓰는 나는, 아이들 사교육비보다 내 책값과 내 공부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나는 그냥 한마디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느끼고 꿈꾸고 회의하는 감수성 주체로 살아가는 여자 인간은 있어도 없는 존재이자 이 시대에 사라지는 종족이었다. 여기 사람 있다, 는 내게도 유효한 외침이었다.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은 걸까. 정말 나는 나쁜 엄마인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내가 나를 설명할 말들을 찾고 싶었다. 나를 이해할 언어를 갖고 싶었다. 뒤척임으로 썼다. 쓸 때라야 나로 살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언어를 갖는 일이며 '언어는 존재의 집'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기억했다.


"



.

.

.




"


삶의 옹호자 되기


소설가 조세희는 1970년대에 말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책을 한 권 썼고 그 책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고 했다.

"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동안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조세희의 산문집 『침묵의 뿌리』를 넘기다가 이 대목을 보는 순간 마음 숙연해졌다.

글 쓰는 일이 작가나 전문가에게 주어지는 소수의 권력이 아니라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이 선택하는 최소한의 권리이길 바란다.


"



.

.

.




"


'나'와 '삶'의 한계를 흔드는 일


글쓰기는 '나'와 '삶'의 한계를 흔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삶'은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의 지루한 반복이다. 기쁨과 슬픔을 자아냈던 대소사의 나열은 삶의 극히 일부분이다. 나의 범위 역시 피와 살이 도는 육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신의 총체이기도 하며 관계의 총합이기도 하다. 나는 나 아닌 것들로 구성된다. 내가 쓰는 언어를 보자. 그간 읽었던 책, 접했던 언론 살았던 가족, 만났던 애인 놀았던 친구의 말의 총합이다. 깊은 밤 빗소리에 홀로 상념에 젖어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썼다면 그것 여시 '비'라는 자연현상이 마음을 건드린 덕분이다. 한 개인의 사생활도 어떤 사람, 어떤 사물, 어떤 장소에 대한 기억이다. 남의 경험이 내 경험에 들어 있듯, 내 경험도 남의 경험에 연루되어 있다. 글쓰기에서 공과 사라는 영역은 그렇게 서로 유동하고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삶이란 '타자에게 빚진 삶'의 줄임말이고, 나의 경험이란'나를 아는 모는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의 합작품'인 것이다. 누구도 삶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과 경험의 코뮌적 구성 원리를 인식한다면, '경험의 고갈'이라는 난감한 사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



.

.

.




"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는 것은 쥐며느리와 며느리의 차이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다. 하나는 기분이 삼삼해지는 일이고 하나는 몸이 축나는 일이다. 주변에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글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피곤하고 바쁘다며 핑계를 댄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말은 그 일이 우선이라는 뜻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루에 한 잔 꼭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은 날이 새는 것도 모르고 게임을 한다. 돈과 시간을 들여도 아깝지 않고 그쪽으로만 생각이 쏠리고 영감이 솟고 일이 되게 하는 쪽으로 에너지가 흐르는 것. 그게 무엇에 빠진 이들의 일반적인 증상이다.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수년간 영화를 한 편도 안 보는

사람은 없다.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수년간 한 편도 안 쓰는 사람은 주변에서 종종 본다.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을 즐기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나는 일 년 전부터 직장을 다니면서 저녁이 되면 심신이 양초처럼 녹아버리는 증상을 경험했다. 책 한 장 집중이 어려웠고 글을 쓰려고 해도 머리가 개운하지 않으니 생각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몰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침에 30분 일찍 집에서 나와 사무실 근처 벤치나 카페에서 잠깐 책을 읽거나 필사를 했다. 점심시간에 책을 들고 나와 카페에서 한 시간씩 책을 읽다 들어갔다. 쓸쓸한 분투였다. 그것은 번다한 일상에서 지친 마음을 닦아내는 의식 같은 것이자 활자와 최소한의 가느다란 끈이라도 쥐고 있고 싶은 안간힘이었다. 이 물질적 연결이 있을 때 언젠가 그 끈을 확 내 삶으로 당길 수가 있다. 나는 글이 쓰고 싶다는 이에게도 슬쩍 권한다. 하루는 책을 읽고 하루는 글을 쓰며 한 달을 해보라고. 그러면서 자기가 정말 글쓰기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지켜보라고.


스피노자는 "진리탐구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별도의 방법이 필요하지 않으며, 두 번째 방법의 탐구를 위해 세 번째 방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런 인식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금속 연마를 예로 든다. 금속을 연마하기 위해서 는 모루가 필요하고 모루를 갖기 위해서는 다른 도구들이 필요하다. 그런 식으로 계속 제2, 제3의 도구를 찾으며 무능력을 증명하는 일의 어리석음을 비판한다. 일단 내 앞에 있는 조잡한 도구로 시작하라. 밍치로 삽을 만들면 삽으로 사과나무를 심고 사과 열매를 팔면 책을 살 수 있다. 시작을 해야 능력의 확장이 일어난다.


(...)


아무리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껴져도 자기 능력에서 출발하기. 일단 써봐야 어디까지 표현이 가능한자 어디가 약한지, 어디가 좋은지 볼 수 있다. 글쓰기 초기 과정은 '질'보다 '양'이다. 일본 메이지대 문학부 교수 사이토 다카시는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이라는 책에서 "질보다는 양이 문장력 향상의 지름길"이라고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원고지 열 장을 쓰는 생활습관을 기르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좋은 글을 쓸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 백지 공포는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자기가 말하려는 내용을 완벽하게 써내야 한다는 부담을 버리고 글을 써 내려가면 그 과정에서 좋은 생각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부족해(보여)도 지금 자기 보습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실패하면서 조금씩 나아진다는 점에서 나는 글쓰기가 좋다. 쓰면서 실망하고 그래도 다시 쓰는 그 부단한 과정은 사는 것과 꼭 닮았다. 김수영의 시 「애정지둔(愛情遲鈍)」에 나오는 대로 생활무한(生活無限)'이고 글쓰기도 무한이다.


"



.

.

.




"


고통 쓰기, 혼란과 초과의 거리


글쓰기 수업에도 불행 서사는 주요 글감으 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게 또 글로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우선은 '타인의 시선' 탓이다. 글쓰기 과제는 수업 전날까지 과제 게시판에 올린다. 물론 공개 게시판이다. 수유너머R 홈페이지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다. 누적 조회수가 수백을 넘는다. 많다면 많은 숫자이고 적다면 적은 독자이다. 그런데 불특정 다수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지 학인들끼리만 볼 수 있도록 게시판을 비공개로 하자는 의견이 종종 제기된다. 나는 이 작은 공동체의 게시판조차 극복하지 못하면 '공적 글쓰기'는 불가능하다고 확실히 못 박는다.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덮는 것은 일기다. 글쓰기가 아니다. 비밀이 한 사람에게라도 발언할 때 생겨나는 것이듯 글쓰기라는 것에는 어차피 '공적' 글쓰기라는 괄호가 쳐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곧 남들에게 보이는 삶, 해석당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라고 다그치듯 말할 수도 없다. 몸에 들러붙은 그것이 쉬이 떨어진다면 왜 고민이겠는가. 고통이란 원래 사회적 의미망에서 생겨난다. 타인의 시선이 감옥이 되어버린 상태인 것이다.

어느 학인은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겪어낸 성장기를 소환해 글로 썼다. 온통 피멍이 든 엄마의 등, 피로 얼룩진 거실 바닥,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고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기 직전의 공포 등을 담담한 어조로 묘사했다. 음소거가 된 지옥을 경험한 듯 전신이 옥죄였던 빼어난 글이었다. 이 글을 쓰기 전, 그 학인은 나에게 고민을 터놓았다. 아버지인 가해자가 자신의 성장기에 걸쳐 하루도 빠짐없이 365일 폭군이었던 것은 아닌데 글로 써놓으면 하나의 나쁜 이미지로 고정되고, 자기 인생이 온통 불행한 것처럼 보일 텐데 사실과 다르며 그걸 원치 않는다고 했다. 나에게도 조심스러운 문제였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상황과 미묘한 심정을 잘 표현하는 게 글쓰기의 관건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드는 구도는 어쩌면 단순한 글쓰기다. 선악구도를 넘어서는 지점을 찾아보려는 노력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싹튼다. 그게 어렵지만 먼저 느낀 대로 말하고 쓰고, 그 생각을 공적인 장에 내놓아 외부에서 검증받고 소통하면서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을 바꾸어나가는 것. 그러니까 다른 (생각을 가진) 내가 되어가는 과정의 기록이 글쓰기의 본령이다.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과도한 주인공 의식'을 글쓰기에서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생각만큼 남의 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 문제를 두고두고 기억하고 되새기고 '색안경'으로 타인을 바라볼 만큼 부지런하지도 한가하지도 않다. 자신의 현안에 가려 남의 일은 뒷전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 개방의 수위를 고민하다 보면 자기 몰입이 어렵다. 좋은 글이 나오려면, 타인에게 비친 나라는 '자아의 환영'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자기 검열, 사회적 검열에 걸려 넘어지면 글을 쓰기 어렵다. 대개는 자기가 자기를 대하는 태도로 남을 대한다. 만약 누군가 자기 과거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유사한 삶의 경험치를 가진 타인을 동정과 수치로 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을 극복하는 과정은 자기의 편견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다.

그 학인의 경우는 쓰고 나서 고민을 털어놓았지만 아예 쓰지 못하거나 쓰더라도 빙빙 돌려서 피상적인 글을 써오는 경우가 많았다 '슬프다' '아프다' '힘들었다' 등 동어반복적인 관념적 어휘로 뭉뚱그려서 한 바닥을 채우는 식이다. 이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감정 속으로 달아나고 김정 뒤에 숨는 것이다.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지 않고 두루뭉수리해질 때는 내적 검열이 강하게 작동한다는 증

거다. 물론 신음소리 같은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확인하는 것도 거쳐야 할 단계이다. 무가치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일기가 아니라 독자를 대상으로 한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이상 정확한 문장과 안정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시도와 훈련은 꼭 필요하다.

"예술에서 최악은 부정직하다는 것이다. 문학은 저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정직한 표현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글쓰기는 용기다. 솔직할 수 있는 용기, 소설가 김연수는 글 쓰는 일이 "아랫도리 벗고 남들 앞에서 서는 것"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썼는데, 용기가 충만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글을 써내는 과정에서 문제에 직면하면서 용기가 솟아난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억눌린 욕망, 피폐한 일상 같은 고통의 서사를 길어 올리는 학인들에게 세 가지를 당부했다. 삶에 관대해질 것, 상황에 솔직해질 것, 묘사에 구체적일 것. 결국 같은 이야기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삶이다. 뭐라도 있는 양 살지만 삶의 실체는 보잘것없고 시시하다. 그것을 인정하고 상세히 쓰다 보면 솔직 할 수 있다. 상처는 덮어두기가 아니라 드러내기를 통해 회복된다. 시간과 비용을 치르고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아픔을 가져온 삶의 사건을 자기 위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말하기의 계기가 필요하다. 글쓰기는 상처를 드러내는 가장 저렴하고 접근하기 좋은 방편이다. 일단 쓸 것.

학인들은 고통스러울수록 뭉뚱그렸다. 그럴 때마다 '추상에서 구체로'를 주문했다. 자기감정을 단어 몇 개로 설명하지 말고 당시의 정황을 보여주어라. 일단 글을 써오면 같이 읽고 퇴고하는 과정을 통해 아주 구체적으로 그때의 배경, 인물, 사건을 묘사하고 서술하도록 권유했다. 현미경과 망원경을 동원하여 어떤 내용은 자세히 어떤 내용은 크게 보면서 기억의 복구 작업을 도왔다. 더 맞춤한 단어, 더 마땅한 표현을 찾아서 씨름하고 하나하나 의미를 만들어나갔다. 그렇게 '고통의 서사'를 한 편의 글로 완성하고 나면 학인들은 "쓰기는 힘들었지만 쓰고 나니 힘이 생긴다"고 말한다. 그 힘이란 자존감과 돌파력일 것이다. 자꾸 도망가고 싶고 피하고 싶은 고통스러운 과거 앞에서 그래도 과제를 내려고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하얀 화면을 글로 메우다 보면 '응시'의 힘이 생긴다. 그리고 똑바로 볼 수 있다는 건 더는 두렵지 않다는 뜻이다. 나를 따라오는 게 귀신인지 사람인지 승냥이인지 형체가 모호할 때 훨씬 두렵다.


고통의 글쓰기는 투쟁의 글쓰기다.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놓은 자아라는 환영과의 투쟁이고, 쓸 수 있는  가능성과 쓸 수 없는 가능성 사이의 투쟁이고, 매 순간 혼란과 초과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말들을 취사선택하는 투쟁이다. 이 치열한 싸움을 치르고 나면, 비록 구차스러운 자기주장 혹은 생에 대한 소심한 복수가 될지언정, 의미 있다. 어떤 학인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쏟아놓고 후회도 한다. (...)

그럴 수 있다. 그것은 낯섦에서 오는 감정이다. 자기 언어로 자기 삶을 재구성해보는 과정에 대한 생소함, 불편함 같은 것들. 익숙하지 않은 것은 나쁘다고 판단하는 게 일반적이니까. 그 과도기만 잘 견디면 조금 더 적극적인 자세가 된다. 나의 언어로 나의 삶의 서사를 풀어내는 쾌감이 있다.

그 쾌감. 그 후련한 정서 모방은 빠르게 진행된다. 한 명이 무사히 고통의 글쓰기를 수행하면 다른 동료들도 서둘러 가슴에 묻어둔 글 한 편을 제시하곤 했다. 내가 페터 한트케의 소설 『소망 없는 불행』에 나오는 "어쩌면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새로운 절망이 있을지 모르지"라는 한 구절을 온몸으로 이해했다면, 그건 학인들이 보여준 고통의 글쓰기 덕분이다.


"



.

.

.




"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대학교 3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된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의 어머니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다. 스물여덟 살에 청상이 되어 삯바느질로 삼형제를 키우던 어머니가 순천 시내 서점 주인에게 "우리 아들이 읽고 싶은 책은 마음대로 읽게 하고, 사고 싶은 책은 그냥 가져가게 하면 월말에 들러 값을 치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승옥은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책이란 책은 거의 다 읽었고 그것들이 글을 쓰는 바탕이 되었다며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독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아름답고 정확한 글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문학평론가 신형철도 『씨네21』 인터뷰에서 이런 고백을 남겼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세계문학전집 뒤에 있는 자료 등을 보고 나름 세계 문학사 연표를 만들어서 연도순으로 읽어 나갔어요. 고대부터 1960~70년대 작품, 밀란 쿤데라까지 듬성듬성하긴 해도 꽤 많이 읽었는데 그때 독서가 자산이 됐어요."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다' 좋은 책을 읽었다. 읽기와 쓰기는 다른 행위지만 내용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읽기가 밑거름이 되어 쓰기가 잎을 틔운다. 책을 읽어야 세상을 보는 관점이 넓어지고 사람을 이해하는 눈을 키운다. 세상은 어떤 것이구나 통찰을 얻는다. 모국어의 선용과 조탁, 표현력을 배운다. 좋은 문체에 대한 감을 잡는 것인데, 총체적으로 글을 보는 '안목'이 생기는 것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독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다. 내가 내 글의 첫 독자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과정은 곧 부단히 읽는 일이다. 한 문장 쓰고 읽고 한 문단 쓰고 읽고 한 장 쓰고 읽는다. 쓰기는 '읽으면서 쓰기'에 다름 아니다. 좋은 글에 대한 감각을 길러놓아야 내 글의 어디가 문제인지 짚어내고 고쳐 쓰면서 더 나은 글을 지향할 수 있다.

또한 글쓰기는 공동체의 산물이다. 한 사람이 그간 읽은 책, 들은 말, 본 것, 접한 역사와 당대 이념 등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 그것이 풍부할수록 더 힘 있고 좋은 글이 나온다. 내가 글쓰기 수업에 책을 넣는 이유다.


(...)


홍대 앞 유명한 북카페에도 쓰여 있는 카프카의 말.


"우리는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아주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느껴지고,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숲으로 추방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자살처럼 느껴질 것이다.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 있는 바다를 내려치는 도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나는 학인들에게 책을 읽되 '진실한 독해'를 당부했다. 여기서 진실함이란 사실에 부합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 부합하는 것이다. 곧 책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저자의 의도에 맞추려 낑낑대지 말고 자기 삶의 구체적인 정황을 떠올리고 접목시키면서 '주관적'으로 읽어달라고 했다.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모양이다. 지식 따로 생활 따로의 교육 풍토 탓일 게다. 사회학자 조한혜정은 『글 읽기와 삶 읽기 1』에서 이렇게 썼다.

"학생들은 추상화 수준이 높으면 그 나름대로 쉽게 소화하는 방식을 갖고 있다. 구태여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볼 필요 없이 공식을 외우듯 머릿속에서 처리해버리는 것이다."

현학적 공부와 지식 습득 능력은 갖춘 반면, 구체적 인간에 대한 관찰과 이해는 더 서툴다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하다. 지식은 단순화, 맥락화 작업의 산물이고 삶은 고도의 복잡성, 운연성의 산물이니까.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공부가 가장 쉬웠다는 말은 설득력을 갖는다.


"



.

.

.




"

쓸모-없음의 시적 체험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시 암송을 통해 안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고 있다. 그동안 오직 쓸모를 챙기기 위해 이루어진 지식의 축적에 물음표를 남겼다. 이것이 문학평론가 김현이 말한 문학의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으로의 이행이 아닐까. 잘 알려졌다시피, 김현은 남은 일생 내내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내남없이 그렇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성장하는 동안 쓸모를 세뇌당한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 쓸모의 척도는 물론 화폐다. 내 앎이, 내 삶이 교환기치가 있는가. 잉여가치를 낳는가. 제도 교육은 남보다 교환 가치가 있는 인간, 곧 임금 노동자가 되기 위한 혹독한 훈육 과정이다. 한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으로 맞춰지면서 본성은 찌그러지고 감각은 조야해진다. 이성복 시인의 시구대로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는 상태로 일상이 굴러간다. 그런데 유용하지 않아서 억압하지도 않는 시. 이 시대에 쓸모없다고 취급받는 시. 언어들의 낯선 조합으로 정신을 교란시키는 시. 가장 간소한 물성을 가진 시를 통과하며 학인들은 자신에게 가해진 억압을 자각한다.

나는 궁금했다. 시, 혹은 시적인 것은 왜 존재를 흔들고 지나가는 걸까. 쓸모와 무쓸모의 경계가 무너지는 거대한 혼란에 빠뜨리는 걸까.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는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한다. 말의 이치가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도 뜻을 전하고, 때로는 이치도 박자도 부족한 말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



.

.

.




"


호기심, 나로부터 벗어나는 일



독서 (탈)취향 참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하고도 수고스러운 말이다. 무려 일 년간 장기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책들이 있고 특정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자기 선택을 만들어가기도, 지켜가기도 쉽지 않다. 눈만 돌리면 들어오는 광고가 정보를 제공해주는 단순한 중개자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래도 먹고사는 건 바쁘고 문화생활은 해야겠으니 가까운 데에, 익숙한 것에 손이 간다. 영화는 흥행 영화로 책은 베스트셀러로,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가 일찍이 일침을 가했다.

"사람들은 이제 시간이 없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었어. 상점에 가서 다 만들어진 물건들을 사는 거야. 하지만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어."

대다수 사람들이 보는 책, 인구의 사분의 일이 선택하는 영화라는 게 얼마나 자기모순적인가. 대량생산 대량소비는 경제의 법칙이다. 문화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감정의 세분화, 다름의 향유다. 모든 감정의 평준화를 양산하는 건 결코 좋은 문화가 아니다.

양띠 해를 맞아 여기저기서 캠페인이 많던데, 서점에서 길을 잃은 양이 되어보자는 캠페인을 상상했다 양이 풀을 뜯듯이 한가롭게 책을 뜯어먹고 고르고 후회하고 그 책을 징검다리로 또 더 좋은 책을 만나고....... 그 과정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자기 취향이 무르익는 시간이고 자기 서사가 만들어지는 고귀한 체험이다. 고유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때 사회적 서정이 높아지고, 타자를 이해하는 감수성이 길러지지 않을까. 그러면 온갖 끔찍하고 야만적인 갑질 사건이 잦아드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



.

.

.




"


합평, 역지사지의 신체 변용


강좌 초반에는 글쓰기가 서툴 듯 말하고 표현하기도 초보자다. 이럴 때 나는 "봉합된 우정보다 드러난 적대가 낫다"는 까칠한 니체의 말을 빌려 우정의 비평을 권한다. 학인들도 영혼 없는 위로의 말 잔치보다 진실 말하기(parrhesia)가 글쓰기에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파국과 혼돈을 초래할 위험을 무릅쓴 진실 말하기, 당장은 불쾌하고 불편해도 적절한 자극이 없으면 자기 글을 냉철하게 볼 수 없다.

합평을 통해 우리는 배운다. 읽는 사람은 불쾌함 없이 자신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듣는 사람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말하는 기술을 익힌다. 합평은 그렇게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서로의 말을 참조하는 공론의 장으로 기능했다.


"



.

.

.




"


자명한 것에 물음 던지기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 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체가 될 일도 없다."

일본의 철학자 우시다 다쓰루가 '구조주의'를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인 주제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나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이야기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제도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축적된 정보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 슬프게도 한 인간의 우주가 미디어를 통해 완성된다. 그래서 우리가 도덕, 상식, 통념이라 부르는 가치 체계는 워낙  당대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글을 쓸 때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 어떻게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 알려고 해야 한다. 언론매체에서 떠드는 상식에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는 자, TV에서 커트된 무수한 삶을 '감히 알려고 하'는 자가 작가다.

예를 들면 가난은 불행하다는 믿음, 가난은 도와야 한다는 믿음이 오늘날 우리 도덕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을 돕는다고 밥 굶는 사람이 줄어들까. 그 어느 때보다도 기업의 사회공헌이 확산되고 빈민구호단체가 번성하지만 역으로 우리나라 절대 빈곤층과 지구촌 빈민층은 고착, 확대되고 있다. 이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까.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늘어만 가는데 그런 것들에 점점 무감각하고 무기력해져가는 현실에 한숨만 쉬던 내게 "동정은 이 세상의 고통을 증대시킨다"는 니체의 발언이 천둥처럼 다가왔다.

"동정은 쾌락을 포함하고 우월함을 적게나마 맛보게 하는 감정으로서, 자살의 해독제가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잊게 해주고 우리의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며 공포와 무감각을 쫓아버리고 말을 하게 하고 탄식하게 하며 행위를 하도록 자극한다. 동정에는 무언가 고양하고 우월감을 주는 점이 있다."

·니체의 말대로라면, 동정의 수혜자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동정하는 자 자신이다. (...) 이것을 니체는 동정적인 행위에 세련된 자기방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보다 강력한 사람, 돕는 사람으로 나타날 수 있을 때, 박수갈채를 받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 불행에 빠진 사람들과는 반대로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느끼기를 원할 때, 혹은 불행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권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때,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는 것을 피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니체는 "오늘날처럼 동정적인 사람들을 선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시대를 지배하는 도덕적 유행일 뿐이라고 말한다. 반대의 유행이 한때 그리고 오랫동안 지배했던 것처럼, 니체의 말이, 놀랍고 아팠다. 불쾌하고 한편 시원했다. 정희진의 말대로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 그래서 니체는 "추락할 것이 두려워 경직된 듯 서 있을 게 아니라 도덕을 넘어 떠다니며 유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글은 질문한다. 선량한 시민, 좋은 엄마, 착한 학생이 되라고 말하기 전에 그 정의를 묻는다. 좋은 엄마는 누가 결정하는가 누구의 입장에서 좋음인가, 가족의 화평인가, 한 여성의 행복인가. 때로 도덕은 가족, 학교 등 현실의 제도를 보호하는 값싼 장치에 불과하다. 일상의 평균치만을 관성적으로 고집하며 살아가는 순치된 개인을 길러낸다. 하지만 평균적인 삶도 정해진 도덕률도 없다. 천 개의 삶이 있다면 도덕도 천 개여야 한다. 자기의 좋음을 각자 질문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게 중요하다. 작가는 그것을 촉발해야 한다.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를 보편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기존의 보편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글이 생명력을 갖는다. 내가 쓴 글이 숨 막히는 세상에 청량한 바람 한 줄기 위안이 되는 것도 좋지만, 사막을 옥토로 만들 물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질문하는 글은 생성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왜라고 묻는 글,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하도록 등 떠미는 글, 도덕 위에서 춤추도록 깨달음의 오르가슴을 선사하는 글. 모든 글(책)의 최종 목적은 '감동'이다. 그리고 진정한 감동은 신체가 바뀌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다.


"



.

.

.




"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


애초에 글감이 될 만한 사건이 따로 있다는 게 아니다. 전태일처럼 가난과 저항의 불굴의 인생, 스콧 니어링처럼 자연친화적이고 금욕적인 삶, 체 게바라처럼 르네상스적 인물만 소재가 된다면 이 세상에는 위인전만 남을 것이다. 갑남을녀의 일상 희로애락의 흐름, 너무 사소해서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들은 좋은 글감이다. 하지만 고통 그 자체, 여행 그 자체, 불륜 그 자체는 글이 될 수 없다. 모든 풍경이 사진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각도에서 어떤 문제를 다루는가, 고유의 관점과 해석 능력이 중요하다. 그래서 작가는 뛰어난 관찰자여야 한다. 기자는 쓰레기통에서도 특종을 건져낸다는 말도 있다. 작가든 기자든 글 쓰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대상에서 비범한 그 무엇을 찾아내는 안목,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비틀어 보고 뒤집어 생각하는 훈련이 요구된다.

에세이 칼럼, 논문 등 모든 글에는 하나의 메시지, 하나의 질문이 담겨 있어야 한다. 문제의식이 없는 글은 요란한 빈수레와 다름없다.

메시지가 없는 미사여구의 나열은 공허하다. 지식은 넘치고 지혜가 빈곤한 글은 무료하다. 전문적 지식과 현란한 수사로 빼곡하지만 정작 다 읽고 나도 필자의 생각을 알 수 없는 글이 일간지에서도 눈에 띈다. 이는 독백이다. 글이란 또 다른 생각을 불러오는 대화와 소통 수단이어야 한다. 울림이 없는 글은 누군가에게 가닿지 못한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어야 좋은 글이다. 그러니 글쓰기 전에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글을 쓰기 전에 스스로에게 중얼중얼 설명하면서 자기부터 설득하는 오붓한 시간을 갖자. 두툼한 책이든 한 페이지 글이든 한 줄로 정리하고 시작하는 것이 글에 대한 예의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을 요약하면 이것이다. '관습적 해석에 저항하는 글을 재미있게 쓰자.'


"



.

.

.




"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자


자기 색깔을 보여 주는 것은 창작자의 임무이다. 창작 분야 종사자 중 '대체 가능한 존재'는 살아남지 못한다. 내가 아니어도 남이 할 수 있으면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쓰는 글은 나만 쓸 수 있어야 한다. 박완서의 글은 김훈이 흉내 낼 수 없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것을 삼갔을 뿐이다"고 했다. 내가 글을 쓸 때 꼭 염두에 두는 말이고 학

인들에게도 자주 당부하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 문장력이 탁월한 사람, 감각이 섬세한 사람, 지구력이 강한 사람 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운이 빠진다.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나는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내 삶과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의 절실함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나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기운이 난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다.

나를 온전히 담아내는 글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앞서『전태일 평전』 서평에서 보았듯이 어떤 주제에 대해 글을 쓰라고 하면 모범답안처럼 특정한 해석이 쏟아진다. 대다수가 자신의 생각을 쓰기보다 무난한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글이 안전하다고 여긴다. 그 불안함, 두려움의 근원이 무얼까. 모난 돌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일 수 있다. 그러나 글쓰기는 둥그스름한 돌에서 모난 돌로 자신을 깎고 벼리는 일이다. 더 섬세하고 더 고유하게 감각을 다듬어야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단지 해묵은 것을 새롭게 보는 시각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컵 자체는 없다. 노란 컵, 플라스틱 컵 종이컵, 깨진 컵만 있을 뿐이다. 사실은 없다. 해석된 사실만이 존재한다. 내가 만약 어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괴롭히는 대상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보편적 관점을 변화시키고, 알고 있는 것의 지평을 변화시키고, 약간 옆으로 비켜서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경험을 했을 때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고 내 진짜 느낌에 집중하려는 노력이 글을 참신하게 한다. 어떤 글이 읽힌다면, 독자의 눈길을 붙들었다면 그것은 진부하지 않다는 뜻이다.

또 흔히 나는 글재주가 없다. 개성이 없다고 말하는데 많이 써보지 않아서 그럴 수 있다. 나의 삶을 숙고하고 나의 경험을 나의 언어로 말하는 훈련을 반복하기 전에는 '글재주'와 '고유성'은 드러나지 않고 드러날 수도 없다.


"



.

.

.




"


시간이 지나간 자리 관찰하기


나는 늘 궁금했다. 왜 무엇이 한 사람을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을까. 그 사람은 왜 지금 거기에 있을까. 의사나 판사, 연예인같이 돈이나 명예나 보상이 따르는 인기 직종에 관해서라면 정보가 넘친다. 당사자가 직접 책을 써서 알리거나 매스컴에서 그들의 삶과 일을 조명한다. 사회적으로 소위 '성공'한 이들의 정보는 차고 넘지는 반면, 영화 스태프나 장애인 야학교사나 비전향 장기수, 경비원 등 수입이 높지 않은 이들, 일부러 찾지 않으면 잘 안 보이는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집단적으로 무시(無視)한다. 눈여겨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문제의식이란 거창하지도 까다롭지도 않다.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 의문이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놓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세상의 풍경들, 예를 들면 엄마가 매일 일어나 밥하는 일, 마트 종업원이 기계적인 인시를 건네는 일, 괜히 싫은 감정이 드는 것 등 상황과 감정에 집중하고 관찰하고 질문하는 일이다. 가슴에 물음표가 많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이 많다. 작은 자극에도 촉발을 받고 영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물음표가 어느 순간 느낌표로 변하고 다른 삶의 국면을 통과하면 그 느낌표는 또다시 물음표가 된다. 내가 이렇게 믿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이 잦아드는 것이다. 그 물음표와 느낌표의 반복과 순환이 자기만의 사유를 낳는다.


"



.

.

.




"


짧은 문장이 무조건 좋을까: 단문 쓰기


아마 조심스럽게 추측하자면 시중에 나온 거의 모든 글쓰기 책이 단문을 권유하고 긴 문장을 글쓰기 최대의 방해 요소로 간주하는 것 같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단서가 있다. 단문 쓰기는 글쓰기 훈련의 어느 단계까지에 해당하는 비법이 아닐까 싶다. 글쓰기 수업에서 가끔 '단문 쓰기' 신공을 펼치는 학인들을 본다. 단문의 빠른 전개는 속도감 있게 읽히지만 때로 너무 끊어져서 이야기가 시작되다 끝나버리는 허무감을 주기도 한다. 특히 낭독해보면 금방 안다. "지금은 삶이 내 것인지 두렵다" "사람을 만날수록 외로워졌다" 같은 경우처럼 "~했다" "~이다"라는 문장이 잇달아 나오는 글은 흐름이 탁탁 끊겨 이야기가 흩어진다. 복잡한 문장과 마찬가지로 앙상한 문장도 메시지 수용에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르스트의 문장은 길고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유럽권 작가는 거의가 만연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밀고 나가는 데 주저함이 없다. 오랜 시간 형성된 지적 풍토와 문화에서 형성된 문제가 아닐까.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꼬리가 긴 글에 어려움을 덜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짧은 문장이 선이고 긴 문장이 악이라고 단정하면 곤란하다. 문장의 길이가 좋은 글을 가늠하는 절대적 척도라는 건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글쓰기에서는 좋은 문장이 있고 덜 좋은 문장이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는 대체로 간결하고 재미있고 친절하고 유익할 때 좋은 문장으로 본다.

문장이 길든 짧든 나는 이런 글이 좋다. 사유가 촘촘해서 문장이 흐름을 타고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건드리며 인식의 틀을 흔들어 놓는 글. 하나의 메시지나 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어라도 남으면 그건 

좋은 글이다. 그럼에도 자기만의 글쓰기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는 단문 쓰기가 글쓰기를 여는 문이다.


"



.

.

.




"


글 쓰는 신체로: 베껴 쓰기


베껴 쓰기는 무엇보다 엉덩이의 힘을 키운다. 글쓰기는 정신적인 영역이면서 육체적인 노동이다. 베껴 쓰는 동안은 책상에 앉아 있으니 책상과 한 몸 되어 무엇을 생산해내는 기쁨 체험에 익숙해질 수 있다.

그렇게 모은 글. 금쌀처럼 귀한 나의 일용할 양식을 담은 노트를 가방에 넣고 다닌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창가에 턱 괴고 커피를 마시면서, 잠을 청하면서 '노트'를 훑는다. 화분에 물을 주듯이 그것들에 눈길을 붓는다. 이티와 소년처럼 손끝을 맞대고 있다. 베낄 당시엔 큰 감동을 준 단어가 시시해져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다시 보아도 감동이 물결치는 문장이 있어 형광펜을 긋기도 한다. '매일 조금씩의 위력'은 참으로 크다. 신체에 각인된 그 문장, 단어, 금언, 감각, 뉘앙스, 느낌. 향기, 리듬, 파장이 글을 쓸 때면 슬며시 되살아남을 느낀다. 영감을 주고 논지를 잡아준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 살짝 비틀어 재활용하는 것만으로 밋밋한 글에 활기가 돈다. 베껴쓰기는 정신에 군불을 때주는 일용할 땔감이다. 베껴 쓰기는 그러니까 기타리스트가 되기 위해 록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꼽히는 지미 핸드릭스의 연주법을 따라 해보는 것과 같다. 철학자 김영민은 모방

의 필요성 및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방은 물듦이다. 진정한 모방의 힘은 충실하고 충실해서 마침내 그 모방을 뚫어내는 길 속에 있다. 그러나 착실하게 모방의 길을 걸어보지 못한 자라면 냉소마저 허영일뿐이다. 가령 프로이트에 충실한 라캉의 생산성이 그러하고 라캉에 충실한 지젝의 생산성이 그러하지 않던가."


"



.

.

.




"


추상에서 구체로: 글의 내용


"관념적이고 모호한 표현을 피하세요." 글쓰기 수업에서 학인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 처음 쓴 과제는 거의 관념적인 언어로 설명하듯이 생각을 전개한다. 철학 용어나 개념어를 넣기도 한다. 글재주가 있는가도 싶지만 대개는 만져지는 게 없는 붕 뜬 글이다. 


(...)


생각을 멋있게 쓰는 것은 좋은 글이 아니다. 말이 장황해지고 설명하거나 강요하는 어조가 된다. 가장 학인들이 과거를 성찰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내 삶은 내 나이와 어긋나고 있었다" "실존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삶을 살고 싶다" 등등. 이런 표현은 일반적이고 모호하다. 한 사람의 고유한 개성과 상황을 느끼지 못하면 독자는 글에서 멀어질 뿐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이유도 말하지 않고 내 앞에서 한숨만 쉬고 눈물만 닦고 있는 격이다. 그보다는 한 대로 본 대로, 느낀 대로 구체적인 줄거리를 써야 한다. 이런 식으로,


"어느 날 대학원 수업을 듣는데, 비평가로 유명한 우리 독문과 교수 한 분이 아무 말씀도 없이 두 시간을 늦었다. 교수실에서 기다리던 나는 학생들과 나가자고 했다. 이무도 감히 따라 나가려고 하질 않았다. 

혼자 나가기도 그렇고 해서 어금니를 물고 기다리는데 교수가 왔다. 아무 사과도 없이 오늘 수업은 늦어서 못 하겠단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교수님, 다음엔 저희가 두 시간 수업에 늦겠습니다' 했다. 교수는 안경 너머로 눈꼬리를 각지게 추켜올리며 단호히 '안돼!' 한다 '왜요?' 하니 '나는 교수고 너희는 학생이니 안 돼' 했다. 그때 이미 나는 결심했다. 이 더러운 판을 떠나리라."

이 학인은 대학에 남아서 공부하려다가 학자의 길을 접고 귀농하여 농사를 짓기까지 '방황'의 시간을 기록하면서 위의 사례를 들었다. 글이 하도 생생하여 설득이 절로 됐다. 이런 상황 묘사 없이 단 한 줄로 "교수들의 안하무인적 태도와 대학 사회의 권위적 질서에 염증을 느꼈다"라고 쓰면 좋은 글이 아니다. 필자의 개성과 글의 메시지가 드러나지 않으며, 신문 사설용 언어와 차별성도 없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어라'는 내러티브 제1원칙에 해당하는 말이다. 추상에서 구체로 갈 수 있는 좋은 팁이다. 전태일은 이렇게 썼다.

"아버지께서는 매일 폭음을 하시고, 방세를 못 준 어머니께서는 안타까워하시고, 동생은 방학책 값, 밀린 기성회비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고 아침마다 울면서 어머니의 지친 마음을 괴롭힐 땐, 나는 하루가 또 돌아온다는 것이 무서웠다."

기교를 부리지 않았지만 울림이 크다. 특히 마지막 문장으로 아름다워진다. 나는 고통스럽다거나 나는 살기 싫다고 쓰지 않고 하루가 또 돌아온다는 것이 무섭다고 썼다. 자기 몫의 고통 값을 정확하고 고유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미문이다. 그가 처한 암담한 상황을 아빠, 엄마, 동생 등 가족의 사례를 나열하여 공감의 지점을 만들어주었다. "가족들이 모두 나를 힘들게 한다"는 식으로 한 줄로 요약하는 건 설명하는 문장이다.


"



.

.

.




"


더 잘 쓸 수도, 더 못 쓸 수도 없다: 힘 빼기


그 두 시간 강의 중 기억에 남는 건 글쓰기에 관한 말씀이다. 시인(이성복 시인)은 글을 쓸 때 국화빵 기계에 밀가루가 들어가고 팥앙금을 짜는 것처럼 한 단락씩 채워간다고 했다. 또 글이란 본디 자기 능력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더 못 쓸 수도 없다고 했다. 글 쓰는 사람은 보는 관점이 달라야 한다며 무슨 조감도 같은 그림을 칠판에 그렸다. 나는 시인의 말을 글을 쓰다가 막힐 때마다 유용하게 되새김질했다. 특히 "나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더 못 쓸 수도 없다"는 말은 잘 쓰고 싶은 욕심에 눈앞이 흐려져서 문장이 한 줄도 나아가지 못할 때 특효약이다. 얼마나 명확한가 나의 역능만큼 써진다는 엄정한 진리, 영감 가득한 아름다운 문장으로만 채워진 글은 날로 기대하지 말라는 일침, 뭔가 전율을 가져오는 '신의 한 수' 같은 문장들로 이뤄진 글은 갈망의 산물이 

아니라 습작의 결과다.

어디선가 골프 칠 때 어깨에 힘을 빼는 데만 3년이 걸린다는 말을 보았다. 글쓰기 역시 어깨의 힘을 빼고 나의 말로 꾸밈없이, 한 문장씩 정직하고 정확하게 써 내려가는 게 중요하다는 점에서 골프 치는 법과 닮았다. 중언부언 수식 과잉의 문장이 아니라 정교한 문장이 좋은 문장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나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내가 쓴 글이 추상적인지 구체적인지, 잔뜩 멋 부렸는지 진실한지는 바로 알기 힘들고 남이 쓴 글과 내가 쓴 글을 읽으면서 감각으로 익힐 수 있다.

나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못 쓸 수도 없다는 말은 희망적이다. 적어도 뿌린 대로 거둘 수 있다는 게 아닌가. 살아가면서 투입 대비 산출이 정확한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예전에 아는 사진작가가 백 장 찍으면 좋은 사진 한 장 건질 수 있다고 했는데, 글도 열 번쯤 고쳐본다면 좋은 글이 건져질 것이다. 글쓰기에 요행은 없다. 요행처럼 보이는 일이 있을 뿐.


"



.

.

.




"


노동 르포: 조지 오웰, 그 혹독한 내려감


르포르타주 문학은 나에게 시린 꿈처럼 남아 있다. 접시 닦이, 노숙, 부랑자 생활 등을 자처했던 조지 오웰은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의 주제, 곧 마땅히 표현해야 될 바를 표현하는 일인데 그건 경

험하지 않으면 실상을 드러낼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일단 현장에서 써야 한다는 것. 동의한다. 오웰은  또한 표현의 방식과 스타일 등 넓은 의미의 작품성은 그다음에 따라오며 그건 고통스러운 반복 작업과 훈련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동의한다. 헌장에서 보고 느끼고 말한다는 것. 현장으로 내려갔기에 잘 쓴 게 아니라 충실한 경험에서, 곧 삶에 밀착한 경험에서 좋은 글이 나온 것이다. '삶이 쓰게 하라'는 것. 작가의 윤리와 책무에 헌신하고 글로 생산하는 작가에게 존경이 솟는다. 그래서 나는 글이 힘을 잃고 지리멸렬해진다고 느낄 때 조지 오웰을 읽는다. 그의 맵시와 유머와 기품이 어우러진 문장을 부러워하며 '혹독한 내려감'에 존경을 보낸다.


"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떠셨나요, 오늘 포스팅?



구독과 좋아요는 큰 힘이 됩니다.


로그인하지 않으셔도 좋아요-추천 버튼 누르실 수 있습니다.


아래는 제 블로그에 있는 다른 포스팅 중 참고하실 만한 내용을 추렸습니다.


한번 살펴봐 주세요.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도서 리뷰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교정][교열][문장]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교정 교열 장인의 내공을 들여다본다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재테크][절약] 『90일 완성 돈 버는 평생 습관』, 저절로 돈이 모이는 초간단 재테크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시][은유] 시를 시답게 만드는 『은유의 힘』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사회][언론] 대한민국 언론의 속사정, 『뉴스가 말하지 않는 것들』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자기계발][화술] 간단 화법 정리, 『횡설수설하지 않고 정확하게 말하는 법』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사회][인문] 불합리한 세상을 깨달아라, 《부들부들 청년》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자기계발][심리][최면] 자신감·자존감 회복 프로젝트, 나는 오늘도 나를 응원한다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도대체][에세이] 마음대로 안 되는 인생,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은유][제유][패러디] 시 창작을 위한 〈시인 수업〉 3종 세트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광고][카피][글쓰기] 쉬운 글쓰기를 즐겨보자, 비틀어 글쓰기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소설][사전] 인생을 건널 말의 배를 만든다, 《배를 엮다》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기업윤리][사회] 기업윤리란 무엇인가? 《고장 난 거대 기업》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고전][제갈량] 제갈공명의 지혜, 《난세를 건너는 법》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소설] [풍자] 대한민국 1% 남자들의 속살 이야기,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신화][인문] 긴 겨울밤과 끝나지 않는 여름의 이야기, 닐 게이먼의 《북유럽 신화》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수필][거리] 내가 편안한 거리는 얼마일까, "약간의 거리를 둔다"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자기계발][업무 기술] 최고들은 어떻게 일하는가, 최고들의 일머리 법칙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소설][성장소설][복싱] 권투와 함께하는 불우한 성장소설 《스파링》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소설][사회] 묵직한 사회·회사 소설, 《누운 배》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세계사][옷] 옷을 통해 살펴본 재미있는 세계사 《옷장 속의 세계사》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성공][운][아웃라이어] 말콤 글레드웰, 아웃라이어-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화][분노][스토아]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화에 대한 조언, 《화에 대하여》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법정][최순희]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불일암 사계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인문][인디언] 어떻게 공기를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시애틀 추장의 꿈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리듬][자기계발] 다 리듬 때문이었어-삶을 바꾸는 리듬의 힘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세계 여행][여행] 마을버스로 월드 투어, 《마을버스 세계를 가다》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그림자 노동] 대가 없이 당신에게 떠넘겨진 《그림자 노동의 역습》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어쩌면 별들이][필사 시집]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플러스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어쩌면 별들이][어른을 위한 동시] 필사하기 좋은 동시 '내가 아주 작았을 때'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독서][독서법] 본깨적, 인생을 바꾸는 독서법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로봇][인공지능][AI][알파고][로봇세] 로봇 시대, 인간의 일 - 로봇 시대의 역사와 전망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애드센스][블로그] 블로그 제대로 운영해 보자, '블로그의 신'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어쩌면 별들이][도깨비] 필사하기 좋은 시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도올][김용옥] 도올 김용옥 비판 - 우리 시대의 부끄러움을 말하다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경제성장][분배][저성장]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노자][도덕경] 동양 최고의 고전 1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애드센스][블로그] 구글 애드센스로 돈 벌기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영어 공부]10살 영어 자립! 그 비밀의 30분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힘이 정의다][독서][세계관]"법령과 황금률은 노예와 바보에게 차꼬를 채우느라 만든 것이다."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언더도그마][언더독][오버독]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결혼보다 월세 - 10년 차 경제지 기자의 재테크 에세이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부자 언니 부자 특강(평범한 월급쟁이 부자 되는 공식)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가면사축 - '사축' 탈출을 위한 비법서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사축일기 - "수고했어 오늘도~" 지친 퇴근길의 당신에게

[책 이야기-결정적 인용] -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 가볍지 않은 로맨스




■맞춤법 관련


[글 이야기] - [절래절래/절레절레] 뉴스가 틀린 맞춤법(25) =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까요, '절레절레' 흔들까요

[글 이야기] - [새시][섀시] 창틀은 뭐라고 할까요, 샷시? 샤시? 섀시? 새시?

[글 이야기] - [밖 띄어쓰기][이불밖][이불 밖] 이불 밖이 위험할까, 이불밖이 위험할까?

[글 이야기] - [사단 나다/사달 나다] 뉴스가 틀린 맞춤법(24)='사단 나다/사달 나다' 사단은 내지 마세요

[글 이야기] - [이참에/이 참에] 뉴스가 틀린 맞춤법(23)='이참에/이 참에' 이참에 제대로 알고 가자

[글 이야기] - [자주 틀리는 일상어/맞춤법] (3) 괄호 뒤 조사 사용법

[글 이야기] - [더더욱/더 더욱][더욱더/더욱 더] 뉴스가 틀린 맞춤법(22)='더욱'을 강조하는 부사들

[글 이야기] - [갖은/가진] 뉴스가 틀린 맞춤법(21)='갖은/가진' 어떤 때 쓰일까요?

[글 이야기] - [하마터면/하마트면] 뉴스가 틀린 맞춤법(20)='하마터면/하마트면' 맞는 말은?

[글 이야기] - [미미하다/미비하다] 뉴스가 틀린 맞춤법(19)='미미하다/미비하다' 무엇이 맞을까요?

[글 이야기] - [삼가/삼가다/삼가하다] 뉴스가 틀린 맞춤법(18)='삼가다/삼가하다' 무엇을 삼가야 할까?

[글 이야기] - [보다 띄어쓰기] 뉴스가 틀린 맞춤법(17) = '보다'의 띄어쓰기

[글 이야기] - [삼가/삼가다/삼가하다] 뉴스가 틀린 맞춤법(18)='삼가다/삼가하다' 무엇을 삼가야 할까?

[글 이야기] - [미미하다/미비하다] 뉴스가 틀린 맞춤법(19)='미미하다/미비하다' 무엇이 맞을까요?

[글 이야기] - [피로 회복][피로 해소] 뉴스가 틀린 맞춤법(16) = 피로를 회복한다니? 피로는 해소하거나 풀어야!

[글 이야기] - [때문에 띄어쓰기] 뉴스가 틀린 맞춤법(15) = '때문에' 띄어쓰기

[글 이야기] - [밖][밖에] 뉴스가 틀린 맞춤법(14) = 밖, 밖에 띄어쓰기

[글 이야기] - [들르다][들리다][들러][들려] 뉴스가 틀린 맞춤법(13) = 들르다/들리다, 들러/들려

[글 이야기] - [닦달][닥달] 뉴스가 틀린 맞춤법(12) = 닦달/닥달

[글 이야기] - [자주 틀리는 일상어/맞춤법] (2) 염두에/염두해, 그제야/그제서야

[글 이야기] - 뉴스가 틀린 맞춤법(11) = 눈에 띄다/눈에 띠다

[글 이야기] - [렬/률][열/율][맞춤법][띄어쓰기] 뉴스가 틀린 맞춤법(10) = 렬/률, 열/율

[글 이야기] - 뉴스가 틀린 맞춤법(9) = ~로서 ~로써

[글 이야기] - [자주 틀리는 일상어/맞춤법] 내가 아시는 분?

[글 이야기] - 뉴스가 틀린 맞춤법(8) = 이따가? 있다가?

[글 이야기] - 뉴스가 틀린 맞춤법(7) = 내노라하는? 내로라하는?

[글 이야기] - 뉴스가 틀린 맞춤법(6) = 알파고에게? 알파고에?

[글 이야기] - 뉴스가 틀린 맞춤법(5) = '갈 데까지 가다'와 '갈 때까지 가다'

[글 이야기] - 뉴스가 틀린 맞춤법(4) = '더우기'와 '일찌기'

[글 이야기] - 뉴스가 틀린 맞춤법(3) = '들어나다'와 '드러나다'

[글 이야기] - 뉴스가 틀린 맞춤법(2) = '던지'와 '든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