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과 한국의 특징을 드러내는 단어로 영어권에서 가장 큰 사전으로 꼽히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올라있다는 한국말이 있다. 바로 '재벌(Chaebol)'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되지 않고, 아주 적은 지분으로도 수십 개에서 수백 개에 달하는 전체 그룹사를 움직일 수도 있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지배구조를 옮길 수 있는 말이 없어, '재벌'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이다.
이 재벌은 소유 구조의 문제도 있지만, 일제 강점기 및 대한민국 독립 과정, 그리고 군사 정권 아래에서의 부당한 재산 증식, 그리고 민주화 이후에도 이어진 정경유착의 폐해 등 고도성장을 겪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러 문제점들의 뿌리에 그 존재감을 어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우리나라 재벌의 역사적인 뿌리와 부당한 재산 형성 과정, 그리고 부당한 세습까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한국 사회의 발전에서 재벌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 대표 재벌들이 만들어놓은 한국 사회가 마냥 자랑스럽거나 정의와 공평이 뿌리내린 올바른 사회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없는 사람들에 대한 갑질, 그리고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정의롭지 못한 상속의 역사. 일종의 모태 귀족으로서 일반인들의 생활이나 교양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특권 의식에 찌든 본인들조차 일반인의 생활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괴상한 족속들이 바로 한국의 재벌이 아닌가 한다.
맷값 폭행, 아들을 위해 조폭을 동원해 집단폭행을 벌인 재벌 이야기, 운전기사 갑질에서 이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땅콩 회항과 그 집안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수감이나 구속만 되면 도지는 그들의 지병과 휠체어 등장 씬.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개나 줬는지 병역 면제의 '신의 아들들'이 판치는 재벌가의 현실. 정경유착으로 회사를 키우고서는, 회삿돈을 이용해 불륜을 저지르고 '내로남불'로 이혼을 추진 중인 재벌도 있다. 있는 집안이 더하다고, 경영권을 둘러싼 부모와 자식 간, 형제간의 추태와 폭로전도 빼놓을 수 없다.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주주들이 입은 손해와 이를 보고도 모른 척하는 우리나라 사법부의 현실. 이재용을 따라 상속세를 줄이고 주식 보유는 늘리는 다양한 신공을 펼친 정의선과 최태원까지. 대한민국 법과 질서를 교묘히 빠져나가는 신흥 귀족들의 다양한 절세 방식과 이에 호응하는 법률 전문가 및 기업 직원들, 그리고 사법부의 지원까지.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들만의 세상이라는 한탄을 지울 수 없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책은 상권에서 삼성과 현대, 하권에서 SK와 롯데를 다루지만, 이들과 혼맥이나 친인척 관계, 또는 사업 관계로 연관됐던 두산과 효성, LS, 대상, CJ, 농심 등 국내 굵직한 대기업들의 구린 속사정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대부분 재벌 대기업의 시작이 일제 시대에 식민지 자본 수탈에 일조하면서 꽃을 피웠다던가 해방 이후 일본인들의 안전한 탈출을 돕는 등의 방식을 통해 일제의 적산을 손쉽게 선점하면서 시작됐다는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더불어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고 일제 시대 기득권 세력의 사회 질서와 부의 재획득을 용인했던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재벌과의 유착으로 배를 불린 군사 정권들, 재벌의 호주머니를 제 호주머니 부리듯 하던 아버지를 따라 잘못된 길을 걸어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까지.
안정적인 벌이를 위해 재벌 대기업 취업을 소망하는 것을 탓할 수 없다. 또한, 국가 발전을 위해 재벌 대기업들의 향후 발전에도 나름 필요한 국가적 지원들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 재벌의 정의롭지 못한 발생과 한국 사회에 끼쳐온 병폐에 대해서도 교양인으로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와 법치가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재벌 개혁과 정경유착 타파가 필요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재벌의 공과 과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바라볼 때 우리 사회 민주주의와 법치, 그리고 경제의 발전이 진정한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책 속으로 발췌
-애국심 마케팅, 그런데 군대는 다녀오셨나요?
한국 남성 일반인들의 병역 면제율은 평균 6.4%다. 그런데 재벌가의 병역 면제율은 33%로 껑충 뛴다. 이 수치는 10대 그룹으로 대상을 좁히면 56%로 치솟는다. 그렇다면 한국 재벌 1위인 삼성으로 대상을 국한하면 어떨까? 놀랍게도 삼성 가문의 군 면제 비율은 73%나 된다. 10명 중 7명이 군대에 가지 않는 기적이 삼성 가문에서 벌어지는 셈이다.
-최태원은 어떻게 4조 원대 거부가 됐나?
최태원의 재산은 약 4조 원으로 이재용의 절반에 채 못 미친다. 하지만 최태원은 20년 만에 원금 2억 8000만 원을 4조 원으로 불려 무려 143만%라는 경이적인 수익률을 기록했다. 이재용의 수익률이 15만%인 것에 비해 최태원의 수익률은 이재용의 열 배에 육박한다. 전 세계에서 20년 만에 재산을 143만%씩이나 불린 투자자는 단언컨대 최태원이 유일하다.
-영화 베테랑의 모티브가 된 최철원의 야구방망이 폭행 사건
한 중견 간부는 최철원에게 골프채로 얻어터졌는데, 최철원이 얼마나 세게 후려쳤는지 골프채가 부러진 일도 있었다. 도구만으로 사람을 패는 게 성에 안 찾는지 하루는 최철원이 도베르만이라는 품종의 사냥개를 사무실에 끌고 왔다. 그리고 여직원에게 “요즘 불만이 많다며?”라고 말한 뒤 개 줄을 풀고 “물어!”라고 명령했다.
-헤지펀드를 불러들인 SK의 분식회계와 소버린 사태
영미권에서 최악의 분식회계를 저지른 기업으로 기억되는 엔론의 최고경영자 제프리 스킬링(Jeffrey Skilling)은 2006년 사법부로부터 24년 4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연히 1년의 감형도 없었고 스킬링은 아직도 감옥에 있다. 그런데 최태원은 분식회계로 구속된 이후 단 7개월 만에 병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져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게 바로 봉건과 자본주의의 또 다른 차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우리가 아직도 봉건적 재벌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적산 가로채기로부터 시작된 선경그룹의 출범
그것이 바로 “해방 직후 청년 최종건은 선경치안대를 조직해 선경직물의 일본인 간부들이 무사히 일본에 돌아가도록 도왔다”라는 문장이다. 그들이 남긴 기록에도 공장 중간 관리자였던 최종건은 분명히 이 치안대 결성을 주도했고 적산(敵産)을 남기고 떠난 일본인들의 탈출을 도왔다. 그리고 나중에 그 공장을 차지해 그룹의 기반을 닦았다.
-롯데시네마의 막장 드라마 ‘형제의 난’ 개봉
아무리 경영권 분쟁이 중요해도 평생 그룹을 이끈 아비의 정신건강 이상설을 흘리는 것은 어떤 형제의 난에도 볼 수 없었던 역대급 후레자식 전술이었다. 아비의 노년이 어떻게 기록되건 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롯데그룹 경영권에만 있었던 셈이다.
■저자 소개
이완배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동아일보》 사회부와 경제부에서 기자로 일했다. 네이버 금융서비스 팀장을 거쳐 2014년부터 《민중의소리》에서 경제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두 자녀를 사랑하는 평범한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가치 있는 행복을 물려주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지은 책으로 『경제의 속살 1·2』, 『한국 재벌 흑역사 (상)·(하)』, 『경제교과서, 세상에 딴지 걸다』, 『마르크스 씨, 경제 좀 아세요?』, 『생각하는 십대를 위한 토론 콘서트: 경제』, 『10대를 위한 경제학 수첩』, 『슈렉은 왜 못생겼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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